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소녀는 없다

JTBC 예능 '잘 먹는 소녀들' 속 미디어 재현의 문제

등록 2020.03.09 10:17수정 2020.03.1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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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맛있게 먹는다. 다 먹은 후 계산한다.  

나에게는 이 간단한 과정 사이에 몇 가지 단계가 더 필요했다. 음식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아야 했으며, 식당을 나가기 전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발라야 했다. 그뿐인가.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쌈은 먹지 않았고, 입가에 묻은 양념을 수시로 닦아내며 밥을 먹었다. 입을 닦으며 먹는 습관은 '탈코르셋'(여성 억압적 문화로부터의 해방운동)을 선언한 후에도 남아 있다.

여성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생리적 욕구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단순한 식욕 충족에서 그치지 않고 외모 평가와 결부된다.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사회 인식과 사회화로 학습된 여성 스스로의 인식은 '먹을 때도 예쁜 여자'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20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여성 먹방 유튜버는 "지속력이 뛰어난 틴트를 쓰시는 것 같다. 어느 브랜드의 제품이냐"는 질문에 "지속력이 좋은 립 제품을 쓰는 게 아니라, (먹방을 찍는) 중간 중간 덧바르는 모습을 편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다른 여성 먹방 유튜버는 비슷한 질문에 "촬영 두세 시간 전부터 립스틱 색이 입술에 착색되도록 여러 번 덧바른다"고 말했다. 음식을 먹기 전의 입술 색을 유지하기 위해 립스틱을 계속 바른다는 유튜버들의 답변은 립스틱이 지워질까봐 음식을 편하게 먹지 못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왜 음식조차 편히 먹을 수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미디어가 끊임없이 '먹을 때도 예쁜 여자' 프레임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JTBC에서 단 2회 방영된 <잘 먹는 소녀들>(이하 <잘먹소>)이 대표적이다.

복스럽게 먹는 여자와 살찌지 않는 몸

여성의 외양과 행동양식을 '성녀와 요부'라는 이분법적 틀로 나누는 것은 인류의 유구한 여성혐오 방식 중 하나이다.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
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리 푸는 여자
가렸지만 웬만한 노출보다 야한 여자
그런 감각적인 여자' -싸이 '강남스타일' 中
 
한때 세계를 휩쓸었던 '강남스타일'의 가사는 성녀와 요부라는 이분법 하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상상하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잘 보여준다. 정숙해 보이는 외양을 한 여성이 알고 보니 밤에는 엄청나게 적극적이더라는 식의 서사는, 여성에게 '성녀'이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나와의 잠자리에서는 '요부'가 될 것을 바라는 남성 판타지 중심의 포르노 코드로 해석된다.

겉으로 보기엔 물만 먹고 살 것 같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여성이 먹을 것 앞에서 그 예상을 깨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습은, 그 자체로 남성 중심적 판타지를 자극한다. <잘먹소>는 여자 아이돌 먹방의 상품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남성이 대부분인 방청객과 패널들이 입 안 가득 음식을 욱여넣는 출연자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출연자들의 식사를 지켜보는 내내 추임새를 넣으며 환호한다. 타인의 내밀한 본능을 지켜보는 관음증적 욕망은 그 대상이 여성, 특히 '마르고 예쁜 여자아이돌'일 경우 성적인 이미지와 결부되어 더욱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먹방 여신', '먹방 요정' 등 소위 잘 먹는 여자아이돌을 향한 공통적인 평가에는 항상 '내숭 없고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복스럽게 먹되 예쁘고 날씬해야 하고, 예쁘고 날씬해야 하지만 가식 없이 굴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조건은 여자아이돌의 새로운 본분이 되고 말았다. 여자 아이돌이 사회에서 '여자 아이돌'로 인정되려면 항상 대중이 원하는 몸을 유지해야 하기에, 그들은 항상 살인적인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마른 몸을 보고 있으면 그 이면에 있을 여성의 섭식장애와 정신적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잘먹소>는 잘 먹는 여자 아이돌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많이 먹고도 살찌지 않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잘 먹으면서도 마른 몸을 유지하라는 모순적인 요구는 이러한 환상 속에서 성취 가능한 목표로 정당화된다.

한편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환상은 '많이 먹고 살이 찐 여성의 몸은 자기 관리 부족의 결과'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한다. <잘먹소>가 보여주는 '잘 먹는 마른 여자'에 대한 환상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건강한 몸과는 거리가 멀다. 먹는 것을 즐기되 철저한 자기관리로 마른 몸을 유지하라는 메시지는 그러지 못한 여성에게 죄책감과 불안을 심어준다.

이러한 죄책감과 불안은 광고 시장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결국 이는 여성들은 '많이 먹고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에 대한 선망을 유도하며, 자사의 다이어트 보조제를 사용하면 그런 체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허무맹랑한 마케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한다. 실제로 많은 다이어트 보조제의 홍보모델이 소위 '먹방 여신'으로 불리는 여자아이돌이라는 점은 우연이라 보기 힘들다.

성적 물화와 자발적 스펙화

<잘먹소>의 또 다른 문제점은 '평가자-평가 대상'과 '남성-여성'의 위계가 동시에 존재하며 특히 '남성-여성'의 위계는 표면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방송에서는 수많은 경쟁구도 포맷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고, 그 점에서 <잘먹소>는 이전의 경쟁 포맷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총 8명의 소녀들이 자기가 좋아하고 잘 먹는 추천메뉴를 가지고 나와서 일대일로 먹방 대결을 펼치고, 두 소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연예인 판정단과 네티즌들은 오늘 밤 야식으로 더 끌리는 쪽 메뉴에 투표를 해서 1등을 뽑게 된답니다." (투표 방법 소개 멘트 인용)

그러나 두 출연자의 먹는 모습 중 '더 끌리는 쪽'에 투표하는 방식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초이스(choice)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다수의 여성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며 남성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구매강간(성매매) 현장부터, "우리 학년 중에는 OOO이 제일 예쁘지. XXX는 별로고"라며 남학생들이 같은 반 여학생의 외모 순위를 매기는 공교육 현장까지 남성의 '초이스'는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다.

관찰 대상이 여자 아이돌이라는 것, 그리고 연예인 판정단과 네티즌, 방청객들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은 <잘먹소>이 기존 경쟁구도 포맷 아래 '초이스 문화'를 숨겨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연예인 판정단에 여성도 있고, 실제 여자 아이돌 팬들 중에도 여성들이 많다. 그들이 <잘먹소>의 출연자를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며 반박할지도 모른다. 왜 문제가 아니겠는가. '평가자-평가 대상'의 위계는 성별에 상관없이 존재하기에, 여성들도 평가자의 권력으로 출연자들을 타자화하여 '초이스'한다고 볼 수 있다.
 

출연자가 매운 닭발을 먹고 부은 입술을 내밀고 있다 ⓒ JTBC 예능 <잘 먹는 소녀들> 1화 캡처

  
여성 평가자의 남성중심적 시각뿐 아니라 출연자 스스로의 '주체적 물화' 역시 이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잘먹소>의 한 출연자는 "닭발 먹고 난 뒤의 입술이 제일 매력적"이라며 입술을 내밀고 키스를 하는 듯한 '매혹적인 포즈'를 취한다. 매운 음식을 먹어서 부은 입술이 '섹시'라는 성적 표현과 연결되는 것이다.

왜 여성은, 먹는 순간에서조차 성적 물화의 대상이 되(려 하)는가. 이는 여성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성의 몸은 미디어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구매되고 평가받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수많은 경쟁자 사이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여성 연예인은 자신의 신체를 스펙화하여 새로운 자원으로 만든다. <잘먹소>에서 '매운 닭발을 먹어 부은 입술'이 섹시하다고 강조한 출연자 역시 여성의 자발적 스펙화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잘먹소>의 푸드 포르노적 연출은 섹슈얼 포르노의 은유를 담고 있다.
     

출연자들의 먹방을 지켜보며 추임새를 넣는 남성 패널들 ⓒ JTBC 예능 <잘 먹는 소녀들> 1화 캡처

     
실제로 카메라는 강미나가 닭뼈를 쪽쪽 빠는 모습이나, 남주가 걸쭉한 닭발을 빨아먹는 입 모양을 클로즈업하고 재차 느린 그림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2회 예고편에서는 경리가 차돌쌈을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먹고, 전효성은 한입 넣고 신음소리 같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한다. 남성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2016년 07월 14일자 한겨레, 남지은 기자, <예쁘게 많이 먹어라? '잘 먹는 소녀들' 인권침해 논란> 본문 인용)
 
포르노에서 여성의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해 집중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처럼 여성의 입 크기를 구강성교의 유용성에 대입하며 희롱하는 남성들은 실재한다. 사운드는 또 어떤가. 출연자들이 닭뼈나 닭발을 빠는 장면에서 쪽쪽거리는 소리의 음향효과가 삽입된다.

그들은 자극적인 연출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면서 "일상생활 가능하세요?"라는 말로 이러한 연출에 대해 문제 삼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그저 먹방일 뿐인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성(性)적으로 바라보는 당신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잘먹소> 역시 피해자와 고발자의 폭로를 '예민한 것'으로 치부하는 남성 권력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할 수 있다.
   

<잘 먹는 소녀들>은 출연자들에게 먹방을 강요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 JTBC <잘 먹는 소녀들> 1화 캡처

 
<잘먹소>의 제작총괄을 맡은 성치경CP는 "잘 못 먹는 사람을 억지로 먹이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걸 자제해야 했던 멤버들이기에 그들도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며 출연자들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잘먹소>가 가진 문제의 본질은 '여자아이돌 먹방'의 상품성과 소비 방식이 기존의 여성혐오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데 있다. 제작진의 변명이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여성의 자발성'을 이용해 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물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 푸드 포르노-섹슈얼 포르노의 치환 관계 등을 교묘히 숨기기 때문이다.

<잘먹소>에서 상품이 되는 것은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음식을 먹는 여자아이돌'이다. 이 프로그램은 먹방의 주체가 여성, 그중에서도 '여자아이돌'일 경우 먹방이 갖는 의미는 여성에 대한 문제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잘먹소> 속 여성 이미지 재현은 식욕뿐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을 자본화한다. 동시에 여성의 외양과 행동양식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고, 여성들이 자신의 모습을 '자발적으로' 검열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인 세상을 가정한 채로 쉽게 여성의 자발성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성매매에 관해, 성매매 여성이 자발적으로 성을 판매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매매 여성의 자발성 유무로 진정한 피해자인지 아닌지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지극히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여성의 자발성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성과의 섹스가 상품으로 통용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여성들을 그 안으로 불러들이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현욱(@kwaksy0210) 시민기자와 공동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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