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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감'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 된 이유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감염병 이름과 국가 간 이해관계

등록 2020.03.24 07:49수정 2020.03.2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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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연설 통해 코로나19 대책 밝히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오후 9시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국민연설을 통해 코로나19 대책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AP


코로나19의 명칭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사용하는 공식 병명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이고 약칭은 '코로나 19'이지만, 미국 행정부는 '우한 바이러스'나 '중국 바이러스'를 고집하고 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6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폭스뉴스 및 C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바이러스가 우한 코로나바이러스임을 기억한다", "바이러스가 우한에서 시작됐다고 말한 것은 중국공산당이었다" 등등의 말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한 중국의 책임을 부각시키면서 '중국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현지시각 18일 그는 "중국 바이러스 용어는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아니다"라고 했고, 19일에는 "분명한 사실은 전 세계가 중국이 저지른 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19일에는 트럼프의 의도적 연출이 아닌가 생각할 만한 일도 있었다. 위의 19일 발언이 나온 기자회견 때 <워싱턴포스트> 사진기자 자빈 바츠포드의 카메라에 트럼프의 연설문이 포착됐다. 인쇄된 연설문 위에다가 굵직한 펜으로 줄을 긋고 문구를 수정한 모습이다. '코로나(corona)'가 지워지고 '중국(Chinese)'으로 고쳐져 있었다.

   

'코로나'를 '중국'으로 고쳐 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 원고 ⓒ 트위터

   
스페인 독감의 발원지는 미국 캔자스?

중국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있다. 일례로 지난 4일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자오리젠 대변인은 "언론이 우한 바이러스, 중국 바이러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무책임한 일"이라며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유래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코로나19가 어디서 발원했든, 어디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왔든, 이 사태가 장기화되어 세계 경제에 치명타를 가하고 세계 질서를 혼돈에 빠트리게 되면 아무래도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세계 질서가 위태해질 때마다 세계 최강국의 지위가 요동친다는 점은 세계사가 이제껏 수없이 증명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현 세계질서의 '비주류 지역'인 아시아에서 '주류 지역'인 북미대륙과 유럽으로 확산되는 양상은 미국 입장에서는 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냐 중국 바이러스냐'를 따지는 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미국이 명칭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이 사태가 미국 책임론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 WHO의 결정을 무시하면서까지 명칭 변경을 시도하는 모습은, 국력 여하에 따라 전염병 발원지로 오인받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책임을 피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갖게 할 만하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이런 사례에 해당할 만한 사건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중에 발생한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 그것이다.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불리는 스페인 독감은 적게는 2500만, 많게는 5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14세기에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을 연상케 하는 사태였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은 잘못된 명칭이었다. 스페인이 퍼트린 병도 아니고 스페인에서 발원한 병도 아니었다. 발원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식적 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스페인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스페인과 무관한데도 그렇게 불리는 것은 대중의 오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력의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텍사스대학 교수 등으로 활동했던 역사학자 알프레드 크로스비(Alfred Crosby, 1931~2018)는 2003년에 펴낸 <미국의 잊혀진 유행병: 1918년 독감(America's Forgotten Pandemic: The Influenza of 1918)>에서 스페인 독감의 발원지는 미국 캔자스주라고 주장했다.

다음해인 2004년에는 미국인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존 배리(John Barry, 1947~ )도 거들고 나섰다. <중개의학지(Journal of Translational Medicine)> 제2권 제1호에 실린 '1918년 독감 유행병의 발원지 및 그 공중보건적 함의(The Site of orgin of the 1918 influenza pademic and its public health implications)'에서 그는 스페인 독감 발원지를 캔자스주 해스켈군(Haskell County)으로 지목했다.

끝내 '미국 독감'으로 정정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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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캔자스 군사병원에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치료 받고 있는 환자들 ⓒ wiki commons

  
스페인 바야돌리드 출신인 역사학자 산티아고 마타(Santiago Mata, 1965~ )도 스페인어로 발행된 <미군이 스페인 독감을 전 세계에 전파한 방법(Cómo el Ejército americano contagió al mundo la Gripe Española)>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주장을 내놓았다. 2017년 발행된 이 책을 영어로 소개한 서평 기사 '미군이 스페인 독감을 전 세계에 전파한 방법(How the US Army infected the world with Spanish flu)'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책은 독감 전염병이 1917년 가을부터 적어도 14개 이상의 대규모 미군 기지에서 발생했으며 이것이 이미 1918년 대유행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http://limpia.centroeu.com/how-the-us-army-infected-the-world-with-spanish-flu)
 
이처럼 스페인 밖에서 최초 발견됐는데도, 스페인이 오명을 뒤집어쓴 이유에 관해 김택중 인제대 의학 교수는 2017년에 <인문논총> 제74권 제1호에 실린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918년 독감이 스페인 독감이라 불린 이유는 사람들이 스페인을 독감 유행이 처음 시작된 지역 또는 유행이 매우 심한 지역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이 유럽의 다른 교전국들과 달리 언론 통제를 하지 않아 자국 내 독감 유행 사실이 검열 없이 보도된 데에서 비롯하였다."
 
미국은 제1차 대전이 발발한 지 3년 뒤인 1917년에야 전쟁에 가담했다. 만약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미국 언론이 보도의 자유를 누렸다면, 당시 사람들은 독감의 발원지에 대해 좀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스페인이 가장 정확히 보도한 결과로 독감 진원지로 오해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1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세계 제1의 경제 강국으로 떠올랐다. 자국의 제창으로 설립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탓에 정치 강국으로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제1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승국 및 경제강국의 지위에 힘입어 세계 최강 영국도 무시할 수 없는 국제적 지위를 누렸다.

만약 미국이 1918년 이후로 그런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면, 스페인 독감이 진정된 뒤에라도 발병지가 좀더 일찍 정정됐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스페인 독감이 아니라 '아메리카 독감'이나 '미국 독감'으로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근 100년이 되는 2000년대 들어서야 발원지가 미국이라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되는 것은 지난 100년간 미국이 누린 국제적 지위와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메르스는 왜 '사우디호흡기증후군'이 아닌가

2015년 발생한 메르스는 중동(Middle East)에서 최초 발견됐다는 이유로 중동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으로 불린다. 사우디 측은 부정하려 애쓰지만, 이 병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우디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미국의 중동 전략에 필수 불가결하다. 사우디는 미국과의 동맹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미국은 사우디 덕분에 이 지역 석유에 대한 지배권은 물론이고 달러 패권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제2차 대전 이후로 전 세계가 달러를 신뢰한 것은, 달러를 갖고 미국에 가면 미국이 금으로 바꿔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런 금을 보유하지 못했고, 결국 1971년 8월 15일 "일시적으로,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말았다(닉슨 쇼크). '일시적'이란 단서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바꿔줄 금이 없어 추락 위기에 빠진 달러를 살려준 게 바로 사우디다. 석유 매매대금을 달러로만 받기로 한 사우디의 조치로 인해 세계 각국은 계속해서 달러에 의존해야 했고, 이는 달러와 미국의 권위를 지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우디도 미국에게 신세를 많이 졌지만, 미국은 사우디에 훨씬 신세를 많이 졌던 것이다.

만약 이런 관계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트럼프나 폼페이오가 하듯이 당시의 미국 행정부가 '사우디가 발병지'라며 사우디를 비판했다면, 중동호흡기증후군이 아닌 사우디아라비아호흡기증후군으로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페인 독감 사례와 더불어 이 사례 역시 국제적 감염병의 명칭이 국제적 역학관계에 의해서도 좌우됨을 보여줄 만한 사례다.

코로나19가 확산되자 미국은 기준금리를 사실상의 제로 상태로 인하하고 한국 등 세계 각국과의 통화 스와프를 준비하고 있다. 달러화 부족으로 세계 경제가 동요하고 미국 다국적기업들이 도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전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코로나19 확산과 미국의 지위 약화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두려움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트럼프와 폼페이오가 '유치한 작명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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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신라왕실의 비밀,왕의 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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