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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 ②] '스스로' 찾으라던 아버지, 이제는 '스스로'가 두렵다

등록 2020.03.05 14:45수정 2020.03.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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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기자말]
지난해 10월, 3박 4일 관리자 치유성장 연수가 경기도 평화교육연수원에 있었다. 경기도 평화교육연수원은 억새축제로 유명한 명성산과 산정호수를 끼고 있어 힐링의 연수기관이다. 이곳은 학생들과 학교에 지친 교사들에게 인기가 좋아 항상 신청자가 많다. 나도 7년 전 평교사 시절 겨울방학 때 왔었다. 진작 오고 싶었지만 슬플까 봐 자신이 없었다. 친정아버지 생각이 너무 날 것 같아서였다.

이 연수원은 1995년 폐교된 산호초등학교를 리모델링했는데, 아버지는 1983년 산호초등학교(산호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학교와 떨어진 포천 읍내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주말에만 집에 오셨다. 어린 동생들은 엄마와 자주 아버지한테 갔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가끔 학교행사가 있어 주말에도 못 오실 경우 엄마와 반찬을 가지고 갔었다.

가장 길게 교장 관사에 머무른 적은 고3 겨울방학 때 본고사 준비한다고 절간에 들어가 있듯 했을 때다. 공부를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관사에 어둠이 빨리 찾아왔던 것만 기억난다. 저녁이 찾아오면 학교 건물과 운동장조차 구분이 안 되었다. 게다가 엄청 고요하고 적막만 흘러 한 발만 내디뎌도 어둠 속으로 푹 꺼져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시간이 정지된다면 이런 상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산호국민학교를 간 적이 있다. 정년을 앞둔 아버지의 마지막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선생님들께 드릴 박카스를 한 박스 들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20여 분 산길을 걸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바람에 흔들거리는 만국기로 가득 찬 작은 운동장은 아이들과 어른들의 함성으로 꽉 차 있었다. 소설에서만 읽었던 작은 시골학교 운동회였다. 마을 주민들과 본부석에 앉아계신 아버지를 한참 바라보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평화교육연수원은 나에게는 의미 있는 곳이다. 산호국민학교는 산호초등학교, 폐교를 거쳐 경기도평화교육연수원으로 변신했다. 작은 관사가 있던 자리에는 연수생 생활관이 들어섰다. 아버지가 가꾸던 배추밭 텃밭은 넓은 정원으로 바뀌어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물조리개로 물을 줄 때 배춧잎에 떨어지던 물소리가 푸릇푸릇 살아서 입시용 참고서 위까지 날아왔었다. 최고의 음향기기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자연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대부분의 친구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나이팅게일, 퀴리 부인 같은 위인을 존경했다. 도덕 시간에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발표해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린 적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 같은 교사가 되고 싶었고 당연히 어렸을 때 꿈도 오직 선생님이었다. 당시는 교육과정에 진로 교육도 없었고 시골 학교라서 대학 진학자가 많지 않아 다양한 직업정보가 없었다. 그러나 정년을 앞둔 지금까지 교사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교사 생활을 한 40년동안 매일이 행복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모두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40년이란 그 긴 시간 속에는 항상 아버지가 계셨다. 학생들과 갈등이 생겼을 때, 수업이 맥없고 지겨워질 때, 학부모 때문에 속상할 때 특히 관리자 때문에 힘들 때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셨을까'가 나의 기준이었다. 평교사 시절 교장·교감 선생님과 마찰이 생겨 첨예하게 대립할 때도 아버지가 떠올라 매우 괴로웠다. 아버지는 나같이 평교사와 대치 국면에 설 때 어떻게 풀어가셨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옳고 그름을 떠나 '예의-장유유서(長幼有序)'를 먼저 고려해야 하나? 그러면 학교는 언제 변화하려나? 이러한 갈등으로 갈팡질팡했다. 옳은 주장을 끝까지 펼쳐가는 용감한 교사들과 아버지가 겹쳤다. 그때마다 아버지를 핑계로 한 나의 비겁함이 주눅 들었다.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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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뜻하게 품어드리지 못했다. ⓒ unsplash


그러나 나는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뜻하게 품어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1989년 1월에 한빛이 태어나고 한빛 아빠는 8월에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다. 이후 그는 5년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다. 아버지는 한빛 아빠가 해직되기까지의 일련의 상황을 예측하고 계신 듯했다. 딱 한 번 4.19 때 교원노조 경험을 말씀하시며 전교조 설립과정이 어려울 거라고 하셨다.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한빛아빠가 제 뜻을 결연하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이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바라셨을 것이다. 교육 개혁을 위해서 노조 설립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내 사위만은 그 속에 엮이지 않기를. 딸의 앞날이 어떨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게 옳은 길이기에 아무 말씀도 못 하고 속으로만 삭이셨다. 

갑작스러운 한빛 아빠의 해직으로 한빛을 키워주시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기죽지 않게 엄청 신경 쓰셨다. "시간은 많은데 할 일이 없다"며 매주 금요일 한빛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포천에서 의정부까지 경로우대라며 무료 완행버스를 타고 오셨다. 나는 싫었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채 금방이라도 가다가 멈출 것 같은 완행버스가 싫었다. 진한 매연을 뚫고 내리는 노인네와 어린 손자의 모습도 싫었다. 내 자격지심 때문에 창피해 스스로 불쌍했던 것 같다.

육아비는커녕 차비도 못 드리면서 아버지 연금 타령만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좋아서 한다. 한빛이도 천천히 가는 버스 덕분에 바깥 구경도 많이 할 수 있고 자연 공부가 저절로 된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차비를 안 썼네 하시며 한빛 손에 항상 만원 지폐 한 장을 쥐여 주셨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를 살리셨다. 덕분에 우리는 그 돈으로 매주 한 번씩 소고기 등심 로스구이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쪼들릴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아셨지만 아버지는 생활비를 보태주시거나 목돈을 주지 않으셨다. 일체 말씀을 안 하셨다. 고마웠다.

한빛을 하늘로 보내고 난 후 아버지가 한빛을 키우면서 애끓었을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버지한테 불효해서 한빛을 잃었나?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아버지,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가르쳐 주세요"하며 가슴이 찢어지도록 울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버지가 강조하셨던 스스로 찾으라는 건가?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가 두렵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 
①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한 손자,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http://omn.kr/1luli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인권센터 #한빛미디어 #외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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