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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장군의 가묘와 비문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76회] "장군께서는 이제 편안히 여기에 쉬시며 민족통일의 그날을 굽어 보시라"

등록 2020.02.25 21:46수정 2020.02.2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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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김개남장군은 유언 한 마디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사후 시신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수급은 서울과 전주에서 두 번씩이나 효수되고 시신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지금 정읍시 산내면 동곡리 지금실에 머리털 한 올도 없는 가묘가 조성되었다. 마치 서울 용산 효창원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허묘)가 조성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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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가묘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에 위치해 있다. 효수 당시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1995년 4월 가묘를 만들었다. ⓒ 류효정

 
다시 무심한 세월이 흘렀다.

100년이 지난 1993년 5월 3일, 전주시내 덕진공원에는 김개남 장군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지고, 1995년 3월 1일 비명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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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개남장(開南丈)'의 일부 혁명가 김개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서부원

 
김개남 장군의 비문

여기 상두산 품 안에 포근히 안긴 하늘 아래 첫 마을 뒷 지금실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이 마을 어귀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영혼이 쉬고 계시다.

장군은 1853년 9월 15일 도강 김씨 아버지 대흠과 어머니 익산 이씨 사이에 셋째로 태인현 윗 지금실에서 태어나시니 어릴 적의 이름은 영주였다. 장군이 태어나 자랄 적에 외국 침략자들은 우리의 이권을 앗아가고 탐학한 지배자들은 온갖 부정을 저지르며 민중을 압제하고 있었다. 장군은 의협심이 남다른 천성을 지녔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사귀었으며, 무너져 내리는 나라와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의기를 떨쳐 동학에 입도했다.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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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한산사에서 내려다본 악양들판의 모습이다. 멀리 지리산 구제봉이, 오른쪽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동학농민군은 섬진강을 피로 물들이고, 그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숨어 든다. ⓒ 류효정

  3월 '광제창생ㆍ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려 일어나니 그 횃불이 삼천리강산에 타올랐으며, 의기는 하늘에 뻗쳤고, 함성은 산하를 울렸다. 장군은 전봉준ㆍ손화중과 함께 3대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백산 황토재 황룡강에서 무도한 자들이 보내는 군대를 여지없이 무찌르고 이어 호남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장군은 청과 일본의 군대가 개입하는 절박한 정세에서만 부득이 관군과 화해하고 남원에 웅거, 전라좌도를 호령했다.

장군은 그 해 6월부터 10월까지 남원에서 무도한 벼슬아치와 양반토호를 징치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벼슬아치들은 벌벌 떨고 민중들은 춤을 추었도다. 이때 장군은 조선을 남쪽에서부터 개벽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개남(開南)으로 바꾸니, 그의 신념은 차돌 같고 그의 용기는 하늘에 뻗쳤다.

일본 침략자들이 다시 동학농민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자 전봉준 장군은 공주로, 김개남 장군은 청주로 짓쳐 올라가니 민중은 십만 대군의 저 눈빛을 보고 함성을 질렀도다. 두 장군은 침략자들의 대포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뿌리고 발길을 돌리니, 우리 민족은 다시 깊은 수렁에 빠졌구나. 장군은 종성리(산내면 종성리)에서 무도한 자들에게 잡혀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하니 때는 1894년 12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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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생가터 생가터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은 아예 잡풀더미 속에 묻혀있고(사진 왼쪽 아래), 입구 오른편에는 폐가의 지붕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 서부원

이 어이할꼬? 이날 하늘도 찡그리고 강산도 울었으리, 장군의 유체는 효시되고, 또 참혹하게 버려진 바 거두는 사람도 없었다. 겨우 아내와 아들이 살아남아 숨을 죽이며 옛 일을 아련히 전해 주었다.

이제 1백 년이 넘어서 이후 민주인사가 뜻을 모아 장군과 첫째 부인 연안 이씨는 가묘로 영혼을 모시고 둘째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을 해 모시니 보는 이는 옷깃을 여미고 위대한 민족 지도자를 추모할진저, 외아들 백술과 경주 김씨 부인 사이에 형제가 태어났고 환옥에게서는 상기, 종기, 순, 공순, 귀례, 영님이가 태어났으며 환섭에게서는 인기, 인영, 귀님, 귀남 그리고 봉기가 태어났으니 번성하도다.

장군께서는 이제 편안히 여기에 쉬시며 민족통일의 그날을 굽어 보시라.

                                                                     1995년 3월 1일
                                                   역사문제연구소장 이이화 삼가 짓고,
                                            전흰빈 돌 강희남 후비 효봉 여래 영 쓰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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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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