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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결혼을 잘해야 한다"는 고모를 위한 변명

[리뷰] <작은 아씨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나타난 여성의 삶

20.02.27 17:25최종업데이트20.02.2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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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 아씨들>(2019)에서 대고모 역을 맡은 배우 메릴 스트립 ⓒ 소니픽처스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여자는 결혼을 잘해야 해." (영화 <작은 아씨들> 대고모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 대사) 

"(마리안느에게 딸 옐로이즈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의뢰하며) 산책을 하며 딸을 관찰하고 (그녀 몰래) 그림을 완성하세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백작부인 역을 맡은 발레리아 골리노 대사) 

18세기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해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감독 셀린 시아마)과 19세기 미국 남북전쟁 당시 시대상을 그린 <작은 아씨들>(감독 그레타 거윅)에는 여성 주인공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한다. 

본인은 평생 독신을 고수했지만 조카들에게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이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비법임을 설파하는 <작은 아씨들> 대고모(메릴 스트립)는 "고모님은 결혼을 안 하셨잖아요?"라는 조(시얼샤 로넌 분)의 지적에 "난 돈이 많잖니"로 응수한다. 

"여자는 결혼을 잘해야 한다"는 대사로 수많은 21세기 여성 관객들의 뒷목을 잡게한 고모님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가 돈이 있으면 결혼을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작은 아씨들>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도 화가인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분)가 있긴 하지만, 귀족 여성인 옐로이즈(아델 에넬 분)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억지 결혼을 해야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딸 옐로이즈(아델 에넬 분)의 결혼을 강행하는 백작부인(발레리아 골리노 분) ⓒ 그린나래미디어(주)

 
당시 귀족 여성이 결혼을 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수녀원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찌감치 결혼을 피해 수녀원에 들어간 옐로이즈는 결혼 대신 자결을 택한 언니 대신 원하지 않는 운명을 이어받게 된다. 보통 혼인 당사자가 결혼을 거부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감행하면 혼사를 취소하는 게 도리일 것 같은데 동생을 대타로 내세워서라도 추진하는 거 보니 집안을 위해서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결혼인 듯하다. 실제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옐로이즈 어머니가 큰 딸을 잃었어도 밀라노 귀족 가문과의 혼사를 놓지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등장한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응접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끼로 가득한 성벽,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적막감만 감도는 저택에는 오직 어린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 분)만이 집안일을 돌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영화 속 여성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남성중심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여성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옐로이즈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이는 그녀의 엄마인 백작부인이고, 훗날 마리안느와 옐로이즈의 사랑의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된다. 부자 남성과의 결혼 대신 꿈 찾아 사랑 찾아 떠나는 조카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작은 아씨들>의 대고모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은 말한다. 부유한 남성과의 결혼이 딸, 조카의 미래를 위한 최선임을 말이다. 
 

영화 <작은 아씨들>(2019) ⓒ 소니픽처스코리아

 
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 있었기에 평생 독신으로 자유롭게 살다가 여성인 조에게 유산을 물려줄 수 있었던 <작은 아씨들>의 대고모와 남편의 부재와 집안의 몰락으로 딸을 얼굴도 모르는 귀족 남성에게 보낼 수밖에 없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백작부인의 속사정은 매우 다르다. 이쯤 되니 드는 질문. 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귀족 여성 옐로이즈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을까. 과거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옐로이즈의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했을까. 그리고 <작은 아씨들>의 고모는 자신은 혼자 살고 있음에도, 조카들에게는 돈 많은 남성들과의 결혼을 끊임없이 주지시켰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페미니즘 영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올란도>(1993)에서 찾을 수 있을까. 1600년 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예언에 힘입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멸의 인간이 된 귀족 남성 올란도(틸다 스윈튼 분)은 200년 뒤 여성의 몸으로 바뀌자 그의 외모만큼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었던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놓인다. 여자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당시 시대상 때문이었다. 그나마 세월이 지나고 여성 또한 재산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 재산을 상속받을 아들이 없다면 다시 국고에 환수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여자가 되자마자 남성일 때는 몰랐던 온갖 차별과 억압을 한 몸에 받게된 올란도는 그제서야 남성 우월주의 현실을 직시하고 개탄한다. 

수백년동안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살았던 귀족 남성도 여성의 몸으로 바뀌니 바로 재산을 몰수당하는 형국이니 태초부터 여자로 태어났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백작부인과 <작은 아씨들>의 대고모가 여성 주인공을 위협하는 빌런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현실에 순응하고 딸, 조카와 같은 후배 여성들도 이를 따르기를 강요하게 만드는 시대상이 주는 위압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공동 주연으로 활약한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 그린나래미디어(주)

 
여성은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을 소유하기가 어렵고 사회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아 원하지 않은 결혼 압박에 시달렸던 지난날 여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작은 아씨들>의 결말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수많은 제재가 가해지는 현실에서도 주인공들은 여성 간의 사랑과 우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름의 저항을 꾀한다. 

세월이 지나고 여성들도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예전 여성들과 달리 왕성한 사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억압은 줄었다고 하나, 보이지 않는 은밀한 차별과 맞서야 하는 21세기 여성들에게 지금보다 여성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던 시절, 그럼에도 의연하게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했던 여성 선각자들의 등장은 큰 울림과 용기를 선사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전체 극장 일일 관객수가 10만명이 되지 않는 극심한 침체 속에서도 의미있는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는 <작은 아씨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성과가 빛나는 이유다. 
 

영화 <작은 아씨들>(2019)에서 대고모 역을 맡은 배우 메릴 스트립 ⓒ 소니픽처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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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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