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는 어린이집 긴급보육 중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 가족에게 미친 영향] 포기할 수 없는 생계...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댄 결과

등록 2020.03.12 10:29수정 2020.03.12 10:3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손자의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10일 보내주신 일일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공룡들 줄 세우고 놀이 하기도 하고, 공룡 이름도 물어보고, 오늘은 "육식 공룡이야, 육식 공룡!"'

선생님은 곧 생후 30개월을 맞는 어린 손자의 입에서 육식 공룡이라는 단어가 나온 데 대해 조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열흘 안팎의 기간, 하루 평균 적어도 6~7시간은 손자가 유튜브의 '세례'를 받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갑작스럽게 어린이집 등원이 중단된 지난달 말 이래 손자는 매일 온종일을 집안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코로나19 확진과는 무관하게 사실상 격리 생활을 한 겁니다.
  

지난 달 25일 어린이집 등원 직전 가방을 둘러 맨 손자. 이날 등원을 마지막으로 열흘 넘게 어린이 집을 보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매일 온종일을 딸과 필자는 손자와 씨름하며 보내야했다. 물론 두 사람은 생업을 중단하다시피 했다. ⓒ 김창엽

 
그 기간 유튜브를 틀어 놓고 애니메이션을 줄곧 시청했는데, 공룡이 등장하는 게 아마 거의 절반을 차지했을 겁니다. 글을 전혀 읽을 줄 모르는 손자가 어디서 육식 공룡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접했을까요.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손자 육아는 제 엄마와 할아버지인 제가 전담합니다. 이른바 '경단녀'인 딸이 경력을 이어가 보겠다며, 친정을 찾은 탓에 육아 보조는 물리칠 수 없는 제 몫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손자처럼 어린 녀석을 키워보는 건 지난해 약 7개월 동안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과거 10년 가까이 혼자서 딸과 아들, 그리고 조카까지 양육해 본 경험이 있어서 낯선 일은 아닙니다.


어린이집이 '정식으로' 다시 문을 여는 건 오는 23일로 예정돼 있습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코로나19로 인한 위험을 최소화 하자는 정부의 방침과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겠지요.

그러나 예정된 재등원 날짜를 2주 앞당겨 긴급 보육을 청한 건, 견디기 힘든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딸과 제가 머리 맞대고 논의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지금 시민들 모두가 너나없이 코로나19 차단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급하기로는 우선 내 식구들의 건강을 지켜야 하고, 나아가 지역 사회, 더 나아가서는 국가 차원에서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칠게 얘기하면 한마디로 모두가 살자고 코로나19에 대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 살도 안 된 손자의 건강을 담보로 재등원 예정 일을 보름 가까이 앞당겨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한 이 할아버지는 참 비정한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항변하자면, 식구들 전체의 상황을 감안해, 이게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저 역시 이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경단녀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딸도, 따지고 보면 살려고 그리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집에서 종이벽돌 쌓기 놀이를 하고 있는 손자. 열흘 이상 손자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던 끝에 한계 상황에 이르러 긴급보육을 신청하고야 말았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어린 손자에게 위험을 분담하게 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 김창엽

   
아이 엄마, 그러니까 손자의 외할머니가 대인 접촉이 적다고 할 수 없는 가게에 찜찜해 하면서도 매일 나가야 하는 건 돈을 벌어야 끼니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코로나19를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서라면 벌이가 변변치 않은 반백수인 저 또한 당분간은 대인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생계 유지에 필연코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손자가 공룡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고, 그 가운데서도 육식 공룡이 손자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추정해 봅니다.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다는 걸 그 어린 녀석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게지요.

이마에 피 마른 지 얼마 안 된 손자의 어린이집 등원은 그래서 손자의 고통, 아니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에서 그 어린 것의 위험 분담이기도 합니다.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최대한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렵니다.

코로나19에 대해 정부는 그 존재 이유상 과잉 대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시민 개개인 또한 정부와 같은 수준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각자 처한 처지에 따라, 사실상 '자가격리'에 준해 생활할 수도 있고, 감염을 최대한 유의는 하되 살기 위해 '생업'을 지속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를 통한 타인 감염 방비가 이런 상황에서는 으뜸 가는 생활의 준칙이라는 가정 아래서 말입니다.

운동 시합에서는 종종 오심도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스포츠계에서 오심이 없어져야 하듯, 지구촌에서 감염병은 사라져야 하겠습니다만, 동서고금의 역사는 희망과 달리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해줍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해 미국에서는 독감으로만 1만5천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독감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건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저는 식구들에게 코로나19를 독감이나 감기처럼 상존하는 감염병의 일부로 여기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발병 사례가 거의 보고되지 않는 천연두처럼 코로나19가 이번 기회에 박멸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대비하자는 게지요. 80대의 어머니 아버지와 50대인 동생들, 30대인 딸과 아들에게는 코로나19 말고도 향후 또 어떤 신종 바이러스가 출몰해사람들을 괴롭힐지 모를 상황에 대해 마음으로나마 준비하자고 말한 겁니다.

익숙한 독감이나 감기와 달리 코로나19는 신종, 즉 '새로운 놈'입니다. 이전에 못 보던 존재라 더욱 두렵습니다. 그러니 더 불안한 게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불안과 위축으로 지레 기가 꺾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신이 위축되면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균과 맞서 싸우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한 인체의 면역력이 저하될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식구들에게 일러둔 점은 코로나19로 인한 불안의 근원을 이 기회에 돌아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토록 불안하고, 안절부절 하는지 차분히 생각해보자는 얘기입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창고와 원두막 같은 걸 불가피하게 몇 차례 지어야 했습니다. 여름에 땀 뻘뻘 흘리며 사다리에 올라서 위태로운 자세로 못질하는 게 힘들어서 못 4개를 쳐야 할 자리에 2개를 박고 대충 지붕을 둘러씌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지력이 약하다 보니, 오늘처럼 바람이 심하게 부는 때면 예외 없이 불안해하곤 합니다.

또 일주일에 최소 두어 번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해 묶음으로 만들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조금은 남부끄럽고 미안한 얘기인데, 몇 식구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선 비닐과 플라스틱류 쓰레기가 상상도 뛰어넘을 만큼 많이 나옵니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저 깊은 땅속에서 퍼 올린 석유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이르면, 불안감을 넘어서 죄책감 같은 게 들기 시작합니다. 자연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드는 거지요. 불안감도 같이 켜켜이 쌓입니다.

지구온난화는 과도한 석유 사용이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는 작금의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를 불러오는 주범으로 지목됩니다.

비행기를 포함한 대다수의 운송 수단은 석유를 동력원으로 합니다. 여행객을 포함해 국내외 할 것 없이 폭증하는 이동 인구는 인류를 감염병에 더 취약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나의 불안 가운데 일정 부분은 내가 '저질러 놓은' 그 무엇 때문에 생긴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코로나19 그 자체의 위력도 있지만 말입니다.

전자레인지에 넣어도 문제없다는 플라스틱 그릇에 식은 피자를 데워먹으면서 혹시 눈에 안 보이는 플라스틱 입자가 피자에 섞여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찜찜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생수병의 물을 먹는데 그 속에 미세 플라스틱 같은 게 녹아있지 않을까 하며 불안해합니다.

소심한 성격 탓인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사고를 접하면 가슴이 먼저 오그라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 불안 요소들을 키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불안감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층층이 쌓여 있다면, 코로나 19 같은 사태에 적정한 수준으로 냉정하게 대응하지 못할 확률이 높은 건 자명한 이치입니다. 독감과 감기의 중간 어디쯤 돼 보이는 코로나19의 팬데믹이 저 같은 사람에게는 패닉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저 이 못난 할아버지의 과보를 손자가 떠안는 결과가 없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코로나 #어린이집 #손자 #긴급보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