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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놓치기 쉬운 이것, '제인 에어'에게 배웠다

[여자의 소설]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

등록 2020.03.20 18:23수정 2020.03.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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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가 통찰력 있게 그려낸 여성 서사를 통해 여성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여성에게 의미 있는,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여성 서사가 우리 삶에 스며들길 기대합니다.[기자말]
제인 에어에게 반하다

고전의 힘은 그 인물의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서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수백 페이지를 읽게 하는 데 있다. 긴 시간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된 소설 속 인물이 죽을지 살지, 행복해질지 불행해질지, 깨달음을 얻을지 얻지 못할지, 끝까지 욕망의 편에 설지 아닐지 우리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인물의 삶을 따라간다. 고전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의 삶도 우리네 삶처럼 과정이 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과정을 거쳐 왔다면 같은 결말도 다른 이야기임을 안다.
 

책표지 ⓒ 을유문화사

 
제인 에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 치고 제인이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진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줄거리를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그를 한 번 떠난 적 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로맨스 소설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하지만 역시 과정이 궁금하다. 제인이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제인이 로체스터를 용서하고 돌아가는 과정. 과정이 제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줄 테니까.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엔 이 '과정'을 의심했다. 내가 과정에 설득될지도 의문이었다. 소설을 읽기 오래전부터 제인 에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고아라는 것과, 그가 그녀의 고용주라는 것, 그리고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하리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줄거리에서 내가 느낀 건, 선택지의 부재였다. 제인 에어에겐 애초에 예시가 하나인 문제가 놓여 있던 건 아닐까. 마치 갓 눈을 뜬 아기 오리처럼 제 앞에 있는 이가 엄마라 착각하며 로체스터를 선택한 건 아닐까.

듣기로,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에게 버림받은 건, 그의 거짓말에 있었다. 유부남이 총각 행세했다지 않나. 아내를 둔 채로 제인과 결혼하려다가 딱 걸렸다지 않나. 성격 또한 괴팍하다지 않나. 그렇다면, 역시 각인 효과 때문에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 것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그저 절망에 빠진 남자를 구원해주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릿적 여성상을 답습한 것뿐인 것 아닐까. 하지만 제인 에어가 이런 캐릭터일 리는 없었다. 이런 캐릭터가 이토록 오래, 특히 여성들에게 듬뿍 사랑을 받긴 어려울 테니까. 그래서 너무나도 유명한 이 소설을 읽기 전, 나는 궁금했다. 수많은 독자들처럼 나 역시 제인 에어를 좋아하게 될까. 

소설을 읽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제인 에어>라는 소설을, 제인 에어라는 소설 속 인물을 좋아하게 됐다, 그것도 무지! 제인 에어에겐 왜 로체스터여야만 하는지 이해하게 됐고, 로체스터의 거짓말 또한 (제인 에어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용서하게 됐다.


사실 나는 제인이 로체스터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한다면 로체스터가 어떤 인간이든 둘의 사랑을 응원하게 될 게 뻔해' 하고 생각했는데, 어린 제인을 이미 신뢰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각인 효과 운운할 필요 없이, 제인은 작고 외로운 고아 소녀였을 때부터 결코 이 세상을 순진하게 바라보지 않는, 똑똑한 아이였다.  

제인 에어는 이렇게 커왔다

제인 에어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외삼촌 댁에서 외톨이로 자란다. 외삼촌이 죽자 더는 제인 에어에게 관심을 주는 이도, 사랑을 주는 이도 없다. 제인 에어는 주로 이런 기분을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등감, 굴욕감, 우울, 분노, 두려움. 외숙모 리드 부인은 제인에게 "내 마음에 들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라"라며 그녀의 내면을 훼손하려 했고, 어른들은 제인에게 "넌 명랑하고 쓸모 있는 아이가 되어야 해"라며 착한 아이가 될 것을 강요했다.

어린 제인은 사촌 삼 남매에겐 허용되는 무한한 사랑과 인정이 자신에겐 허용되는 않는다는 사실, 더부살이하는 소녀에겐 언제나 말과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에 화를 내면서 슬퍼한다. 그녀는 이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어렴풋이 깨달아가며 분노로 뜨거워졌다가 외로움으로 위축되길 반복한다.

어른들의 몰인정한 말을 들을 때면 용기를 잃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약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되길 강력히 거부한다. 명랑한 아이로 보이기 위해 억지로 웃거나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대신, 본인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명확히 응시하며 울고 난 뒤에는 이렇게 말을 하는 아이다. 

"너무 불행해서 운 거예요."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는 척하는 대신 울고 화내며 버럭버럭 대드는 제인. 그런 제인을 탐탁지 않아하는 어른들. 그래도 자신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제인. 하지만 제인은 언젠가는 더 나은 방법으로 세상을 대면하고 싶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며 미래를 희망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 맞추려고 하는데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도 그들을 싫어해야 해" 하고 말하는 이 당당하고 지혜로운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리드 부인 집을 떠나 로체스터를 만나기 전 8년 동안 로우드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제인 에어는 더 성장한다. 이제는 성숙한 여성이다. 더는 상처만 받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인정과 사랑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자기 자신을 믿게 되었고, 이젠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서 충분히 자각하게도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본성'이 자신을 이끈다는 것, 여자에게도 "엄격한 속박이나 너무 지나친 정체는"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는 것, "관습상 여자답다고 규정된 것을 넘어서서 더 배우고자 하고 더 일하고자 한다고 여자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는 것도 안다.

열여덟 살 제인 에어는 로우드를 떠나 손필드로 향하며 더 넓은 세상, 더 풍부한 경험, 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꿈꾼다. 가정교사 제인 에어. 가정교사는 빅토리아 시대에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제인에겐 왜 로체스터여야만 했을까 
 

영화 <제인 에어> 속 한 장면.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진 제인 에어. ⓒ 시너지하우스

 
제인과 로체스터의 첫 만남.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던 주인과 외출 중이던 가정교사의 만남. 샬럿 브론테는 이 만남을 통해 우리가 꼭 이상형의 상대, 또는 완벽한 상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재미있게도 제인이 로체스터에게 허물없이 다가갈 수 있던 건 그의 '많은 나이',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 '점잖지 않은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서 위화감을 느낄 필요 없었기에 그녀는 그가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가혹하게 변덕을 부"렸는데 이때부터 제인은 그를 잘 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벗고 그를 동등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고용주를 어려워하기는커녕 거침없이 솔직한 제인의 모습에 물론 로체스터는 푹 빠져버린다.

나는 특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마음에 들었는데, 하나같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능청스러우면서 재치 있다. 두 사람은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자존심을 걸고 한판 대결을 펼친다. 가정교사는 결코 주인에게 아부하지 않고, 주인은 가정교사에게 고압적이지 않다. 나는 나중에야 이 대화가 제인 에어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불꽃 튀는 둘의 대화를 한번 들어볼까.
 
"말해 보시오." 그가 재촉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뭐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오. 이야기 주제나 방식은 전적으로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따라서 나는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 자체를 위해 말하고 뭔가 보여 주길 원한다면,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걸 알게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안 하는구려, 에어 양?"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약간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황급히 내 눈을 쏘아보았다.
"계속 아무 말도 안 할 셈이오? 화났구려. 아! 일관성이 있소. 어리석게도 내가 무례한 부탁을 했소. 에어 양, 용서해 주시오. 사실 당신을 아랫사람으로 대하고 싶지 않소. 말하자면, (자신의 말을 고치면서) 당신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고 한 세기 앞선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싶소."(중략)
"저보다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이 많다고 해서 제게 명령할 권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우월한지는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달려 있죠."

둘의 사랑이 깊어지며 제인 에어의 매력은 더 두드러진다. 제인은 사랑에 빠지자 더 독립적이고 강한 여자가 된다. 로체스터가 제인을 헛되게 이상화할 때마다 제인은 '나는 당신의 요정도, 천사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녀는 사랑에 필요한 건 이상화가 아니라 받아들임이라는 걸 안다.

이상화란 한 사람이 지닌 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지워 그 사람을 하나의 편의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폭력에 다름 아니니까. 그녀는 작고 귀여운 요정도, 집안의 천사도 되고 싶지 않았다. 제인은 그저 단점 많은 제인으로 사랑받길 원했다. 로체스터가 결점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제인 에어는 사랑 때문에 그녀 자신이 지워지길 원하지 않는다. 로체스터란 강력한 중력에 의해 그녀 자신이 쪼그라들거나 변형되길 원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후에도 제인 에어는 제인 에어로 살아야 한다. 로체스터의 거짓말이 탄로 나 그를 떠나갈 때 제인 에어가 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사랑 때문에 내가 나를 업신여겨선 안 된다는 것.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에게 다시 돌아온 건, 그를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로체스터가 불쌍한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돕고 품어주려던 것도 아니다. 바뀐 로체스터의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자아를 잃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었기 때문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젠 그의 곁에 머물러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체스터를 떠나 있던 시기, 제인은 '왜 로체스터여야만 하는지'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제인의 본성을 억누르며 순종할 것만 요구하던 목사 세인트 존과 달리 로체스터는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 살아가게끔 바라봐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로체스터 앞에선 마음껏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제인은 자신의 본성이 로체스터와 잘 맞는다는 걸, 그 앞에선 자유롭다는 걸 그에게 돌아오고 나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괴로운데 억지로 자제하지 않아도 되고 생기와 즐거움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나와 그가 아주 잘 맞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푹 놓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그에게는 위안이 되거나 기운을 돋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너무 기뻤다. 나의 본성 전체가 생기를 띠며 빛났다."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길 원하는 제인 에어, 그런 제인 에어가 선택한 사랑. 어찌 이 사랑을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인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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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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