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사랑스러운 역사책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진리의 발견'

등록 2020.03.11 14:40수정 2020.03.1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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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43년 33살이 된 한 여성은 절절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편지 한 통을 썼다. 그녀의 편지 시작은 이랬다. 
 
내 유일한 친구에게.
슬픔에 매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다시 한번 깨뜨려준 일에 그대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요? 내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가치 있는 청중이라고, 내가 그대를 위해 존재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은 여행기이자 인류학 연구서, 정치적 논문이기도 한 자신의 첫 저서를 완성했는데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서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하버드대학교에 장서 열람을 신청했다. 그녀 이전에 여성이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의 문턱을 넘은 것은 몇 년 전 케이스가 유일했다.


<호수의 여름>을 통해서 백인에 의해서 핍박받고 학살된 아메리카 원주민의 실태를 고발한 그녀는 장차 정신병원, 보육원, 노숙자 보호소를 들이닥쳐 비참한 실태를 고발했다. 여성에게는 대학의 도서관 출입조차 허용이 되지 않은 시대에 여성이 일궈낸 진보였다.

그녀의 용감한 고발 덕분에 정신병 환자에 대한 치료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기 시작 했다.이 용감한 여성은 평생 타인의 권리를 위해 살았지만, 자신은 궁핍과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모든 진실은 음악과 수학으로 구성된다"는 자신의 명제를 입증해준 증거인 거창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뒤에 그에게 보낸 편지는 랠프 월도 에머슨과 함께 만들던 잡지 <다이얼>에 싣기 위해서 쓴 것이다. <다이얼>은 수익이 전혀 없었고 이 여성은 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19세기 여성>이라는 저서로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고 페미니즘의 시작을 알린 그녀의 이름은 마거릿 풀러다. 첫 책 <호수의 여름>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출간 과정 자체가 여성주의자들을 위한 경로를 제시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월든의 그 소로가 맞다)가 풀러가 편집을 맡았던 <다이얼>의 수익금으로 인쇄비를 충당하고 자비로 출간할 것을 조언했지만 풀러는 이익이 없었던 <다이얼>의 사정을 고려해서 신생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하고 인세 10%를 받기로 한다. 


저자 이름을 마가렛 풀러를 써지 않고 S. M 풀러라는 이름으로 냈다. 독자들이 여성 작가라는 편견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훗날 <침묵의 봄>으로 환경 운동의 불꽃을 지핀 레이철 카슨도 첫 책의 저자 이름을 R. L. 카슨을 사용했는데 20세기가 되어서도 많은 여성 작가들이 논픽션이나 문학책을 낼 때 성별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흔하게 되었다.

풀러의 글쓰기는 소로우처럼 월든 호숫가를 한가로이 산책하면서 철학적인 사색을 모색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풀러의 글쓰기는 인간이면 누구나 남녀, 인종, 부의 정도에 상관없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행력이 있었다. 미국 여성에게는 '독립 선언'이나 다름없는 <19세기 여성>을 통해서 풀러는 여성의 자립(self-dependence)이야말로 사회를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힘이자 진보적인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남자와 여자는 한 생각의 반쪽들이다. 나는 그 어느 쪽이 더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한쪽의 발전이 없다면 다른 한쪽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바라는 소망은 이 진실이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일이며, 우리 시대의 딸과 아들이 삶의 조건과 자유를 똑같이 인식하며 살아가게 되는 일이다.

# 2

1617년 어느 추운 1월, 세계 최초로 공상과학(S.F)소설을 쓴 중년 남자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마차에 타고 어머니에게 가고 있었다. 이 남자의 어머니가 마녀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수학자가 본업인 이 남자는 코페르니쿠스가 주창한 지동설을 지지하는 우화를 발표했는데 그 우화 속에는 아이작 뉴턴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중력 작용, 아직 등장하려면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하는 음성 합성 장치, 우주여행이 등장한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이 공상과학 소설은 과학의 힘으로 미신을 물리치자는 취지와는 달리 어머니가 마녀로 고발당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꿈>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하기 전에 쓴 것인데 달나라로 여행을 떠난 한 천문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는 명제의 뿌리이기도 하다. 

수백 년이 지난 20세기의 막바지의 캐서린 존슨(영화 <히든 피겨스>의 실존 인물)이 이 사내가 만든 법칙을 이용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수 있는 궤적을 계산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아들이었고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한 이 사내의 이름은 요하네스 케플러다. 

천체가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궤도(케플러가 처음 만들어낸 용어다)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어머니가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도 입증해야만 했다. 케플러가 살았던 시대는 과학이 싹트기도 했지만, 지동설을 주장하는 자는 처벌을 받았고 마녀사냥이 성행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 위험한 시대에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주장한 케플러의 공상과학 소설 <꿈>은 케플러의 어머니를 마녀사냥의 재물로 만들고 말았다.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꿈>은 악의에 찬 해석으로 케플러의 어머니를 마녀로 둔갑시키기에 좋은 도구가 되었다. 1577년 6살 소년 케플러를 집 근처 언덕에 데리고 가서 핼리혜성을 보여줌으로써 아들에게 천문학의 매력을 일깨워준 이가 바로 그의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였다.

6년간의 미신에 대항한 이성의 투쟁으로 케플러는 어머니가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그의 노모는 혹독한 감옥생활과 재판의 후유증으로 금방 세상을 버리고 만다.

마녀사냥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진 후에도 케플러는 <꿈>의 본문과 맞먹는 분량의 주석을 다는데 몰두했다. 223개의 주석은 그가 소설 속에서 사용한 상징과 은유에 대해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악의적이고 미신적인 해석을 차단할 임무를 수행했다. 

케플러는 <꿈>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339년 후 인류가 처음으로 그가 만든 법칙으로 계산한 궤도를 따라 달에 첫걸음을 내딛음으로써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표지 <진리의 발견> 표지 ⓒ 도서출판 다른

 
위의 두 에피소드는 마리아 포포바의 쓴 <진리의 발견>의 두 가지 장면이다.

나는 서사와 아름다움을 기대하고 문학작품을 읽는다. 비문학 작품은 지식과 정보를 기대하고 읽는다. <진리의 발견>은 비문학이지만 아름다운 글로 가득 차 있다. 800쪽이 모두 한편의 서사시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가령 이런 문장들.
 
미첼은 수학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추상적 도락이 아닌, 항법에 필요한 실용적인 도구였던 바닷가 마을에서 성장했다.

우리는 앞을 가로막는 장애에 모든 비난을 덮어씌울 수 없듯이, 우리가 이룬 위업에 대해 모든 공을 독차지할 수도 없다.

감정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곳에 고여 있던 지하수에서 새어 나온 증기가 융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빛과 접촉하여 한순간 어떤 무지개를 흩뿌리지만, 이는 나타날 때처럼 순식간에 불가해한 방식으로 흩어지고 사라져버린다.

<진리의 발견>은 여성의 굴레를 극복하고, 과학을 발달시키고, 여성의 권익을 개선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환경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위대한 여성들의 비범한 생애를 그린 책이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수백 년의 시공간을 오가며 등장인물을 연결하는데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들이 서로 인연을 맺고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미국인들이 '립 서비스의 장인'이라고 생각해서 책에 대한 미국 언론의 찬사를 무시하는데 이 책 만큼은 예외로 해야겠다. 
 
이제껏 과학과 시, 사랑과 배움, 연애가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를 이토록 완벽하게 탐구한 이가 없었다. ... 더 읽고 싶어 몸이 떨릴 정도이다. <사이언스>

진리의 발견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은이), 지여울 (옮긴이),
다른, 2020


#진리의 발견 #포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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