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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가 죽었단 말이다!" 불법촬영 재판에서 무슨 일이?

[현장] 광주고법, 1심보다 형량 늘려 징역 1년... 가해자 측 당당함에 피해자 부모 '분통'

등록 2020.02.13 07:27수정 2020.02.1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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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신부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불법촬영 사건 2심 선고공판이 12일 광주고등법원에서 진행됐다. ⓒ 소중한

 
"니 딸이 죽어도 그럴 거냐! 내 새끼가 죽어버렸단 말이다! 내 새끼 시집가야 했단 말이다! 흐어어엉..."
 
법정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부부가 한 남성을 향해 고성을 지르며 통곡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부부를 겨우 붙잡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부부가 날을 세웠던 남성은 법원을 빠져나갈 때까지 당당했고, 부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을 연신 내리쳤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2일 오후 3시 15분 광주고등법원 202호 법정. 오후 2시부터 여러 사건의 항소심 선고를 이어가던 재판부(광주고등법원 형사2부, 부장판사 염기창)가 32번째로 불법촬영(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 카메라등이용촬영)을 저지른 주아무개(40)씨를 불러 세웠다.
 
방청석에 앉은 부부는 초조한 표정으로 재판장과 주씨를 번갈아 바라봤다. 재판장이 입을 떼기 시작하자 법정이 고요해졌다.
 
재판부 "죄질이 극히 불량"
  
부부의 딸은 주씨와 순천의 한 종합병원에서 동료로 일하던 불법촬영 피해자였다. 주씨가 탈의실에 설치한 카메라에 딸의 모습이 담기고 말았다.
 
2020년 1월 11일 오전 11시. 부부의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는 이날은 딸의 결혼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딸은 피해사실을 알게 된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지난해 9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결혼을 앞두고 마련한 신혼집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는 딸이 너무도 힘들어하자 예비사위에게 부탁해 결혼 전 함께 살도록 조치했지만, 참극을 막을 수 없었다.
 
피해자는 부부의 딸만이 아니었고, 해당 병원의 직원들만이 아니었다. 주씨는 자신이 일하던 병원 탈의실뿐만 아니라 마트, 면세점, 호텔 등 공공장소에서 2년 동안 31회에 걸쳐 여성들의 신체를 몰래 촬영했다.
 
주씨는 1심(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형사2단독, 설승원 판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또 40시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 3년간 아동·청소년·장애인 시설 등 취업제한 조치도 내려졌다.
 
부부는 1심 결과에 분노했다. 검찰도 앞서 징역 2년을 내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즉각 항소했다. 광주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는 시민 753명의 서명을 모아 "국민들의 정서와 성인지 감수성에 기반한 판결을 요구하는 현 시대의 요구에 맞춰 판결을 해주시길 요청드린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2심 재판부에 제출했다.
 
반면 주씨는 형량이 너무 세다며 항소했다. 하지만 이날 2심 재판부의 선고는 단호했다.
 
"피고인이 피해자 중 2명과 합의한 점, 동종 전과가 없는 점은 유리한 사정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약 2년 간 31회에 걸쳐 병원 내 여성탈의실을 이용해 동료들을 몰래 촬영하고 마트, 면세점, 호텔 등 공공장소에서 가방 안에 휴대폰 카메라를 몰래 작동시켜 불특정 다수 여성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했습니다.

▲ 범행 기간, 장소, 방법, 피해자 수, 촬영부위 등을 고려할 때 그 죄질이 극히 불량한 점 ▲ 특정된 피해자 일부와 합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 1명은 자살에까지 이른 점 ▲ 불특정 피해자들은 식별이 어렵긴 하지만 공공장소 이용에 상당한 불안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비롯해 이 사건 범행의 경위, 범행 후 정황, 피고인 연령, 환경 등 여러 양형 조건을 종합했습니다.

주문,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 피고인에게 40시간 성폭력 치유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 피고인에 대한 정보를 3년간 공개하고 고지한다. 피고인에게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과 장애인 복지시설에 3년간 취업제한을 명한다."
 
차분히 법정 나가던 부부, 갑자기 왜?
 
1심에 비해 형량이 2개월 늘었고, 신상정보 공개·고지 조치가 추가됐다. 진전된 결과였지만 피해자 입장에선 아쉬운 결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부는 마음을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재판장이 주씨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그의 항소 이유에 근거가 없다고 말을 이어가자 부부는 탄식과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부부는 법정을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재판을 지켜본 김미리내 성폭력상담소장도 "피해자에겐 부족하겠지만 형량이 조금이라도 늘고 신상정보 공개·고지 조치가 추가된 점은 평가할 만하다"라며 "뿐만 아니라 재판장이 선고 요지를 통해 불특정 피해자들이 공공장소 이용에 불안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언급한 점은 매우 유의미하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부부가 법정을 빠져나오는 와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자신을 "(주씨의) 지인"이라고 밝힌 한 남성이 재판부가 내린 형량에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법정을 빠져나온 부부가 이에 항의하자 남성은 부부를 향해서도 '형량이 너무 강하다'는 취지로 말을 이어갔다.
 
결국 부부는 폭발하고 말았다.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부부를 겨우 말리는 와중에도 남성은 법원을 빠져나가며 주씨를 두둔했다. 남편은 울분을 토하며 화를 참지 못했고, 고함을 내지르던 아내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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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0일 오후 서울 수서역 계단에 불법촬영 근절 홍보물이 붙어있는 모습. ⓒ 연합뉴스

 
20여 분 후 겨우 진정한 부부는 그제야 눈물을 훔치며 심정을 토로했다. 남편 이아무개씨는 "오늘 법원에 오며 어떤 결과든 좋게 받아들이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다"라며 운을 뗐다.
 
"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뭐든 악착같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잖아요. 걔 형량이 높아진다고 딸이 살아나는 거 아니잖아요. (피고인) 그 사람도 5, 6살 자녀가 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근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하루하루가 지옥이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가해자를 두둔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아내 정아무개씨는 "1월 11일 오전 11시"를 수차례 되뇌었다.
 
"살아있었으면 제 딸 시집가는 날이에요. 신혼여행 계약서, 결혼식장 계약서 아직도 다 갖고 있어요. 그거 판사님한테 내려다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저쪽(피고인) 생각해서 안 냈단 말이에요. 오늘 이럴 줄 알았으면 다 낼 걸 그랬어요."

 
남편 이씨는 불법촬영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나도 딸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라며 한탄했다.
 
"저도 솔직히 예전엔 이 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당사자가 아니었으니까요. (피해 사실을 안 이후에도) 딸에게 이겨내라고만 했어요. 딸은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 제가 잘 안 보려고 하는데 가끔 (딸 관련 기사의) 댓글을 봐요. '자살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그러더라고요. 불법촬영은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살인행위에요."
 
김미리내 소장은 "SNS 등 공유기술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불법촬영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인지할 경우 엄청난 공포에 압도된다"라며 "그럼에도 오늘 법정 밖 상황에서 볼 수 있듯 불법촬영에 대한 문제의식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성폭력 범죄와 관련해 강간을 제일 위에 놓고 혐의 별로 등급을 매기는 경우가 있다"라며 "불법촬영은 가볍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고 형량도 매우 낮다, 단순히 엄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합당한 처벌을 바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법촬영 #재판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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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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