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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숨겨둔 왈츠, 이별이 너무 슬퍼서

[사연 있는 클래식] 프레데리크 쇼팽 3탄

등록 2020.03.15 11:14수정 2020.03.1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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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의 리스트는 경이로운 비르투오소의 전형이었던 반면, 쇼팽은 시인과 같은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리스트는 흡사 피아노의 파가니니처럼 기막힌 연주를 뽐내지만, 쇼팽은 반대로 청중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데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는 기복을 타긴 하지만, 영감에 완전히 사로잡힐 때면 피아노 건반에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노래를 이끌어 냅니다." - 귀스타프 슈케의 편지.
 
이 편지를 쓴 슈케는 훗날 파리 음악원의 박물관장이 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며칠 상간으로 같은 공연장에서, 같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리스트와 쇼팽의 공연을 각각 관람하고 이와 같은 편지를 썼다.

1835년 8월, 쇼팽의 가족은 바르샤바를 떠나 온천 휴양지인 칼스바트로 여행을 왔고, 이 소식을 들은 쇼팽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5년 만에 가족이 상봉했다. "부모님과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어. 서로 얼마나 자주 생각했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고 껴안고 투정하고. 난 정말 말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 꿈같은 한 달여를 함께 지내고 가족들은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쇼팽도, 그의 가족도 알지 못했다.


쇼팽과 마리아의 만남

쇼팽은 파리로 돌아가던 중 드레스덴에서 펠릭스 보진스카를 우연히 만났다. 펠릭스 보진스카는 쇼팽 아버지의 제자이면서 쇼팽 집에서 하숙을 했던 학생이었다. 방학이면 쇼팽은 그들의 영지에 놀러 가곤 했는데, 보진스카 일가는 폴란드혁명이 일어나고 1831년 제네바로 옮겨왔고, 여름휴가 차 드레스덴에 들른 것이다.

보진스카의 집에는 마리아란 딸이 있었는데, 쇼팽(25)은 마리아(16)를 보는 순간 귓가에 종소리가 울렸다. 이는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쇼팽이 바르샤바에서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봤을 땐 11살의 꼬마였었는데, 어느새 자라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는 숙녀가 되어 있었다. 2주 동안 서로의 뜨거운 마음을 확인하고 쇼팽은 라이프치히로 떠난다.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과 약속이 되어있던 그는 멘델스존의 소개로 유명한 피아노 선생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집에서 클라라와 슈만을 만났다(프리드리히 비크는 클라라의 아버지다). 이 자리에서 쇼팽이 먼저 연주를 선보였고, 클라라(16세)가 답했다. 슈만은 이미 쇼팽의 찬미자였고, 클라라 역시 쇼팽의 연주에 감격했다. 클라라의 연주를 들은 쇼팽은 "내가 작곡한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여성"이라고 격찬한다.
 

마리아 보진스키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1836. 마리아 보진스키) ⓒ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마리아와 서신 교환을 하며 그리움을 쌓아갔다. 다음 해 7월 말, 마리아의 어머니인 테레사 백작 부인의 초대로 쇼팽은 휴양지인 마리앤바드로 향한다.

마리앤바드에 위치한 백조 팬션에서 쇼팽은 마리아 일가와 8월 한 달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마리아는 수채화로 그의 자화상을 그려주었고, 쇼팽은 에뛰드 OP25, A flat 장조와 가곡 '반지'를 그곳에서 작곡했다. 그들은 드레스덴으로 자리를 옮겼고, 9월 9일 해가 지는 저녁 무렵 쇼팽은 마리아에게 청혼했다.


마리아는 기뻤지만, 테레사 백작 부인은 쇼팽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테레사는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겨울에는 바르샤바 신문에 쇼팽이 죽었다는 사망 기사가 날 정도로 쇼팽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쇼팽에게 "건강을 지켜요. 만사가 건강에 달렸어요. 지금이 시련의 시기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라고 써서 전했다.

마리아와 행복한 만남을 꿈꾸며 쇼팽은 라이프치히로 가서 슈만을 다시 만난다. 늘 그에 관한 좋은 기사를 써주는 슈만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고마운 마음에 새로 만든 발라드 G 장조 악보를 선물했다. 슈만은 그 얼마 전 쇼팽에 관한 장문의 평론을 아래와 같이 썼다. 

"만약 차르(러시아 황제)가 쇼팽의 곡 속에, 마주르카의 단순한 선율 속에, 얼마나 위험한 적이 숨어 자기를 위협하는지 안다면 쇼팽 음악 연주를 금지할 것이다. 쇼팽의 작품들은 꽃 속에 묻혀있는 대포라 하겠다. (중략) 곡마다 쇼팽의 섬섬옥수로 '이것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곡이다'라고 진주알처럼 써 놓은 것이 보이는 듯하다. 심지어 곡의 휴지부나 격렬하게 몰아치는 부분에서도 쇼팽의 곡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시대의 누구보다도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시인이요 살아있는 영혼이다."

꽃 속에 묻혀있는 대포라니, 기가 막힌 명문이다. 쇼팽은 어떤 장르의 곡에서도 자신의 지문이 꽝! 찍힌 곡을 만들었다. 쇼팽의 곡들은 듣고 있자면, '어? 이거 누구 곡이지?'란 의문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그냥 딱 쇼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슷비슷하게 자기 복제한 곡들을 찍어내지도 않는다.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창작을 해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고난도의 경지인지 잘 알 것이다.

인연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아로부터의 서신이 점점 뜸해지더니 다음 해인 1837년 5월이나 6월에 만나자고 했던 약속도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무작정 기다리다 지친 쇼팽은 여행 삼아 런던에 간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연락은 런던에 와서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연락은 이별 통보였고, 쇼팽은 비탄에 빠진다. 이별의 원인이 쇼팽의 건강 때문이었는지, 신분 차이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둘 다 조금씩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의 슬픔(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마리아는 그동안 받았던 편지 꾸러미를 되돌려보냈고, 이를 받은 쇼팽은 참담한 마음으로 편지 표지에 '나의 슬픔'이라고 썼다. 쇼팽은 마리아와 사랑할 당시 왈츠를 만들어 마리아에게 보냈었는데, 느닷없이 닥친 이별이 서러운 쇼팽은 이 곡을 꼭꼭 숨겨두었다.

곡을 대할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기억이 너무 아파서. 이 곡은 '이별의 왈츠'로 알려지며 '나의 슬픔'이라 쓰인 편지 꾸러미와 함께 오랫동안 서랍 속에 잠들어 있다가 쇼팽 사후에 발견되어, 1855년에서야 출판된다.

한편, 쇼팽과 이별한 마리아는 4년 후, 변방의 영주 요제프 스카르백작과 결혼하지만 7년 후 이혼하고 전남편의 소작인이었던 브와디스와프와 재혼한다. 1년 후, 이 남자는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쇼팽과 같은 질환인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만다. 보진스카는 77세까지 살았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와의 만남
 

남장을 한 조르주 상드(들라크루아,1834) ⓒ 들라크루아 미술관

  
1836년, 쇼팽은 리스트의 연인인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남장하고 시가를 피우며 남자 필명으로 글을 쓰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조르주 상드(1804-1876)다. 상드에 대한 쇼팽의 첫인상은 "상드라는 저 여자, 정말 매력 없어. 정말 여자 맞아?" 였다. 이때만 해도 쇼팽의 가슴엔 마리아가 꽉 차 있을 때였으니 사랑에 보수적인 쇼팽에게 다른 여자가 보였을 리가 없다.

조르주 상드가 본 쇼팽의 인상은 이랬다.

"현기증이 쨍하고 왔어요. 호리호리한 몸, 가늘고 매끈하고 길고 예쁘장한 손, 쇼팽의 일거수일투족은 빈틈이 없었어요. 세련된 매너야말로…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어요. 얌전히 빗어넘긴 갈색 머리는 명주실 같고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콧날은 더 매력적이고 우아한 몸가짐은 어디로 보나 귀공자의 기품이었어요." - 상드가 스페인 영사 부인 마를리아니에게 보낸 편지 중.

조르주 상드의 본명은 아망딘 오로르 뤼실 뒤팽이다. 1822년 상드는 18세에 카지미르 뒤드방과 결혼하여 아들 모리스(1823)와 딸 솔라주(1828)를 낳았다. 하지만 14년 후, 정식으로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운다.

조르주 상드라는 필명은 상드가 이혼을 준비 중, 처음 만난 연인이 작가인 쥘 상도였는데, 둘은 '로즈와 블랑슈'라는 책을 공동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이 쥘 상도의 이름에서 조르주 상드가 나왔다.

쇼팽보다 여섯 살 연상인 상드는 쇼팽을 만날 당시 이미 쇼팽보다 훨씬 유명한 작가였다. 무명시절 없이 첫 소설작품인 <앵디아나>(1832년)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연달아 쓴 <렐리아>(1833년)와 <자크>(1834년) 역시 연달아 대박이 난다. 상드의 소설은 프랑스를 넘어 영국까지 퍼져나갔고, 상드의 원고료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 찰스디킨스를 넘어섰다.

섬세한 쇼팽과 마초 기질이 강한 상드는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이 탄생했다. 쇼팽과 상드가 동거한 기간은 1838년부터 1847년까지 총 9년이다. 이 기간에 병약한 쇼팽은 상드의 품 안에서 자신의 최고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상드와 헤어지고 난 후 쇼팽은 왈츠 b 단조와 마주르카 43번, 단 두 곡밖에 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쇼팽의 음악은 매우 자서전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조르주 상드의 사랑이 가미된 것은 사실이다."- '닥터 지바고'로 노벨상을 수상한 보리스 파스테리나크.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참고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유강호, 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 제러미 니콜라스/ 임희근 옮김. 포노.
내 친구 쇼팽-프란츠 리스트/이세진옮김. 포노.
쇼팽의 음악과 사랑-송숙영. 범우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
#쇼팽과 상드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가 커플 #사랑은 사랑으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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