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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주일님, 내 가슴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창간 20주년 공모- 나의 스무살] 분단과 함께 다가온 아버지의 스무 살

등록 2020.02.24 11:27수정 2020.02.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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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의 제주 여자와 25세의 함경남도 남자가 전쟁 중에 제주에서 만나 결혼하였고, 그렇게 70년 가까이를 함께 하셨다. ⓒ 이진순

 
그는 1928년 10월 7일(음력 8월 24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20년 1월 31일 제주시의 한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91년 3개월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강풍 앞에 일렁이는 불꽃처럼 그의 일생은 그렇게 타올랐고 또 사그라져갔다. 내 아버지다.


생모는 그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2~3세의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과 가족을 이루어 살았다. 가족 속에서의 소외감과 결핍은 아마도 그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상처의 근원이었으리라. 둘러앉아 맛있는 것을 자기들끼리만 몰래 나눠 먹는 그 완강한 배척 앞에서 그는 많이도 외로웠고 아팠다. 못 본 척 뒤돌아서야 했던 그때, 그가 불렀던 찬송들은 따뜻한 위로였고 의지처였다.

열일곱 살이 되던 1945년, 그는 함경남도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 이후 남과 북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 아래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그에게 사회주의 체제는 일상적인 면에서 충돌을 일으켰던 것 같다. 젊은 시절, 기독교 청년조직에서 일했던 그는 종교활동에 대해 당에 매번 보고해야 했고 검열당해야 했다 한다. 종교인에게 종교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인데, 그 가치가 정치에 의해 부정당하고 훼손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던 것이다.

스무 살이 되던 1948년 드디어 남과 북은 공식적으로 별개의 정부 수립을 선언하면서 서로 넘을 수 없는 분리의 장벽을 세웠다. 그의 스무 살은 이렇게 분단과 대결의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제주 4·3항쟁 등 단독정부 반대를 외친 무수한 한반도 주민들이 있었으나, 이런 바람은 그들에 대한 살육으로 마무리되었다.

분단으로 시작된 그의 20대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20대 청년이던 그는 인민군 소집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많은 청년들과 함께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청에 소집된 그는 총 맞아 죽을 각오로 도주하였다. 죽음을 각오했던 그에게서 죽음은 빗나갔고, 그는 지인의 집 마룻바닥 밑에 숨어 1~2주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남한을 향하는 배에 올랐다. 역사책에 나오는 아수라장 같은 흥남 부두의 현장 속에 그의 목소리가, 그의 숨소리가, 그의 절실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조금 이따 보자며 나눈 짧은 이별 인사는 결국 지키지 못한 약속이자 그의 가슴에만 남아있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사심과 탐욕 없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삶
 

흥남부두 철수 때 피난민 대열에 오른 아버지는 남하 후 육군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언제나 잊지말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옛날 사진이다. ⓒ 이진순

 
그렇게 그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남한의 군인으로 육군에서 복무하였다. 전선은 어느 정도 고착되었으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던 1952년 9월 26일, 그는 내 어머니와 결혼하였다. 먼저 남하했던 큰아버지를 찾아 제주에 왔다가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전쟁 중이던 53년 6월, 첫 딸을 낳았다. 이렇게 두 분은 67년 4개월의 결혼 생활을 이어오셨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공적이 되는 야만의 시간인 전쟁 중에도 그는 결혼하였고 생명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다수의 한반도 주민들은 전쟁 중에 찢기도 쫓기면서도 삶의 뿌리인 일상을 살아갔고, 또 그랬기에 우리의 삶은 가능한 것일 거다.

더는 넘을 수 없는 가까운 곳, 자신의 고향과 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했고, 언젠가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언제까지인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 땅에 교회를 세우는 데 보태고 싶다며 한푼 두푼 모은 2000만 원은 결국 이곳 교회의 건축을 위해 보태졌다.
 

사진으로만 뵜던 북한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이 사진이 있어 감사하셨고 또 마음 아파하셨다. ⓒ 이진순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전쟁 이후인지 미국에 가서 살게 된 여동생 부부가 1991년 북한을 방문하여 고향 소식을 전해왔다. 북한의 할아버지가 1989년 8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사진 몇 장... 소중하고 슬픈 그 사진들은 부모님 집 벽에 그리고 앨범에 간직되어 있다.

남한이 북한을, 북한이 남한을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알지 못하듯이 나 역시 그가 온몸으로 넘어왔던 삶의 굽이굽이를 몇몇 조각들로만 알고 있음을 이 글을 쓰면서 절실히 깨닫는다. 언제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의 삶에 대해 들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제 많은 궁금함은 그저 궁금함으로 묻어둔다.

어떤 면에서 나는 그리고 내 형제들은 분단과 전쟁이 낳은 자식들이다. 분단과 전쟁이 아니었던들 내 부모가 만날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존재 역시 그럴 것이다. 당신의 20대가 그러했듯 우리를 낳고 키우는 내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았지만, 그럼에도 사심과 탐욕 없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주어진 운명 속 당신의 최선
 

북한의 아버지 가족들 미국에 가있는 아버지의 여동생 부부가 1991년 북한을 방문한 덕에 이 사진들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 이진순

 
꿈, 설레임, 희망 등의 단어를 스무 살 청춘의 특권이자 상징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이 그러했듯 많은 스무 살이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는 꿈과 설레임과 희망 대신 분단과 전쟁과 이별의 아픔 속에서 20대를 맞았고, 그렇게 주어진 운명 속에서 당신의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게 꿈 없이 설레임 없이 스무 살이 다가왔지만, 그는 그런 그의 삶을 온몸으로 살다 가셨다. 꿈이 삶의 동력일 수도 있지만, 결핍과 상처가 삶을 견뎌낼 힘이 되어주기도 함을 그의 삶을 통해 배웠다.

나의 아버지 이주일님!

당신이 이생을 마감한 그 날이, 그 세상에서는 새로운 생일인가요? 그곳에선 어리석고 야만적인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 일은 없겠지요.

이곳에서도 이제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벌어지는 전쟁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드려요.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으나 항상 감사의 마음으로 풍요로웠던 당신의 모습, 내 가슴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분단 #한국전쟁 #흥남철수 #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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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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