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사소한 구원을 믿는다, 요즘 특히 그렇다

[코로나19가 내 주변에게 미친 영향] 다정한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의 힘

등록 2020.03.17 20:30수정 2020.03.17 20:30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월까지만 해도 나는 행복한 프리랜서였다. 아침이면 커피 한 잔을 타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날그날 집필 노동을 할 것인지, 프리뷰(방송 프로그램에 쓰이는 영상파일을 대화와 상황, 카메라 앵글까지 세밀하게 문자화 하는 업무)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한 뒤 업무를 시작했다.


카페에 가지 않으니 커피 값도 들지 않았고, 화장을 하거나 꾸밀 필요가 없으니 시간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다. 매일 적지만 꾸준히 돈을 벌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프리랜서의 일상이나, 내가 '행복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이유는 여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준비해온 스페인 여행이 불과 60일 뒤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감염자가 30명대이던 2월 중순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한 종교단체와 관련된 확진자가 무더기로 발생하면서 국내 상황이 급변했다. 유럽 상황도 시시각각 나빠졌다. 각국에서 빠르게 퍼지는 확진자, 유럽에서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한 중국인의 뉴스, 각 항공사의 단항 및 스케줄 변경까지...

매일 새벽 2~3시까지 모로 누워 휴대전화 화면 속 뉴스를 보며 고민했다. 여행을 강행한다 해도 인종차별의 두려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내가 지역사회에 바이러스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3월 1일에 숙소와 항공권, 기차, 버스, 현지투어 등 모든 예약을 취소했다. 내게는 구글지도 속 '스페인' 폴더에 저장해둔 300개의 장소와 100만 원의 위약금이 남았다.

3월 스페인 여행을 취소했다
 

1년을 준비한 스페인 여행은 100만원의 위약금만 남기고 사라졌다 ⓒ unsplash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리뷰 일감도 뚝 끊겼다. 방송사에서도 정규 프로그램이 결방되거나 아예 신규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제반 업무도 없어진 탓이다. 막막한 마음에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데 김포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다른 일정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하루 자고 갈래?"


여섯 살과 두 살 남매를 키우는 친구가 오래간만에 보낸 메시지였다. 스페인 여행은 취소되었고 프리뷰 일감도 끊긴 마당에 다른 일정이 있을 리 없다. 집에만 있던 나는 마스크와 목도리, 장갑으로 무장하고 친구 집을 찾았다.

두 달 만에 본 친구 얼굴이 푸석했다. "요새 힘들지?" 말을 건넸더니 친구 얼굴에 쓴웃음이 떠오른다. 바깥 외출을 한 발자국도 하지 않고 산 지 열흘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친구는 낮잠에서 막 깨어난 두 살 아들을 품에 안고 여섯 살 딸에겐 주스를 쥐어준 뒤 능숙하게 커피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친구는 전국의 어린이집 등원일이 3월 23일로 연기되면서 근 두 달을 아이 둘과 24시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집에 영유아가 있으니 외출도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장보기는 온라인으로 대체한 지 오래고 산책도 병원에 가는 등 피하지 못할 일정이 있을 때나 가능했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엄마는 직장인이니 어디 잠깐 아이를 부탁할 곳도 없다. 뜨거운 물로 뽀드득 소리 나게 그릇 설거지하는 걸 좋아하던 친구는 "이젠 설거지 쌓인 것만 봐도 우울함이 밀려온다"며 "산후우울증도 없이 지나갔는데 요즘이 출산 직후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친구가 따라준 커피를 마시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일단 일어나 외출복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섯 살 첫째와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써가며 한바탕 논 뒤 함께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잠깐 숨을 고른 뒤 이번에는 두 아이 모두를 데리고 플레이도우로 국수며 쿠키를 잔뜩 만들고 놀았다. 두 아이가 놀다 지쳐 도롱도롱 잠들면 오늘 밤에는 내 친구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겠지.

예상대로 그날 밤 아이들은 엄마를 오래 애먹이지 않고 쉽게 잠들었다. 나와 친구 그리고 친구의 남편은 맥주를 마시며 육아와 직장생활, 프리랜서의 밥벌이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이르는 수다를 떨며 꿀 같은 육퇴(육아 퇴근) 이후의 시간을 즐겼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주변인들의 '안녕'을 물어보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다. 임신 8개월차 친구 L은 임산부 요가부터 글쓰기 수업까지 모든 강좌가 취소되면서 도무지 바깥에 나갈 일이 없어 좀이 쑤신단다. 나는 또 다음주쯤 마스크로 무장한 뒤 운전을 해서 L의 집에 갈 생각이다. 함께 유튜브를 틀어놓고 임산부 요가를 하면 그도 나도 조금 기분전환이 되겠지 싶어서.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아는 동생 Y는 상황이 더 나쁘다. 아예 예약이 한 명도 없는 날들이 생기면서 당장 이달 매출이 뚝 떨어졌다. 손님이 없는 김에 아예 당분간은 경기도 본가에 올라와 있단다.
 

적막만 흐르는 게스트하우스가 속속 생겨난다 ⓒ unsplash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재택근무가 실시되고 출퇴근 시간 역시 탄력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도 위안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두 달을 꼬박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이들은 주변인이 하루만 아이와 놀아줘도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 '가정방문'이다. 자차를 이용해 타인과의 접촉 기회를 차단한 뒤 마스크 차림으로 집에서 집으로 이동한다. 만남이 어렵다면 통화나 메시지를 통해서라도 안녕을 물어도 되고.

며칠 전 내 스페인 여행 계획을 알고 있던 친구 K가 조심스럽게 연락해 왔다. "어떻게 됐어?" 나는 모두 예약을 모두 취소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음은 괜찮아?"라는 말이 바로 돌아왔다. 나는 괜찮다고,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생각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고. 특히 세상이 흉흉할 때에는 서로가 서로의 다정에 기대는 게 제일이라고. 

황동규 시인도 말하지 않았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고. 나는 사소한 구원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relaxed)에도 실립니다.
#코로나19 #독박육아 #게스트하우스 #임산부 #프리랜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라디오와 밤이 있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 라디오 작가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윤 대통령, 달라지지 않을 것... 한동훈은 곧 돌아온다"
  3. 3 왜 유독 부산·경남 1위 예측 조사, 안 맞았나
  4. 4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5. 5 창녀에서 루이15세의 여자가 된 여인... 끝은 잔혹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