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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환자 할머니가 찜질방 청소를 해야 했던 이유

[동네의사의 기본소득④] 봉쇄가 아니라 '선택권'이 필요한 사람들

등록 2020.03.15 15:19수정 2020.04.2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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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사의 기본소득'이 매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네의사'는 과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했고, 한국 최초의 에볼라 의사이기도 합니다. '동네의사'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풀어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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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병원 '코로나19' 음압병실 10일 오전 대구광역시 경북대병원 음압병실에서 '코로나19' 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다. 간호사들이 온몸을 보호하는 D급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고 있다. ⓒ 조정훈

 
코로나19가 유행하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작고 구부정한 74세 할머니가 '쌕쌕' 거칠게 숨을 쉬며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한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했다. 할머니는 이미 3일 전부터 몸살, 오한, 기침으로 고생하다가 오늘에야 병원을 찾았다. 체온은 36.6도로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경우 폐렴에 걸려도 열이 안 나는 경우가 흔하다. 청진을 위해 웃옷을 올리자, 언제 풀었는지 짐작할 수 없어 보이는 복대가 제2의 신체처럼 할머니 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허리 통증을 견디며 노동을 해야 하는 어르신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어르신, 일하세요?"
"예, 찜질방에서 청소합니다."


유난히 칙칙하게 검은 피부가 이상해서, 지병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역시나 만성 콩팥병 환자였고, 이미 투석을 권유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혈액투석을 위한 혈관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고 계셨다. 그때는 독감이 유행하는 철이었다. 만성 콩팥병 환자는 독감 예방주사를 꼭 맞아야 한다. 더구나 65세 이상은 무료다.

"어르신, 독감 예방주사 맞으셨어요?"
"아니요. 시간이 안 맞아서요.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자식뻘인 의사에게 밑도 끝도 없이 죄송하다고 한다. 독감 검사에서 'A' 앞에 선명하게 붉은 줄이 나타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가 걱정스러워, 가슴 엑스레이를 찍었다. 심장이 심하게 커져 있었다. 난 더욱 불안해졌다. 급하게 할머니의 혈압을 측정했다. 82/53mmHg! 난 할머니에게 가족과 함께 빨리 응급실로 가시도록 권했다. 내가 쓴 진료의뢰서를 할머니에게 가져다드리고 들어온 간호사에게 물었다.

"가족이랑 연락되었대요?"
"아니요. 혼자 가시겠대요. 그런데 왠지 응급실에 안 가실 것 같아요."



먹고 사는 일이 가장 두려운 사람들
 

3월 12일 00시 기준 국내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연령별 분포도 우리나라 70~79세 코로나19 환자의 치명률은 4.83%이고, 80세 이상 환자의 치명률이 8.23%다. ⓒ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할머니는 독감의 주요 합병증인 폐렴에 걸렸고, 입원이 필요한 상태였다. 폐렴 중증도 지수인 'CRB-65'에 따르면, 나이 65세 이상, 수축기 혈압이 90mmHg 미만이거나 이완기 혈압이 60mmHg 이하면, 입원 치료가 필요한 중한 폐렴을 뜻한다. 이 경우 관찰된 사망률이 8.15%에 달한다. 얼마나 위험한 상황일까?

3월 12일 현재 우리나라 70~79세 코로나19 환자의 치명률은 4.83%이고, 80세 이상 환자의 치명률이 8.23%다. 면역력이 약한 만성 콩팥병 환자는 더 위험할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 그 할머니 환자가 어떻게 되셨는지 내가 알 방법은 없다. 할머니는 왜 가족에게 연락하거나 응급실로 가는 것을 주저하셨을까? 자식들 걱정시키는 것이 싫거나 치료비 때문일 수도 있다.

할머니는 찜질방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고 계셨다. 일 때문에 무료 독감 예방접종도 못 했고, 투석 혈관수술도 미루고 있었다. 며칠 일을 못 하면, 그 찜질방 일자리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8.15%의 확률, 손에 잡히지 않는 숫자보다 당장 오늘 먹고 사는 문제가 더 두려우셨던 것은 아닐까?

봉쇄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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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이유로 방문객의 입국 제한 조치를 실시한 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출국장에 이용객이 없어 한산하다. ⓒ 유성호

 
세계보건기구가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을 선언했고, 전 세계는 코로나19 공포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정치인과 의료인은 여전히 중국인 입국 금지를 주장하고 있다. 또 한때 집권 여당 안에서 '대구 봉쇄'라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는 외국인 입국 금지나 봉쇄가 코로나19 차단에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해 왔다. 지금 같은 세계화 시대에 인간의 이동을 완전하게 차단할 수도 없고, 오히려 밀입국을 조장해서 방역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입국 금지나 봉쇄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대다수 국민은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를 실천하고 있고, 방역 당국은 스마트폰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최후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 말이다.

입국 금지나 봉쇄 조치가 단행되면, 어떤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까? 거꾸로 물어보자. 팬데믹 상황에서 입국 금지나 봉쇄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반드시 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몇 주나 몇 달 후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선택권이 없는 그들은 '미래', 즉 다른 가능성이 이미 봉쇄 당했다. 이미 삶이 봉쇄 당했기에, 역설적으로 경계를 넘어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일터에 나가야만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 그 권리를 보장해 줄 조건이다. 기본소득은 이 '조건'을 제공해줄 수 있는 하나의 해답이다.

기본소득이 있을 때,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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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6일 '국제기본소득행진(Basic Income March)'에 참여한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핸드프린팅으로 만든 현수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불로소득 나눠 갖자’,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힘차게 외쳤다. 이날 전 세계 10개국 26개 도시에서 동시에 행진이 벌어졌으며, 서울 대학로에서 보신각까지 진행된 행진에 150여 명의 지지자들이 참여했다. ⓒ 최경준

 
'그럼 화장실 청소는 누가 하나?'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모두가 싫어하는 3D 업종 일은 누가 하겠는가?'


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반론 중 하나이다. 기본소득운동의 답은 간단하다. '더 높은 임금, 더 좋은 노동조건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단순함에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변화는 무척 근본적이고 다차원적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자리는 대개 '노동자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 힘든' 영세기업들이 제공한다. 이런 기업들이 '갑질'과 'n차 도급', '대기업의 골목길 상권 진출'까지 감수해야 하는 우리 산업체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그렇기에 필자는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단지 위험하거나 더러워서 꺼리지는 않는다. 임금이 낮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노동에 대한 선택권과 협상력도 떨어진다. 아파도 쉴 수가 없다. 코로나19 유행 중에 감기 증상이 있어도, 휴가는 그림의 떡이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여야 한다. 8.15%의 치사율을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그 할머니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정상훈씨는 기본소득당 서울시당 공동위원장입니다. 기본소득당은 평균나이 27세의 당원들이 만든 정당입니다.
#코로나19 #폐렴 #기본소득 #중국인 입국금지 #대구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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