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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참정권 보장에 왜 '배려'라는 말을 붙입니까?

'평등한 선거권'을 향해 계속되는 장애인 투쟁

등록 2020.03.05 18:47수정 2020.03.0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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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단체 회원들이 25일 오전 연제구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사무소 앞을 찾아 장애인 참정권 침해에 대한 집단 진정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 오마이뉴스 정민규

 

1965년 흑인 참정권 운동의 상징인 '셀마-몽고메리' 행진을 다룬 영화 <셀마>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투표자 등록 신청서에 자신의 이름, 성별, 인종을 애니 리 쿠퍼, 여성, '니그로(Negro)'로 작성한 흑인 여성은 백인 공무원 앞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거친다. 1870년부터 흑인의 투표권은 차별금지 원칙을 통해 미국 수정헌법에 명시된 권리였지만, '감히' 선거에 참여하려고 하는 흑인에 대한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차별 앞에서 그녀의 권리는 계속 좌절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그녀는 헌법 서문까지 낭독하지만, 앨라배마 카운티 판사 67명의 이름을 모두 말해보라는 요구에 선거권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변화가 바로 참정권의 획득과 보장이라는 '평등'이었다.

선거권에 자격을 따지다니,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일 테다. 모든 국민이 일정 연령만 되면 성별, 재산, 사회적 신분, 교육수준 등과 관계없이 선거권을 갖는다는 보통선거의 원칙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재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직도 매 선거시기가 되면 장애 관련한 단체들의 메일에서, 기자회견의 사진 속에서 익숙한 문구를 발견한다.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라!"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라니, 장애인에게는 참정권이 없다는 말인가? 참정권을 투표소의 기표대에서 기표 용지에 도장을 찍는 행위만으로 이해하는 사회라면 누구나 '장애인도 참정권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참정권이 과거 역사로부터 이미 보장된 행위가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형인 변화와 투쟁이 필요한 권리 영역이라고 이해하는 사회라면, 그 대답은 달라질 수 있다. 장애인 참정권 운동은 바로 참정권을 현재진행형으로 이해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2020년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선거에 담긴 '평등'의 의미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현재의 조건은 '감히 흑인이…'라는 인식으로 참정권을 공공연하게 박탈하고 투표권 행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할 수 있었던 과거의 조건과 분명히 다르다. 모든 국민이 1인 1표라는 동등한 선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선거의 원칙은 동등한 권리를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선거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이해관계를 드러내고 이것이 국가 정치 과정에 반영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이자 권리의 주인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라는 정치 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것 역시 함께 요청된다. 이미 장애인의 정치 참여를 가로막는 불평등이 존재하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평등한 기회'만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기존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변명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선거 원칙은 선거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선거방법을 포함한 선거제도 등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 의무, 그리고 그 의무를 국가에 지우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러한 국가의 의무가 구체화된 것이 바로 장애인을 위한 '정당한 편의제공'이다.

2001년 2층에 설치된 투표소로 인해 선거권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장애인 8명이 제기한 위자료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사건은 장애인 참정권이 어떻게 침해받을 수 있는지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가파른 계단 때문에 2층 투표소에 접근하지 못해 선관위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내년에 투표하면 되지 않느냐, 투표소를 들판에 설치해야겠네"라는 모욕을 들어야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2, 3층 투표소에 접근하지 못해 투표를 포기했고,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려 한 사람은 공무원의 무성의와 복잡한 절차로 인해 투표를 포기해야만 했다. 비록 적은 금액일지라도 국가의 위자료 지급 판결은 2층 투표소가 장애인 참정권을 배제하는 부당하고 차별적인 조건이라는 인정이었다.

기표 도장만 찍을 수 있다면 선거권이 보장된 것일까

문제는 일정 정도의 접근성 개선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참정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치러진 7회 지방선거의 사전투표소 설치현황에 따르면 특정 광역시의 경우에는 사전투표소 139개소 중에서 지상 1층에 설치된 곳은 31개소(22.3%)에 불과했다고 한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층 또는 승강기가 설치된 사전투표소의 비율을 7회 지방선거 82.5% 보다 높여 93.5%까지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투표소를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1층이나 승강기가 있는 공간에 설치하고 그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교통편의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투표소에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투표소가 1층에 설치되었지만 턱이 있는 건물이라 휠체어가 진입할 수 없거나, 경사로가 있더라도 안전손잡이가 없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면 어떨까? 투표소가 아니라 주차장에 덩그러니 놓인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해야 하지만 장치로 신분증을 확인할 수 없어 타인에게 맡겨야 하는 장애인, 선거에 대해 사전교육을 받지 못한 투표보조도우미가 배치된 곳에서 절적한 지원을 받지 못한 장애인은 스스로를 선거권의 주체로 여길 수 있을까?

보통선거 원칙을 실현하는 '정당한 편의제공'이 국가의 의무라는 의미는 이와 같은 조치들이 배려나 시혜, 혹은 '할 수 있다면 하는' 부가적인 편의제공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권리, 그동안 민주주의라는 정치 과정에 참여할 권리에서 배제되었던 장애인들이 동등한 권리라는 이름으로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편의이다.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시행령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애인권운동이 법적 용어(Reasonable Accommodation)를 '합리적 배려'가 아닌 '정당한 편의'로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합리성에 대한 자의적인 기준은 언제든 국가의 의무를 '배려'로, 장애인의 권리를 '과도한 요구'로 둔갑시킬 수 있다. 권리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고, 그 권리를 실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불평등한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조치는 마땅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다양한 장애 특성에 따른 정당한 편의제공이 이루어져야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 참정권을 위해 필요한 정당한 편의제공은 장애의 유형과 특성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선거 관련 방송 시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또는 수화 통역 제공을 임의규정이 아니라 의무규정으로 선거법을 개정할 것, 후보자간 다자토론이 이루어질 경우 최소 2인 이상의 수어통역사를 배치할 것,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선거공보물에 후보자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선거공보물의 규격 제한을 없애도록 선거관리규칙을 개정할 것, 시각장애인이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의 투표를 제약하지 않도록 투표보조용구를 제공하고 본인의 기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장애인 참정권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요구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국가인권위원회 권고 및 법원의 판결을 통해 이러한 요구들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합리성' 또한 확인되어 왔다.

지난 3월 3일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 권고 역시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의 기본권을 위해서는 후보자의 정보를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 형식으로 제공하고, 전국 사전투표소에 점자투표 보조용구를 구비해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사전에 후보자들에게 정보를 텍스트로 제출하도록 적극적으로 안내할 수 있고 사전투표제도가 안정화되어 가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주장은 합리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장애 유형에 따른 편의제공과 선거제도의 개선은 권리의 정당성으로도, 현실의 합리성으로도 '평등한 선거'의 의미를 가릴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을 이유로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장애인 참정권의 '자격'을 질문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등록된 장애인은 약 250만 명이 넘고 이 가운데 발달장애인은 21만 명 정도다. 그 중 16만 명 정도가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로, 전체 유권자의 0.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제공 필요성에 동의하는 사람들 역시 지적장애 및 자폐성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들이 선거권을 갖는 것이 적절한지 의아해하곤 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발달장애인의 존재와 권리가 가시화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발달장애인도 스스로 판단해서 투표를 할 수 있나요?"라는 사회의 질문에 발달장애인들은 자신들이 권리 실천이 가능한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할까.

"21대 총선에서는 발달장애인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투표용지를 만들어주세요."

지난 선거들을 통해 발달장애인들은 자신들이 권리가 실현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을 이 사회가 보장하고 있는지, 정당한 편의제공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물었다. 발달장애인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된 선거공보물을 제공할 수 있는지, 자신이 원하는 후보 및 정당을 쉽게 구별하고 제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표용지에 사진이나 로고를 넣을 수 있는지, 투표의 절차와 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전연습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현재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실상 발달장애인의 참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능력을 증명하기를 요구하는 곳이 한국사회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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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달장애인이 1일 오후 1시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 참정권 기자회견에서 후보자 사진과 정당 로고가 들어간 '그림투표용지'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 김시연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과 관계를 만들어야

<장애학의 도전>의 저자 김도현은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 '능력이 비발달장애인에 비해 낮을 수 있다는 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결정 '역량'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자기결정 '능력'이 낮다고 해서 자기결정권이 낮다고 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비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선거에 대한 적절한 정보제공과 자신의 선택을 가늠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 및 관계망에 따라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발달장애인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만드는 것,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제도와 실행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2014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한국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2013년 제정된 성년후견인 제도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이는 질병, 장애, 노령 등을 이유로 인지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잘 표현하기 어려울 수 있고,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결정을 후견인이 대리하는 경우가 필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다. 한국 사회가 '의사결정대행(substituted decision-making)'에서 당사자의 자율성과 의지, 선호를 존중하는 '의사결정지원(supported decision-making)' 시스템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는 그동안 발달장애인을 포함해 장애를 이유로 당사자의 관점에서 당사자의 의사와 판단을 전혀 존중하지 않은 채로 너무나 당연하게 핵심적인 권리를 제한해 왔던 한국사회의 시스템과 문화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권리를 능력과 자격의 문제로 보는 사회인지, 공동체의 역량과 정당한 편의제공의 문제로 보는 사회인지는 발달장애인의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정보접근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선거제도를 통해 참여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드러내며 법이라는 형식 안팎에서 참정권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온 장애인들의 투쟁이 이런 인식을 조금이나마 가능하게 해 주었다. 총선을 앞둔 지금이 바로 평등한 권리를 위한 조건과 관계를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격월간 소식지 월간 평등업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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