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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본 미국인, 부산 사람들의 첫 질문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미국인 최초의 부산 체험기

등록 2020.03.15 20:06수정 2020.03.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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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기사 : '부산·원산은 금지'... 언제부터 이 땅이 일본 것이었나]


이제 조선 왕국과의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볼 참이지만, 먼저 여러분이 듣게 될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짚어보는 게 좋겠소.

첫째, 미국과 조선이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로 부산에 미국인이 처음 발을 들인 기록이라는 점. 둘째, 1882년 6월 6일의 부산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는 점. 셋째, 한국에 알려진 적이 없다는 점 등이 특이 사항이랄 수 있겠소.

사실 당시 우리 서양인 사이에서 조선을 둘러싼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지만 대부분 '카더라' 식의 풍설을 벗어나지 못했소. 그러나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직접 현지에서 육안으로 보고 파악한 것이오. 따라서 희소가치가 있을 터인데, 오히려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영문을 모르겠소. 독자 여러분들이 첫 청취자가 된 셈이오.

훗날 37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될 나의 운명은,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 1882년 6월 6일 이미 부산에서 잉태됐던 것 같소. 어찌 감회가 없을 수 있겠소? 나는 생전에 조선 체험기를 책으로 펴낼 계획이었다오.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일찍 죽고 말았지요. 이제야 그 책을 허공에 쓰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지난번 말한 것처럼 미쓰비시 증기선에서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해안으로 바짝 다가갔소. 그때 우리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에는 망원경, 나침반, 여송연(시가), 초콜릿, 약간의 금화와 은화, 그리고 필기도구, 지도첩, 단도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소. 사진기와 총은 가지고 가지 않았소.


자, 그러면 지도를 보면서 우리의 당시 행적을 그려보는 게 좋겠소. 당시 우리는 조선제 지도를 입수하지는 못했고 일본 육군 참모국이 1875년에 만든 조선전도를 지니고 있었소. 

새까맣게 적힌 숫자의 의미
  

1875년 일본 육군 참모국이 제작한 일본 최초의 조선 전도. ⓒ 미국지리협회


이 지도는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만든 조선 전도이므로 왜 만들었는지, 무슨 내용을 담았는지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거요.

일본 당국은 조선에서 입수한 '조선 팔도 전도'와 중국에서 입수한 '대청일통전도', 영국과 미국에서 나온 해도 등을 종합하고 보완해 이 지도를 편찬했소. 지도는 일반 지리 정보뿐 아니라 수영, 병영의 소재지, 주요 항구, 강구 및 연해의 수심 등 상세한 정보들까지도 담아 사실상 군사지도의 역할을 겸하고 있소.

지도가 제작된 해가 1875년이라는 점은 의미가 적지 않소. 일본이 중무장한 군함을 몰고 가 조선의 강화도에 포격을 가했던 해가 아니겠소? 그 여세를 몰아 일본은 다음 해 조선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역사에 자세히 새겨져 있겠지요. 어쨌든 이 지도를 보면 당시에 이미 일본 군부가 조선 정복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소.

지도는 보다시피 여백에 주요 관문인 제물포, 한강 및 대동강 입구, 부산 및 원산항에 대한 상세한 부분도를 별도로 수록하고 있소. 그럼 우리의 행선지인 부산항을 보겠소.
  

일본 육군 제작 부산포 지도 ⓒ 미국지리협회

 
개미 때처럼 새까만 게 뭐겠소? 수심을 이렇게 빼곡히 적어 놓은 것이라오.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선 해역을 다투어 측량하고 있었다오. 가운데 보라색으로 칠해진 곳을 주목해 봅시다.
  

일본 육군이 제작한 부산포 지도 ⓒ 미국지리협회

 
보라색 구역 맨 위에 '화관(和館)'이라고 적혀 있소. 그게 바로 조선인들이 '왜관(倭館)'이라고 부르던 곳이오. 어쨌든 그곳이 일본인 거류지역(Japanese settlement)이지요.

우리는 이곳에 접해 있는 해안 선창에 배를 댔소. 그리고 배에서 훌쩍 내려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소. 1882년 6월 6일 맑은 아침이었소. 미지의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나는 묘한 흥분을 느꼈소.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소. 바로 코앞에 일본 미쓰비시 선사 건물이 떡 버티고 서 있지 않겠소?  그 너머로 시선을 옮겨보니 솟아오른 깃대 봉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소. 위세당당한 일본 영사관이었소.

"눈이 파란데 어떻게 잠을 자는가?"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일본 영사관과 일장기가 보인다. (로제티, "COREA E COREANI", 1905) ⓒ "COREA E COREANI"

 
'은둔 왕국'의 관문을 이미 일본이 점령했구나 하는 느낌이 스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오. 우리는 문득 불안을 느꼈소. 자칫하면 미쓰비시 사무실이나 영사관에서 우리를 제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잽싸게 방향을 틀어 왼편의 해안 길로 접어들었소. 왜관을 막 벗어났다 싶을 때 앗, 이건 또 뭔가. 돌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우리를 에워싸지 않겠소? 이 많은 사람들이 금세 어디에서 쏟아져 나온 것일까? 그동안 어디에선가 우리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그랬던 것 같소. 희한하게도 그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소. 흰옷에 반사되는 맑은 햇살에 눈이 부셨소.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군중의 눈빛을 받으며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게 위험한 상황인가 아닌가를 가늠해 보았소.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나 표정에서 적의 같은 건 느낄 수 없었소.

나는 한국어로 말을 건네 볼까 하고 독학으로 배웠던 몇 마디 단어를 떠올려 보았으나 정말이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소. 하는 수 없이, '곤니치와, 오하요' 하고 일본어로 말을 붙여 보았소. 여기저기서 응답해 왔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일본어 구사자와 우리는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그들이 중간에서 다른 조선인과의 대화를 통역해 주기도 했소. 말문이 터지자 분위기가 갑자기 생기로 부풀어 올랐소. 조선인들은 질문이 너무 많았소. 별의별 것을 다 물어와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오. 어디서 왔느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같은 건 기본이고 덩치가 왜 이리 크냐, 뭘 먹고 사느냐, 살 속에는 피가 흐르느냐, 눈이 파란데 잠은 어떻게 자느냐, 잠을 자기는 하느냐…

나는 고대 왕국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소. 조선인들은 구김살이 없고 지적 호기심이 유별났소. 하지만 우리는 낭만적 여행이나 문화인류학적 조사를 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러 온 것임을 잊지 않았소.

우리는 매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소. 해안에 배를 대고 낚시를 하고 있는 중년 남자가 눈에 들어왔소. 그에게로 다가갔소. 우리 뒤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남철처럼 따라오고 있었소.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마치 통역관으로 임명받은 것처럼 우리를 밀착한 채 따라오더군요.

우리는 어부에게 "배로 저쪽 마을까지 좀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소. 그때 우리가 가리킨 곳은 왼쪽 아래 방향으로 내항(內港) 건너의 제법 큰 해안 마을이었소. 일본어를 잘하는 어떤 조선인이 그 마을을 '셰투(Shetu)'라고 하더군요. 그게 일본식 이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소. 지금은 그 마을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얼굴이 검게 그은 어부가 좀 당황한 기색으로 엉거주춤 일어섰소. 그가 우리를 애매하게 바라보며 말했소. "배가 이렇게 누추하지만 그래도 좋다면…" 우리는 일본어를 잘하는 두 조선인을 초청해 낚싯배에 동승시켰소.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그룹은 미국인 3명, 일본인 1명에, 조선인 2명으로 총 6명이 됐소. 세 나라 출신으로 구성된 것이니 어엿한 다국적 팀이 한 배를 탄 것이 아니겠소?

예상치 못한 난관

귀국 후 우리의 보고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간단히 기록했다오.
 
"우리는 증기선 회사 사무실 바로 앞에 있는 돌로 둘러친 선창 안에서 상륙했다. 우리는 거기에서 확 왼쪽으로 길을 꺾어 저 아래 포구 방향을 향해 일본인거류지를 지나갔다. 거기에 이르자 굉장히 많은 조선인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호기심을 쏟아내며 그들은 우리의 모습과 옷차림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들은 악의가 없고 선량했다(harmless and good-natured). 해변에 낚시꾼 한 명이 보여서 우리는 그에게 우리를 배에 태워서 내포(內浦) 가로질러 남서 방향에 있는 '셰투(Shetu)' 마을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두 명의 조선인을 통역으로 동승시켰다."
  

조지 포크가 귀국 후 출간한 일생의 여행 보고서 ⓒ 미국 의회 도서관

 
조선인 마을 '셰투'에 상륙하려고 하자 문제가 생겼소. 해안에 몰려나온 조선인들이 팔을 격하게 가로저으며 우리의 상륙을 막는 게 아니겠소? 마을 사람들이 왜인을 혐오해 출입을 막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특히 아녀자들이 왜인이라면 질색하므로 우리가 들어가면 여자들이 소동을 일으킬 것이라 경고했소.

내가 나서서, 우리는 미국인이고 여기 일행은 우리를 돕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오. "마을 사람들은 외국인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왜놈처럼 여길 것"이라는 거였소.

완강한 조선인들에게 나는 "우리가 마을에 들어가면 절대 인가에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저 동네를 둘러보기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왜인처럼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간곡히 말했소. 그러자 사람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곧 잠잠해졌소. 우리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소. 우리의 조선 마을 진입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것이오.

(* 다음 편에 계속)
#조지 포크 #왜관 #조선인 #일장기 #조선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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