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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한 마디에... '기형'이 된 국회의사당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국회도서관 ①

등록 2020.03.19 12:06수정 2020.03.1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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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제'를 시작하고 발전시킨 미국이지만, 미국 헌법의 제1조는 입법부, 즉 '의회'(議會)에 대한 조항으로 시작한다. 미국 사회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어떤 위상을 갖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미국 의회는 세계 최대 도서관인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을 보유하고 있다. 시민을 대표하는 의회는 왜 '도서관'을 필요로 할까? 미국 의회도서관을 살펴보면 의회와 도서관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다.

의회는 왜 '도서관'을 필요로 할까
 

미 의회도서관 ‘토머스 제퍼슨관’ 토머스 제퍼슨관은 미 의회도서관 본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1800년 존 애덤스 대통령 시절 출범한 미국 의회도서관은 1814년 영미전쟁 과정에서 불타고 말았다. 의회도서관의 재건에 나선 의회는 토머스 제퍼슨의 장서를 23,940달러에 사들였다.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제퍼슨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가진 사람이었다. 미 의회도서관은 토머스 제퍼슨관(1897), 존 애덤스관(1939), 제임스 매디슨 기념관(1981)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건물로 이뤄져있다. 초대 도서관장은 존 제임스 벡크리(John James Beckley)다. 의회도서관장은 ‘의회사서’(librarian of congress)라고 불린다. ⓒ Wikipedia

 
미국 의회도서관 설립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지식과 민주주의가 직접적 관련이 있으며 정치 발전에 중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를 지향한다. 법치주의는 시민 대표인 의회의 입법 활동을 통해 구현된다. 의회의 입법 활동은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를 위한 핵심 보좌기관이 바로 '의회도서관'이라는 것이다.

"국민을 계몽하라. 몸과 마음의 폭정과 억압은 악령이 새벽에 자취를 감추듯 사라질 것이다(Enlighten the people generally, and tyranny and opressions of the body and mind will vanish like evil spirits at the dawn of day)."

미국 제3대 대통령이었던 제퍼슨의 생각은 의회도서관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 의회도서관 본관에 해당하는 건물이 '토머스 제퍼슨관'(Thomas Jefferson Building)이라고 명명된 것은 이 때문이다.

제퍼슨의 생각은 민주주의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시민이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파행을 겪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가 남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

국회도서관의 시작 : 도서실에서 도서관으로
 

국회도서실 개관식 국회도서실 개관식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는 관계자들. 1952년 2월 20일 개관식 때 촬영한 사진이다. 국회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닌 ‘도서실’로 출발했다. 사진 오른쪽부터 존 무쵸 주한 미국대사, 윤택중 의원, 신익희 국회의장, 박종만 국회사무총장이다. ⓒ 국가기록원

 
한국 의회도서관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전쟁 때인 1951년 9월 10일 국회는 본회의를 통해 '국회도서실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곧바로 국회는 국회도서실 설립위원회를 구성했고, 다음 해인 1952년 2월 20일 전시 수도 부산에서 국회도서실 개관식을 가졌다.

경남도청 안 무덕전(武德殿)에서 출발한 국회도서관은, 출범 당시 '도서관'이 아닌 '도서실'로 시작했다. 도서관 장서 3,604권에 직원은 1명이었다. 초기 장서 중 700권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쵸(John. J. Muccio)가 빌려줬고, 1,500여 권은 서울대 이하윤 교수가 기증했다.

'초라한 시작'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1800년 존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 시절 출범한 미 의회도서관도 740권의 장서로 출발했다. 심지어 미 의회도서관은 영미전쟁 때인 1814년 8월 24일 영국 해군이 지른 불 때문에 전소되기도 했다. 

1952년 6월 국회도서실은 국회사무처에서 일하던 김응현 실장을 촉탁으로 위촉했다. 국회도서관 1호 정직원이자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은 '서예가'로 유명하다. 여초는 광화문 현판 교체 논의가 있을 때 일 순위로 꼽힌 당대 최고의 '명필'이다. '추사 이후 여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국회도서관 반세기 역사를 기록한 <국회도서관 50년사>의 제자(題字)도 여초가 썼다.

강원도 인제에는 그의 작품과 유품을 모은 '여초서예관'이 있다. 2013년 인제군이 세운 여초서예관은 국내 최대 서예전문박물관이다. 여초는 국내에서 기념 박물관이 건립된 유일한 '도서관인'일 것이다. 국회도서관 1층 안내판에는 여초를 '사서'로 표기하고 있다. 여초가 도서관학을 공부하거나 사서자격증을 획득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서 역할을 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1953년 9월 10일 국회가 서울로 복귀하면서 국회도서실은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 4층으로 이전했다. 국회도서실이 자리했던 곳 중 무덕전과 중앙청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국회도서관이 탄생한 경남도청 무덕전은 2002년 동아대학교 인수 후 2004년 2월 철거되었다. 중앙청은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철거했다.

1954년 6월 국회와 국회도서실은 '부민관'(俯民館)으로 불린 태평로 국회의사당으로 옮겼다. 사무실과 작은 열람실을 하나 두고, 시계탑의 4층과 8층은 서고로, 10층은 비품 창고로 썼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경성의 전기 사업을 독점했던 경성전기 주식회사를 부영으로 전환하자는 '부민 운동'이 일어났다. 당황한 경성전기 주식회사는 부영 전환 운동을 수습하기 위해 경성부에 건립비용 50만 원을 헌납했다. 복합 예술공간 '부민관'은 이 비용으로 탄생했다.

설계는 하기와라 코이치(萩原孝一)와 경성부 영선과 건축기사 츠치야 츠모루(土屋積)가 담당했다. 부민관은 1934년 7월 30일 공사를 시작, 17개월 만인 1935년 12월 10일 문을 열었다. 부민관은 1929년 일본 최초의 공연장인 도쿄 히비야공회당(日比谷公会堂)을 모델로 지은 건물이다. 개관 당시 부민관은 1,800석의 관람석과 냉난방 시설을 갖춘,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공연장이었다. 공연장뿐 아니라 '결혼식장'으로도 자주 쓰였다.

일제가 경성 부민관을 지은 곳은 엄비의 신위를 모신 덕안궁과 경성기독교청년회관이 있던 자리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의 신위는 1929년 육궁으로 합쳐졌다. 육궁에 덕안궁이 더해지면서 칠궁이 되었다. 지금의 청와대 옆 '칠궁'(七宮)이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열아홉 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일본인과 친일 인사를 향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곳도 이곳이다.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일어난 터다. '부민관 폭파사건' 주역인 조문기는 훗날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했다. 해방 후 부민관은 미군 댄스홀, 1950년에는 국립극장으로 쓰였다.

'경성 부민관'으로 지은 태평로 국회의사당은 1975년 8월 국회가 여의도로 이사 가기 전까지 20년 넘게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후에는 세종문화회관 별관 시절을 거쳤다. 1980년 태평로 확장 공사 때 부민관 건물은 정문과 현관을 포함한 280평이 철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물 출입구가 지금처럼 남쪽으로 변경되었다.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청사로 쓰이고 있다.

불온서적 수입 사건과 책도둑 사건
 

서울시의회 의사당 1954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쓰인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부민관’으로 지었다. 국회도서실은 1954년 중앙청에서 이 건물로 옮겨 왔다가 1956년 의사당과 이어진 제1별관으로 이전했다.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서울시의회 본회의장, 운영위원회 회의장, 의장실 및 시의회사무처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 백창민

 
태평로 국회의사당 시절인 1955년 11월 16일, 국회도서실은 '민의원 사무처 도서관'으로 승격했다. 1956년 1월 21일에는 김경수 초대 도서관장이 취임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김경수 초대 관장은 고려대와 성균관대 교수를 거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숙명여대(1973)와 성균관대 총장(1980~1987), 성균관장(1987)을 지냈다. 

1956년 4월 31일 신청사(구 국회의사당 제1별관) 완공과 함께 국회도서관은 신청사로 이전했다. 도서관 개관식은 제헌절인 1956년 7월 17일에 가졌다. 이듬해인 1957년 국회도서관에 2가지 사건이 터졌다. 도서과장 고재창이 불온서적 수입사건에 연루된 사건과 책도둑 사건이다.

고재창은 국립 조선도서관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운영된 국립 조선도서관학교는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희영, 천혜봉, 리재철 같은 도서관 분야 원로가 이 학교 출신이다. 졸업 후 국립도서관에서 일한 고재창은 유네스코의 원조로 1953년 게이오대학 도서관학교와 1955년 뉴질랜드로 연수를 다녀왔다. 해방 후 드물게 해외 연수를 다녀온 도서관 분야 인재였음을 알 수 있다.

고재창은 1954년 한국은행 자료실을 위해 임시로 '한은도서분류법'을 만들었다. 이봉순은 이화여대 도서관 분류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에서 배운 '일본십진분류법'(NDC)과 고재창이 만든 '한은도서분류법'을 참고했다는 회고를 남겼다. 고재창은 1954년 서울신문사가 발행한 종합잡지 <신천지>에 '시민사회와 도서관'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은 현대적 의미의 '시민'을 다룬 최초의 글로 꼽힌다. 

고재창 과장은 1956년 4월 20일 열린 한국도서관협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해외 연수 경험을 강연하기도 했다. 1956년 3월 31일부터 국회도서관 초대 도서과장으로 일했다. 1950년대 고재창은 도서관 분야에서 촉망받는 사서 중 하나였다. 

고재창 과장은 1957년 7월 사회주의 서적으로 보이는 '불온서적 수입사건'에 연루되면서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온서적 수입의 주동자로 특정되었다. 구속을 앞두고 행방불명된 그는 국회도서관장과 직원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남겼다.

고재창 과장은 행방을 감췄고, 그사이 그는 국회도서관에서 파면되었다. 그의 도피를 도운 혐의로 서울대 문리사범대 도서실 책임자인 남승우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고재창 과장을 포함한 8명의 사건 연루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2년 후 열린 재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도서관에서 발생한 불온서적 사건인 동시에, 장서 문제로 국가도서관 사서가 수사를 받고 행방불명된 드문 사건이다.

1957년 10월 22일 새벽에는 태평로 국회도서관에 도둑이 들어 30여 권의 책을 훔쳐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도서관 '책도둑' 사건이다. 도둑은 창문을 열고 침입했는데, 어떤 책을 훔쳐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57년 11월 26일에는 2대 관장, 신현경이 취임했다. 1957년 국회도서관은 분류 체계로 듀이십진분류법(DDC)를 도입해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같은 국가도서관이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은 한국십진분류법(KDC)를 사용한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시절 국회는 크고 작은 사건을 겪었다. 1954년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1958년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이곳 의사당에서 '날치기' 통과되었다. 1960년 4.19 혁명 때 학생과 시민은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해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했다.

1967년 9월 22일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오물을 투척한 곳도 이곳이다. 1969년 9월 14일 민주공화당이 대통령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도, 1972년 10월 27일 유신헌법안이 통과된 것도 모두 태평로 국회의사당 시절이다. '국회도서관'이라는 명칭 역시 태평로 국회의사당 시절인 1960년 9월 26일 국회법을 통해 처음 명시되었다.

남산에 세워질 뻔한 국회의사당과 도서관
 

국회의사당 신축 부지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9년 4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은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 부지를 방문했다. 당시 기반 공사는 공병부대가 담당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 부지는 지금의 백범광장 자리로, 일제 강점기 ‘조선신궁’이 있던 곳이다. ⓒ 국가기록원

 
이승만 정부 때인 1958년 지금의 남산 백범광장 일대에 국회의사당을 새로 짓기로 하고, 1959년 5월 15일 기공식을 거행했다. 기공식 후 1201 건설공병단 209부대가 국회의사당 건립을 위한 기반공사를 시작했다. 국회의사당 설계도가 나오기 전에 공사부터 시작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전에 당선된 사람은 건축가 김수근이다. 김수근은 강병기, 박춘명과 함께 2만 7천 평 부지에 3개 회의장을 갖춘 의사당과 25층 높이 의원사무실, 관리동으로 구성된 국회의사당을 설계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이전이 무산된 것은 5.16 쿠데타 때문이다. 의회를 해산시켰으니 의사당도 필요 없어진 것이다. 1961년 12월 16일 국회의사당 건립은 취소되고, 1962년 '공원' 환원이 결정되었다.

5.16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백악산 기슭 청와대와 마주 보는 '남산 국회의사당'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 건립을 취소한 박정희 군부는 반공연맹 자유센터를 짓기로 결정하고 1964년 완공했다. 자유센터 설계자도 김수근이다. 남산 자유센터는 본부와 숙소, 국제회의장, 도서관으로 계획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본부와 숙소만 지었다. 본부 건물은 한국자유총연맹 본부로, 숙소는 타워호텔을 거쳐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로 바뀌었다.

국회의사당이 지금의 남산 백범광장에 예정대로 지어졌다면, 남산에는 '남산도서관'이 아닌 '국회도서관'이 들어설 뻔했다. 남산도서관의 전신인 남대문도서관도 다른 공간에 다른 이름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국회가 남산에 자리 잡았다면, 남산도서관뿐 아니라 1974년 국립중앙도서관 역시 남산으로 옮겨 오지 않았을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는 국가도서관의 입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국회의사당은 남산 건립이 추진되기 전에 종묘 앞에 세워질 뻔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종묘 앞은 '종삼'이라 불리는 서울 최대 윤락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한창때 '종삼'은 탑골공원부터 종로5가까지 동서로 1km, 남북으로 100미터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나비 작전'으로 소탕되기 직전 '종삼'은 서울 성매매 여성의 80%가 밀집해 있을 정도로 서울 윤락가의 대명사였다. 실태를 살펴보기 위해 김현옥 서울시장이 '종삼'을 시찰할 때 윤락여성이 '호객' 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윤락가 '종삼'은 성매매 여성[꽃]을 찾는 남성[나비]을 단속하는 '나비 작전'을 통해 급속히 사라졌다. '도심'(都心)의 종삼이 사라지자 '부심'(副心)의 청량리, 미아리, 천호동이 새로운 사창가로 각광(?)을 받았다.

'종삼' 시절 종묘 앞 윤락가와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국회의사당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계획은 문화재관리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양녕대군 후손인 이승만 대통령이 조상의 신주를 모신 종묘 앞 의사당 건립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이야기가 속설처럼 전한다.

국회의사당 건립이 논의된 종묘 앞에는 세계의 기운을 모으려 한 '세운상가'가 들어섰다. 국회의사당이 종묘 앞에 들어서진 않았지만 세운상가는 한동안 '의원회관'으로 활용되었다. 22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선 세운상가 D지구 5개 층은 1975년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의원회관으로 쓰였다.

국회의사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으로 남산에서 건립 공사를 시작했다가 5.16 쿠데타로 남산 정착에 실패, 결국은 1975년 여의도에 자리 잡았다. 국회의사당의 이전과 무산, 정착 과정에서 입법부의 험난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너의 섬' 여의도 개발사
 

1968년 6월 1일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 여의도를 둘러싼 제방, ‘윤중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제방에 ‘한강개발’(漢江開發)이라는 표석이 새겨져 있다. 박정희 부부 앞에 앉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김현옥 서울시장이다. 김현옥은 서울시장 시절 여의도와 한강 개발을 주도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한강 위의 '섬'이었던 여의도가 지금처럼 개발된 것은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 때다. 김현옥 시장은 1967년 8월 한강 개발 3개년 계획으로 여의도 개발을 시작했다.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윤중제]은 1968년 2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100일 만에' 쌓았다. 강북 중심의 서울을 '다핵화'하는 과정에서 여의도 개발은 추진되었다. 서울 강북과 영등포, 인천을 잇는 축선의 핵심거점으로 여의도를 개발한 것이다.  

윤중제는 둘레 7.6km, 높이 16m, 넓이 21~50m 제방이다. 윤중제 공사에는 연인원 52만 명, 중장비 5만 8천4백 대, 돌 4백만 개, 시멘트 블록 40여만 개, 토사 8백5십만m2가 투입되었다. 윤중제 공사에 필요한 골재는 밤섬을 '폭파'해서 얻었다.

당시 밤섬은 여의도보다 더 큰 한강의 섬이었다. 78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던 밤섬은 여의도 개발 과정에서 사라졌다. 와우산 기슭의 마포구 창전동 일대가 '밤섬마을'로 불린 이유는, 밤섬에 살던 주민이 이곳으로 이주해 살았기 때문이다.

1968년 윤중제가, 1970년 서울대교(지금의 마포대교)가 완공되면서 여의도 개발의 토대가 마련됐다. 학교와 시범아파트 건립으로 중산층을 여의도에 끌어들이고, 한국방송공사를 비롯한 방송국을 유치했다. 증권거래소와 경제인연합회가 여의도 이전을 추진하면서 87만 평에 달하는 여의도의 기본 틀이 잡혔다.

간이 비행장만 있을 뿐 버려진 땅이었던 여의도의 대변신이었다. 홍수 때만 되면 물에 잠겨 '너나 가지라'는 뜻으로 '여의도'(汝矣島)라 불렸던 섬은 '서울의 맨해튼'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의 맨해튼이라 하지만 여의도가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이 자리할 곳으로 적합한 걸까? 국회의사당이 자리했거나 이전이 거론됐던 곳은 경복궁(중앙청), 태평로, 종묘, 사직공원, 경희궁 터, 삼각지, 남산, 여의도다. 이중 가장 입지가 나쁜 곳이 여의도다. 시민과 격리된 한강 한복판, 외딴섬에 의사당이 있는 것이다. 입법부를 무력화시킨 군부 시절 정한 입지라지만, 이 때문인지 국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었다.

국회의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양말산'(羊馬山)이 있었다. 양과 말을 키우던 30여 미터 높이 양말산은 여의도 개발 과정에서 사라졌다. 양말산은 조선 중기 이후 궁녀의 공동묘지로 쓰였다. 2008년 국회 개원 6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석은 그 모양 때문에 '남근석'이라고 불렸다. 7미터 높이의 '남근석'은 양말산 시절 이곳에 묻힌 궁녀의 한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루머가 돌았다.

여의도 개발 구상을 맡은 이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2대 사장이었던 건축가 김수근이다. 김수근은 세운상가에 공중가로를 설치해서 보행자와 자동차의 동선을 분리시켰다. 그는 세운상가에서 선보인 구상을 여의도에도 적용하려 했다. 보행자를 위한 인공데크를 따로 설치해 여의도를 '입체적인' 도시로 조성하려 한 것이다.

재원 부족으로 김수근의 구상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하중도시'(河中都市) 여의도는 '평면적인' 형태로 개발되었다. 당초 계획으로는 국회뿐 아니라 대법원, 서울시청도 이전할 예정이었으나 대법원은 강남으로 옮겼고, 서울시청은 원래 자리에 머물렀다. 김수근의 구상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지만, 여의도 개발은 한국 건축가에 의한 최초의 서울 도시계획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국회도서관의 '군바리 관장' 시대
 

국가재건최고회의도서관 이금석 관장 우리 역사에서 현역 군인이 ‘국가도서관장’이 된, 흔치 않은 사례가 있다. 5.16 쿠데타 직후 국회도서관장이 된 박연섭 중령과 이금석 대령 두 사람이다. 1963년 11월 4일 이금석 관장이 도서관을 방문한 미국 의회도서관 국제교환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군복’을 입은 ‘관장’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 국가기록원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국회와 국회도서관은 해산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인 1961년 6월 9일 국회도서관은 '국가재건최고회의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군부는 신현경 관장을 '자르고', 6월 10일 최고회의 '도서관장'으로 육군 중령 박연섭을 임명했다. 1962년 1월 10일에는 박연섭 관장 후임으로 이금석 대령이 관장으로 부임했다.

우리 도서관 역사상 현역 군인이 국가도서관 관장이 된 단 둘뿐인 사례다. 교육을 총괄하는 문교부장관에 해병대 대령 출신 문희석이 임명되기도 했으니, 군바리 국가도서관장은 '약과'라고 해야 할까. '군바리 관장'인 박연섭과 이금석은 국회도서관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관장이지만, 국회도서관의 제3대, 4대 관장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1962년까지 국회도서관은 '독립기관'이 아닌 국회사무처의 '부속기관'으로 머물렀다.

역사학자 전우용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전쟁 후 '군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기구였다. 1950년대 미국의 군사원조를 통해 군대는 가장 빠르게 근대화된 집단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군부의 등장으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 영역은 축소되고, 행정 영역이 크게 확대됐다. 3공화국의 관료 중심 통치는 행정부의 비대화, 관료의 부패, 권력의 사유화로 이어졌다. 의회 역할이 축소되면서 국회도서관의 위상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63년 11월 26일 국회도서관법이 공포되면서 국회도서관은 독립기관으로서 첫걸음을 떼게 된다. 국회도서관법은 대한민국 법 체계에서 단일 도서관을 규정하는 유일한 법령이다. 의회조사처도 이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납본제도도 이때 도입되었다.

국회도서관법이 공포된 1963년은 박정희가 대선에서 윤보선을 꺾고 대통령이 된 해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16만 표라는 박빙의 표 차이로 윤보선을 이겼다. 도서관법(10월 28일)과 국회도서관법(11월 26일)이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63년 10월 15일 직후에 나란히 제정된 점은 주목할만하다.

1964년 2월 26일 강주진 도서관장이 3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9년 넘게 관장으로 재임한 그는 국회도서관 사상 최장수 관장이다. 강주진 관장은 1947년 출범한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초대 사무국장 출신이다. 출판계 출신으로 드물게 국가도서관 관장을 지냈다.

강주진 관장은 국회도서관장으로는 처음으로 한국도서관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국회도서관장으로 한국도서관협회장을 맡은 사람은 강주진 관장(3대), 김종호 관장(4대), 송효순 관장(5대)까지 3명이다. 1964년 제정된 국회도서관직제로 직원수는 116명이 되었다.

유신과 신군부 시절의 국회도서관
 

5.16 쿠데타 직후의 국회도서관 ‘국가재건최고회의도서관’ 시절의 국회도서관 모습. 1961년 9월 15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이용자로 보이는 상당수가 군복을 입은 ‘군인’이다.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 지원을 위해 존재하던 국회도서관이 군인을 위한 ‘병영도서관’으로 바뀌기라도 한 걸까. ⓒ 국가기록원

 
1970년대 유신 시절 국회도서관의 상황을 살펴보자. 1973년 4월 4일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다.

 
"공화당 원내총무가 국회운영위원장을 겸임함으로써 국회사무처와 도서관도 큰 수술을 받게 될 것 같다. (중략) 김용태 운영위원장은 4일 상오 국회도서관 현황을 듣는 자리에서 "국회도서관에 왠 직원이 185명이나 되느냐" "도대체 총예산의 50%가 인건비로 지출되고 있는데 국회도서관이 실업자 구제소냐"고 말하면서 도서관 직제를 고쳐 인건비를 30% 이하로 줄여 일하는 도서관으로서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운영위에서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호통."

국회운영위원장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1일 국회도서관직제 개정으로 도서관 직원수는 오히려 늘어 202명이 되었다. 1952년 단 1명으로 출발한 국회도서관 직원수는 23년 만에 200배 넘게 늘었다.

'실업자 구제소'라는 비판을 받은 국회도서관은 '일하는 도서관'으로 바뀌면서 직원수가 늘어난 걸까? 이 시기 긴급조치가 연이어 발동되고 국회는 빈사(瀕死) 상태에 빠졌다. 의회 민주주의가 조종(弔鐘)을 울리던 당시 국회도서관의 2백여 직원은 무슨 일을 했을까.

같은 해 9월 15일에 국회도서관은 지금의 여의도 국회의사당 부지로 이전했다. 여의도 의사당 완공 직후 국회도서관은 별도 건물을 마련하지 못하고 의사당 지하에 자리했다. 당시 신문에 난 기사다.

 
"국회의사당 지하 1층에서 근무하고 있는 도서관 직원(150명)들 사이에는 통풍과 채광이 안 되는 등 근무환경이 좋지 않아 두통이 시달리는 사람이 견디다 못해 휴가 또는 병가원을 내고 쉬는 사람도 늘고 있어 도서관 측은 대책 마련에 부심."

당시 국회도서관은 국회의사당 지하 1층에 서고와 열람실, 사무실을 두고, 도서관장실은 지상 1층, 의원열람실은 지상 2층에 두었다. 독립건물을 가지지 못했던 국회도서관은 의사당 건물 중 1,535평을 도서관 용도로 사용했다. 여러 문제점 때문인지 1978년 3월 국회도서관은 지하 1층에 있던 사무실을 의사당 5층으로 옮겼다. 국회도서관 사무공간은 1985년 3월 의사당 6층으로 다시 이전했다.

1978년 국회도서관은 3국 13과 208명으로 증원되었다. 1979년 6월에는 여의도 국회도서관 신축 계획이 잡혔다. 1984년까지 1백만 권을 소장할 수 있는 1만 평 규모 현대식 도서관을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건립 위치는 시민이 이용하기 편리한 도로변으로 부지를 마련했다.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자, 국회도서관의 위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국회 해산 후 국회도서관은 '독립기관'이 아닌 국회사무처의 '부속기구'로 다시 전락했다. 1980년 10월 국회도서관은 '국가보위입법회의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81년 2월에는 법적 근거인 국회도서관법이 '폐지'되면서 독립기구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1985년 3월 1일 국회사무처법이 개정되면서 235명에 이르던 도서관 직원수가 137명으로 41% 축소되었다. 같은 군사 정부라 하더라도 박정희 때보다 전두환 집권 시기 국회도서관은 더 큰 좌절을 겪었다.

1984년 3월 20일 국회도서관은 지금의 위치에 도서관 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총 공사비 97억 원, 연건평 8,063평,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1986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시작했다. 계획보다 2년 늦은 1988년 1월 27일, 국회도서관 건물이 준공되었다. '도서실'로 출발한 국회도서관이 36년 만에 갖게 된 첫 독립건물이었다.

신축한 국회도서관은 5,450평 부지에 2백만 권 장서를 소장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일반 열람석 250석, 의원 열람실 30석, 의원연구실 38개 실을 비롯한 13개 열람실 510석을 갖췄다. 총공사비는 150억 원이 들었고,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완공되었다. 국회도서관은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 국회도서관법이 다시 제정되면서 독립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했다.

건축가가 작품 목록에서 지워버린 국회의사당
 

여의도에 건립중인 국회의사당 여의도는 초기에는 대부분 미개발 상태였다. 1973년 초까지만 해도 시범아파트 단지와 국회의사당 정도만 여의도에 입주가 확정되었을 뿐이다. 국회의사당도 허허벌판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75년 9월 1일 완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화강석으로 지은 건물로, 열주(列柱)를 두르고 거대한 돔을 얹은 건물이다. 지하 2층, 지상 6층, 총 '8층'으로 지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물 외부에는 '24개' 기둥이 있고, 본회의장에는 '365개'의 조명이 있다. 팔도의 국민을 일년 24절기, 365일 내내 생각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국회의사당에 담긴 의미를 국회의원들이 되새기면서 행동하는지는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국회의사당 건립에 들어간 135억 원은 한 해 정부 예산의 10%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건립 당시 국회의사당은 동양 최대 규모 의사당으로 지었다. 시민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 동양 최대라면 좋으련만, 건물 크기만 동양 최대였다.

외벽의 24개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기 위한 구조가 아닌 '장식'을 위한 기둥이다. 24개 기둥을 없애도 의사당 지붕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회의사당 기둥은 높이만 32.5미터에 이른다. 지름이 50미터, 높이 20미터에 달하는 푸른색 돔은 원래 구릿빛 붉은색이었다, 녹이 슬면서 돔은 지금과 같은 색깔이 되었다.

원래 설계에는 돔이 없는 구조였다. '뽀대' 나는 건물을 원한 여러 국회의원의 요구로 열주가 늘어서고, 돔이 함께 얹힌 '이상한 건물'이 되었다. 국회의사당 설계에 참여한 서울대 이광노 교수의 회고다.

"기본설계가 완성된 상태에서 외국 시찰을 다녀온 (국회) 운영위원들이 돔 구조물을 덧대라고 주문했다. 왜 외국 의사당들은 돔이 있는데 우리 설계에는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와 김정수, 김중업, 안영배로 구성된 설계위원단은 그렇게 하려면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며 완곡히 거부했다. 그러자 운영위원들은 시간이 없으면 그냥 기본설계안에 돔만 붙이라고 했고, 결국 돔을 얹은 설계안을 내놓게 됐다."

이것이 무게 1천 톤에 달하는 '돔'이 의사당 지붕에 얹힌 사연이다. 시민들은 돔 바로 아래 위치한 공간이 본회의장일 거라 생각하는데, 돔 아래에는 '로텐더홀'이라고 불리는 중앙홀이 있다. 건축용어로 원형 건물을 뜻하는 '로툰다'(rotunda)를 국회가 '로텐더홀'(law tentder hall)로 이상하게 부른다는 비판도 있다.

반원형의 본회의장은 중앙홀을 중심으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회의장과 마주 보고 있다. 본회의장이 국회의사당 건물의 절반만 차지하는 것은 통일을 대비해서 '양원제'를 염두에 두고 설계했기 때문이다. 본회의장 건너편의 예결위 회의장 역시 반원형이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양원제'라면 상원과 하원이 각각 사용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의 중심[돔]과 건물 쓰임 상의 중심[본회의장]이 일치하지 않는 구조다. 한국 정치의 난맥상이 국회의사당 건물에도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국회의사당의 24개 기둥과 마찬가지로 '돔'은 기능적 필요가 아니라 장식적 요구로 얹혔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은 이런 말을 남겼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

국회의사당의 형태는 의정 활동이라는 의회 본연의 기능보다 '장식적' 기능에 충실하다.

국회 앞에 세운 해태상의 부작용?
 

국회 입구에 세운 해태상 국회의사당 안 해태상은 해태제과가 만들어 기증했다. 앉아 있는 광화문 앞 해태상과 달리 서 있고, 암수 한쌍이다. 조각은 당시 서울대 미대 이순석 교수가 작업했다. 해태제과는 한 쌍의 해태상을 기증하면서 해태주조에서 만든 72병의 백포도주를 함께 묻었다. 해태상 아래 묻은 백포도주는 국회의사당 건립 100주년이 되는 2075년 꺼낼 계획이라고. ⓒ 대한민국 국회

 
건축가가 5층으로 설계한 국회의사당이 6층으로 지어진 데도 사연이 있다. 국회의사당 설계에 참여했던 안영배 교수의 회고다.

"이번에는 청와대 최종 승인이 문제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했거든요. 최종 도면이 청와대로 올라갔는데 건축가는 참여를 못하고, 국회의장, 사무총장, 국회사무총장 등 그런 분들만 참여했었다고 해요. 가서 한 얘기가 '건물이 몇 층이냐?' '5층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중앙청 건물은 몇 층이냐?' '5층입니다.' '그보단 더 커야, 높아야 하지 않냐, 한 층 더 높여라.'"

건물의 바닥면적은 그대로 두고 층수만 높였기 때문에 의사당은 비례가 맞지 않는 건물이 되었다. 국회의사당의 이상한 외형에 국회의원뿐 아니라 박정희도 일조를 한 셈이다. 설계 과정의 파행 때문인지 국회의사당 설계에 참여한 김중업, 이광노, 김정수, 안영배 4명의 건축가는 자신의 작품 목록에 국회의사당을 넣지 않았다.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4명의 건축가가 '민의의 전당'을 설계하고도 이를 부인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국회의사당의 외형은 한국 정치만큼 '기형적'이고, 건립 과정도 '복마전'이었다. 국회의원 요구대로 돔을 얹고, 열주를 두르고, 대통령 지시로 6층으로 높인 국회의사당은 '망할 망'(亡)자처럼 보인다는 혹평에 시달렸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국회의사당을 여의도 '모래성'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다. 국회는 언제쯤이나 이런 속설에서 벗어나 유능하고 뛰어난 국회로 거듭날 수 있을까.

국회의사당 건립과 함께 입구에 세워진 '해태상'은 민의의 전당인 의사당의 화재를 막는다는 취지로 세웠다. 의사당 건립 자문위원이었던 월탄 박종화는 '국회의사당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해태상의 건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해태상 덕분인지 국회의사당에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를 바라보는 많은 국민이 '화'(火)를 참지 못할 때가 많으니, 해태상의 '부작용'이라 해야 할까.

(* 국회도서관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국회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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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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