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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각처에서 동학농민군 학살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70회] 동학농민군과 동학도 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등록 2020.02.19 21:18수정 2020.02.1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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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들라마 '녹두꽃' 한 장면 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 추준우

일본군의 본격적인 동학농민군 학살은 청ㆍ일전쟁을 통해 청국군을 격파하고 친일정부를 세워 조선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0월 9일(음) 삼례봉기 이후 10월 12일(음)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이 본격화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15일(음) 충청북도 청풍 부근에서 충주지방 경비병이 동학군 수령급 이하 30여 명을 살육하고 소총 2,000정과 화약 등을 약탈하였다.

10월 25일(음)에는 대구 병참부의 일본군이 성주에서 동학군 11명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앞서 10월 12일 보병 제19대대가 한성을 출발해서 학살전에 참여하였다.

대대장 미나미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3개중대는 전병력을 3분하여 공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키 대위가 이끈 제1중대는 동로(東路)로 장호원을 경유하고, 모리오 대위의 제2중대는 서로(西路)로 진위를 경유하고, 이시구로(石黑光正) 대위의 제3중대는 중로(中路)로 양지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 학살대는 일본군 3개 중대가 주력을 이루고 기타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이 양성한 조선측 교도(敎導) 중대, 그 밖의 대륙낭인들이 참가하였다. 동학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의 접전을 벌인 것은 우금치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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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 곽동운

 
일본군은 동학군이 활동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동학도 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몇 지역의 사례를 살펴보자.

11월 10일 : 경상도 서남지방의 동학군이 집결하여 이문호가 선봉이 되어 단성현(현 경북 산청군 단성면)을 점거한 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불시에 공격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다음날 일본군의 기습으로 동학군 186명의 전사자를 냈다. 동학농민군은 결사적인 항전을 했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11월 18일 : 충남 천원군 목천 세성산에 포진한 동학군은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가 지휘하는 정예 1,000명과 마스키의 병력 1,000명 그리고 이두황이 이끈 관군 1만 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싸움에서 동학군은 지도자 김복용, 중군 김영우, 화포대장 원금복 등이 붙잡히는 등 많은 인적ㆍ물적 피해를 당했다. 특히 세성산은 지리적 요건으로 보아 동학군이 서울로 향하는 북진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여기서 막대한 희생을 치룸으로써 동학농민군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11월 19일 : 강원도 흥천군 서석면 자작고개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1,000여 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농민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한구덩이에 넣어 묻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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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농민군추모탑 충남 태안의 백화산은 갑오동학농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곳이다. 일본군에게 생포된 동학농민군은 백화산 교장바위 위에서 처참하게 살육을 당했다. 그 일을 길이 기억하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8년 피어린 현장에 추모탑을 건립했다. ⓒ 지요하

 
11월 24일 : 24~25일 양간에 걸쳐 능치(崚峙ㆍ공주시 학능면과 공주시의 경계)에서 성하영 경리청군과 호남군의 주력부대인 전봉준군과 접전이 계속되었다. 능치를 방어하고 있던 성하영 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대치하기 1주야를 지나서 25일 아침 홍운섭의 증원부대가 도착하자 관군은 3로로 나누어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다음은 홍운섭의 전황보고문이다.


경리청대관 조병완(趙秉完)으로 하여금 북으로부터 적의 우익을 공격케 했다.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와 일본병 30명은 남쪽으로부터 적의 좌익을 공격하고, 성하영은 정면으로부터 진격하여 3면 공세를 전개하여 반나절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적세는 과연 듣던 바와 같이 산과 들을 덮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인데 전봉준은 홍개(紅蓋)가 휘날리는 가마에 타고 기를 펄럭이며 대평소를 불면서 전선을 지휘하였다.

해질 무렵해서 동학농민군은 70여 명이 전사하고, 2명이 포로가 되자, 약간의 무기를 빼앗긴 채 후퇴하기 시작하여 건너편 시야산(時也山)으로 이동해 갔다. 해가 저물어 관군도 피곤해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회군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은 이날 밤 경천으로 후퇴하였다. (주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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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물들고 있는 장흥 석대들 전경. 동학농민군이 최후의 혈전을 펼쳤던 곳이다. ⓒ 이돈삼

 
11월 25일 : 경남 곤양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금오산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동학농민군 70여 명이 사망했다.

12윌 12일 : 신탄진을 거쳐 청주성 밖 3리 지경까지 진격한 김개남의 1만 여 명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청주병영 혼성군의 기습작전으로 1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동학군은 연산(連山)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12윌 13일 : 전북 진안군 정천면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기관총을 난사하여 동학군 수백 명을 사살했다.

12월 14일 : 우금치전투에서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이 논산군 상월면 대촌리에 머물고 있을 때 일본군과 장용진(張容鎭)의 통위영군 및 이두황(李斗璜 : 후일 총독부 고위관리, 도지사 역임)의 장위영군 흔성군이 기습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포살 또는 익사한 동학농민군이 300명이 넘었다. 이두황은 당시의 전황을 뒷날 "추풍에 낙엽과 같이 동학농민군이 떨어지고 밭두렁에 널려있는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길에 채였다"고 기록하였다.
 

미나미 고시로의 <동학당 정토경력서>(1895) 표지 동학농민군 학살 집행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 ⓒ 박용규

 
이 밖에 전라도 순천에서 동학농민군 150여 명 학살, 능주전투에서 20여 명 사망, 강진에서 포로 170여 명 집단학살, 장홍 자오현(自吾峴)에서 수백 명 학살 등 전국 곳곳에서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일본군이 어선을 동원하여 섬으로 피신하는 동학농민군을 뒤따라가 포살하고 애꿎은 섬 주민들까지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1894년 2월 고부봉기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동학농민군이 진압될 때까지 1년간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ㆍ경기도ㆍ황해도 일대에서 자행된 처절한 살육과 불타거나 약탈당한 재산은 지금 상세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11월에 동학농민혁명군이 재봉기한 이래 전투는 일본군이 주력을 이루고 정부 중앙군(京兵)과 지방의 영병(營兵)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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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앞에 세운 '갑오동학농민군집결지'라는 빗돌. ⓒ 장호철

 
일본군은 대동강 이남의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기 위해 남부병참감을 설치하였다. 11월 초순 남부병참감의 후비(後備) 보병 제19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 병참사령관 포병 중좌 이토는 후비보병 제18대대 제1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및 제10연대 제4중대와 협력하며 주로 경성 이남의 폭도 소탕에 임하여 제천ㆍ평창ㆍ정선ㆍ충주ㆍ연산ㆍ공주ㆍ개령ㆍ거창ㆍ남원ㆍ전주ㆍ무주ㆍ순천ㆍ나주지방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1895년 1월 상순 각지의 폭동을 전부 진정시킴으로써 각 대대는 그 수비지로 귀환하다. 이보다 앞서 1894년 11월 하순 황해도 지방의 폭도는 평산ㆍ강령ㆍ연안ㆍ황주ㆍ송화ㆍ장연의 각지에서 봉기하여 병참사령부 역시 이를 습격하다.

후비보병 제6연대 제4중대 및 제7, 제8중대의 일부는 이의 토벌에 종사하다. 익년 (l895년) 2월 상순 일시 진정시켰어도 3월 하순 재차 봉산ㆍ신천 부근에서 봉기하여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가 이를 진압하다. (주석 8)


주석
7> 최현식, 앞의 책, 184쪽, 재인용.
8> 김정명 편, 『조선주차군 역사』, 192쪽, 도쿄, 1968.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동학농민혁명 #동학군_ 패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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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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