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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혼수코너를 구경하다가 문득 든 생각

부족한 것 투성이던 그 시절 그 살림

등록 2020.02.19 14:32수정 2020.02.1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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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시된 세탁기 광고가 자료화면으로 나왔다. 두 개의 세탁조, 세탁과 탈수가 따로 되는 그 세탁기. 50년 전 나온 세탁기라고 하는데, 당황스럽게도 3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 내가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세탁기로 보였다. 어떻게 같은 것처럼 보일까. 옛날 모델을 싸게 장만했었나 하는 생각 너머로 시댁에서 쓰던 것을 넘겨받은 기억이 까맣게 잊힌 시간을 뚫고 올라왔다.


나의 신혼집은 1층에만 여러 가구가 사는 다세대 주택, 그중 수돗가 근처의 방이 둘 있는 셋방이었다. 부엌이라고 따로 이름 붙일 것 없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냉장고로 꽉 차서 한 명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다였다. 신혼살림이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자족하려고 노력했다.

사정이 그러니 세탁기는 어디에도 둘 곳이 없었고 현관문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수도관을 따로 빼서 연결하지는 못했다. 세탁할 때면 세탁 호스를 문밖 공동 수도에 연결해 물을 받고, 세탁 수조에 물이 차면 다시 수도를 잠그고를 반복하며 세탁시간 내내 옆에 지키고 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다른 집들도 사정이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탁과 탈수가 한 번에 되는 것보다 내 마음대로 물을 받아 원하는 만큼 헹굴 수 있는 옛날 세탁기가 마음에 들었다. 결혼하며 물려받은 첫 세탁기는 그 집에서 이사할 때에도 그다음 이사 때에도 함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용하는 동안 잔 고장이 없었지만, 이후 모양도 예쁘게 잘 빠진, 이불까지 세탁된다는 대용량 세탁기로 바꿨고 새로운 살림을 장만하는 기쁨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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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 pixabay

 
최근 백화점 혼수 코너를 구경한 적 있다. 언젠가 아이들이 결혼을 할 수도 있으니 미리 봐두자는 생각이었다. 어마어마했다. TV와 세탁기, 냉장고만으로 몇 천을 훌쩍 넘는 금액에 아연했고, 현실(돈)의 문제를 실감했다.

기본이 되는 가전제품은 점점 많아지고 있고, 백화점에 가면 온통 막 출시된 신상품만 번쩍번쩍하게 전시돼 있다. 매장을 둘러보다 보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가전들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애들 혼수는 나중의 문제가 된다. 집에 돌아오면 괜히 냉장고 온도가 잘 지켜지는지, 가스레인지의 화력은 여전한지 의심을 하고, 닦고 만질 때마다 바꾸자는 소리를 달고 산다.

그래도 결국 당장 바꾸지 않고 쓰기로 마음을 바꾼다. 늘 부족한 것 투성이었던 신혼의 그 세탁기처럼 나름의 향수로 남을 수도 있으니. 
#세탁기 #TV광고 #신혼 #결혼 #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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