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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나였습니다

[서평] 앤절린 밀러 지음,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윌북, 2020)

등록 2020.03.01 20:59수정 2020.03.0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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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내가 원했던 주제로 진행되는 집단상담이 열렸다.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이틀 동안 하루 8시간씩 진행되는 집단상담이었다.

무척 참석하고 싶었다. 상담자로서 경력에도 도움이 되고, 나를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될 터였다. 하지만, 대구에 사는 엄마이자 아내인 내가 주말 이틀을 서울에서 보낸다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틀 연속 왕복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할 일이었고, 1박 2일을 하자니 가족들이 걱정됐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은 절친한 친구가 제안을 해왔다.

"서울 온 김에 얼굴 좀 보자. 토요일에 밤 9시 반에 끝난다며, 그때 대구 갔다 일요일에 다시 오려면 엄청 피곤할 거고. KTX왕복 비용이면 숙소가 더 쌀지도 몰라. 숙소 잡고 자라. 내가 숙소로 놀러 갈게. 회포 좀 풀자."

솔깃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선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과 아이가 1박2일을 나 없이 지낼 수 있을까?'
 '강아지 밥도 잘 못 챙겨주던데 그건 또 어쩌고?'
 '아이가 나 없으면 잘 때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나는 지레 걱정을 하며 남편과 아이에게 물었다. "나 이번에 서울 가서 1박 하고 친구도 만나고 오면 어떨까?" 남편과 아이는 "우린 상관없어! 잘 지낼 수 있으니까 다녀와" 남편과 아이는 너무나 흔쾌히 대답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서점서 신간 알림이 왔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앤절린 밀러 지음, 이미애 옮김, 윌북, 2020). '인에이블러'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책 소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난 용기를 냈다. 주말 동안 남편과 아이를 떠나 서울에서 홀로 1박을 하기로 말이다.

 인에이블러(enabler)란?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초등학교 교사이자 가족관계학과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저자 앤절린 밀러는 '인에이블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인에이블러를 한 단어로 번역한다면 '조력자'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 조력자는 단순히 돕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독립된 삶을 방해하는 사람. 이게 바로 '인에이블러'다.

저자는 아내와 엄마로서 자신이 인에이블러로 살아온 과정을 담담한 어투로 전한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아버지에게서 성장한 저자는 알코올을 전혀 하지 않지만,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스탠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스탠은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자는 이런 남편을 돕기 위해 늘 그의 기분을 살피고 맞춰준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노력들이 '남편의 성취를 통해 보상받으리라'(36쪽)고 믿으며 참고 또 참아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남편의 우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런 가운데 저자는 네 아이의 엄마가 된다. 그 중 아들 존이 스무살이 될 무렵, 정신적으로 혼란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존은 극도로 흥분하거나 피해망상적인 행동을 보이며 불안해했고, 결국 분열정동장애(기분장애와 조현병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병) 진단을 받는다. 이제 그녀는 남편 스탠이 아닌 아들 존에게 몰두한다.

그러자 변화가 생긴다. 존에게 신경쓰느라 스탠을 내버려두자 거짓말처럼 스탠의 우울증이 낫기 시작한 것이다. 스탠은 저자가 대신해왔던 것들을 스스로 하면서 독립적인 한 사람이 되어간다. 저자는 비로소 알아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스스로 자신 몫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함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인에이블러'였음을 깨달은 후 아들 존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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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스스로 자신 몫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 pixabay

   
인에이블러가 되는 원인

앤절린 밀러는 사람들이 '인에이블러'가 되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한다. 하나는 바로 낮은 자존감이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는 이들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에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다. 이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괴로워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이들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랐다. 내 자존감은 거기에 달려 있었다." (78쪽)

 하지만, 인에이블러에게는 도움을 주는 일이 끝났을 때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 때문에 인에이블러들이 주는 도움은 상대방을 성장시키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문제를 유지하거나 조장하도록 한다. 이런 인에이블러들의 성향은 누군가에게 의존해 사랑받음을 확인하고픈 '의존자'들의 성향과 딱 맞물린다. 이 때문에 '인에이블러- 의존자' 관계는 공고히 유지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가 인에이블러 되기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은 남의 기분을 맞춰줄 때 칭찬을 받아왔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갈 사회적 경제적 힘을 갖추지 못해왔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고,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됨으로써 존재를 증명해왔던 것이다.
 
"어머니와 내 자매들, 그리고 내 딸과 나는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서 좌절을 경험했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결정을 내릴 때에도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남자들에게 종종 물어보아야 했다. 몇백 년에 걸쳐 여자들은 직접적인 힘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슬리거나 교묘하게 조작하거나 은밀히 보상을 주고 벌을 주는 등 온갖 '막후'수단에 의지해왔다." (146-147쪽)

"사회 또한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인에이블러가 되도록 조금씩 몰아갔다. 몇 천 가지 미묘한 신호를 보내면서 여자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역할은 내게 잘 맞았다."(77쪽)

 자기 몫의 행복을 책임지는 삶

앤절린 밀러의 자전적 이야기와 분석은 아내와 엄마로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주말 동안 집을 비우는 것을 그토록 망설였던 것이 남편과 아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인에이블러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남편과 아들이 흔쾌히 서울서 1박을 해도 된다고 말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나는 남편과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함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나 역시 '인에이블러'였음이 분명했다.

이를 깨달은 후 나는 책의 후반부에 정리된 인에이블러에서 벗어나는 법을 마음에 새겼다. 저자는 시간을 들여 자신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하든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며, 변화를 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겁을 먹지 말라고 조언했다. 또한, 가족 바깥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개인의 정체감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적었다. 이 조언에 따라 나는 내가 관심 있는 주제의 집단상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주말에 집을 비우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물론, 서울서 1박을 하며 친구도 만나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집단상담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오래된 친구와 보낸 그 시간은 내게 더없는 힐링이 되어주었다. 가족들도 나름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등산을 싫어하는 나와 함께 가지 못하는 어려운 등산코스에 아들과 함께 도전해 성공했다며 뿌듯해했다. 아들 역시 엄마없이 하룻밤을 보낸 자기 자신을 대견해했다.

 앤절린 밀러는 딸 니나와 함께 상담가를 찾았을 때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상담자가 나를 쳐다보다니 물었다.
 "딸의 행복이 당신 책임인가요?" 나는 대답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상담가는 니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엄마의 의무라고 생각하니?"
 니나는 "물로 아니죠"라고 대답했다. (93-94쪽)

우리 중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책임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책임진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남편이고 딸이고 아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자기 몫의 행복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 나 역시 나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건 1988년이다.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여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 (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인에이블러의 고백

앤절린 밀러 (지은이), 이미애 (옮긴이),
윌북, 2020


#인에이블러 #행복 #여성 #엄마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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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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