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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개싸움' 된 선거, 고등학생 유권자의 신랄한 한마디

[아이들은 나의 스승 186] 첫 투표의 설렘이 정치 혐오로 바뀌는 건 순간

등록 2020.03.24 15:57수정 2020.03.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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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실마다 선거 교육 홍보물과 자료들이 넘쳐난다. 휴업이 길어진 탓에 예정대로 개학해도 교육 기간이 빠듯하다. ⓒ 서부원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개학이 하염없이 늦춰지고 있지만, 상급 기관으로부터 내려오는 공문은 여전하다. 학년 초인 이맘때쯤이면 항상 내려오던 것에다, 감염병과 관련된 것들까지 더해져 양이 훨씬 더 늘었다. 아이들도 없는데, 왜 이리 보고하라는 게 많은지 답답함을 더한다.

올해 들어 유독 눈에 띄는 게 있다. 4.15 총선을 앞두고 학생 유권자 대상 선거 교육에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의 공문이 그것이다. 지난해 말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교육부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학교에 뿌려대고 있다.

공문과 함께 온 선거 관련 홍보물과 포스터가 교무실에 이미 수북하다. 예정대로라면 게시판과 교실마다 부착하고, 가정통신문과 함께 각 가정으로 보냈어야 할 것들이다. 수업시간 계기교육용 자료들까지도 넘쳐난다. 단지 교육을 받아야 할 아이들만 학교에 없을 뿐이다.

당장 학칙부터 손봐야 한다. 학칙을 고치려면 절차상 학교마다 설치되어 있는 학칙개정심의위원회와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상위법이 개정된 이상 상위법과 충돌하는 내용이 있다면 우선 삭제하거나 수정한 뒤 나중에 추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성싶다.

선거법 개정으로 만18세, 곧 2002년 4월 15일 이전 출생자는 이번 4.15 총선에 투표를 할 수 있게 됐다. 인구 통계에 의하면, 14만 명 정도가 새로 투표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 대학 신입생은 물론, 현재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 중 상당수가 포함된다.

투표권이 있다는 건 정치적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는 뜻이며, 나아가 관련 사회단체에 가입하는 등의 정치활동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직도 학생들의 정치활동 금지 규정을 학칙에 명시한 학교가 태반이다. 정치활동에 관해 가중 처벌 규정을 둔 곳도 있다고 한다.

학교는 관련 금지 규정을 통째로 삭제하거나, 최소한 만 18세를 넘긴 학생들에 한해 예외규정을 학칙에 삽입해야 한다. 그렇다고 만18세를 기준 삼아 생년월일을 따져가며 정치활동의 가부를 판단하기도 애매하다. 같은 고3인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건 황당하다.

생애 첫 투표

솔직히 1~2학년과 3학년을 구분 짓는 것도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다. 학칙의 다른 내용은 모두 동일하게 적용받는데, 정치활동에 관한 것만 학년별로 차이를 둔다는 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실상 기성세대가 '색안경'만 벗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 듯싶기도 하다.

처음 선거 연령을 낮추자고 했을 때, 전가의 보도처럼 '학교가 정치판이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교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휘둘리게 되고, 결국 면학 분위기가 훼손될 거라는 지적이다. 정치란 '어려서 배워서는 안 되는 나쁜 것'으로 비춰졌다.

선거 교육을 실시하라는 공문은 하루가 멀다고 내려오지만, 휴업 중인 학교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찮다. 교육부의 발표대로 내달 6일에 개학한다고 해도, 제대로 교육을 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4.15 총선이 고작 9일밖에 남지 않은 때에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작년 선거법 개정을 앞둔 즈음, 아이들의 표정은 소풍을 앞둔 유치원생마냥 설렘으로 가득했다. 한 아이는 투표권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성인 인증' 삼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는 주민등록증 발급 여부를 두고 서로 티격태격하더니, 투표권이 바통을 넘겨받은 모양새가 됐다.

'어린 후배들을 대의 하겠다'며 짐짓 으스대기도 했다. 혹시 마음에 드는 후보와 정당이 있다면 대신 뽑아줄 수도 있다며 투표권을 무슨 특권인 양 뻐겼다. 부러워하는 친구들 앞에서 투표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둥, 투표하는 장면을 찍어 보내주겠다는 둥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렇듯 뜨거운 화두였던 선거에 대한 관심이 순식간에 시들해져 버렸다. 4월 15일을 자신의 생일인 양 들떠 있던 아이들도 이젠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코로나19의 확산 탓만은 아니다. 이구동성 선거 관련 뉴스를 접할수록 선거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 개정된 선거법의 내용만큼은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복잡한 계산법까지는 몰라도, 표의 비례성을 높여 소수 정당의 의석을 보장한다는 개정의 취지를 모르는 경우는 드물다. 생애 첫 투표이니만큼 관련 뉴스를 꼼꼼히 챙겨본다는 아이가 많다.

'진흙탕 개싸움'

아이들은 일찌감치 선거판이 '진흙탕 개싸움'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아직 출마한 후보자가 누군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주위로부터 무조건 몇 번을 찍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어이없어 했다. 선거가 애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아귀다툼 같다고 꼬집었다.

선거에 대한 아이들의 조롱은 여와 야, 두 거대 정당이 만든 '비례 정당'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아이들은 우선 다른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부터 물었다. 전 세계에서 지지하는 정당 대신에 정강이 뭔지도 모르는 유령 정당에 투표하는 나라가 또 있느냐는 거다.

선거가 끝나면 곧장 해산될 것임을 공공연히 밝히는 정당도 과연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아이도 있었다.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 정당은 해산된다고 배웠는데, 그렇다면 '비례 정당'은 설립 자체가 무효 아니냐고 반문했다.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필요하다는 거다.

아이들은 두 거대 정당을 두고 '적인 듯, 적 아닌, 적 같은' 관계라고 규정했다. 서로에게 삿대질해대지만, 볼썽사나운 싸움이 계속될수록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소수 정당들은 시나브로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비례 정당'의 등장으로 이내 선거법 개정의 취지가 무력화됐다. 아이들은 개정된 선거법에서 남은 거라곤 선거 연령이 만 18세로 낮아진 것뿐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기득권은 결코 스스로 내려놓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거는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는 주위 어른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한 아이는, 대뜸 지금 국회의원들도 모두 '꼼수'로 당선된 거냐고 물었다.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더 나빠졌을 리는 없을 테니, 4년 전엔 선거판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상상이 안 간다고 말했다.

그는 '꼼수'로 당선된 국회의원에게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여야를 떠나 자신들 손으로 만든 법을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니 누가 당선되든 똑같겠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첫 투표의 설렘이 정치 혐오로 바뀌는 건 순간이다.

민망하고 두렵다
 

선거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현수막. 시민들의 항의로 이내 철거되었지만, 이를 본 아이들은 선거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에 비난을 퍼부었다. ⓒ 서부원

 
한편, 선거를 오로지 승패의 싸움으로 다루는 무책임한 언론 탓이 크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당과 후보자의 정책과 공약에 대한 기사 대신, 여론조사 지지율만 강조하고 있어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는 거다. 그래선지 선거를 '게임'처럼 즐기는 아이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사실 선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건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시민들의 문제 제기로 불과 며칠 만에 철거되긴 했지만, 얼마 전 시내 곳곳에 여론조사 결과를 믿지 말고 무시하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나붙기도 했다. 여론조사를 '적폐'로 단정한 글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걸 봤다는 아이들 중에 현수막을 누가 내걸었는지를 묻는 경우는 없었다. 도리어 여론조사의 조작 가능성이 있다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고 반문했다. 불신을 조장하는 행태가 이어지면서, 아이들은 편법과 불법이 난무하는 선거판에 시나브로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교무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는 홍보물의 큼지막한 글귀가 무색하다. 선거가 '아사리판'이 돼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아이들에게 선거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투표용지로 그냥 종이학이나 접어야겠다는 조롱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선거 자체가 희화화한 마당에, 아이들이 투표의 '효능감'을 기대하기란 애초 힘들 것 같다. 그보다 정치 혐오를 막는 게 급선무로 여겨진다. 수업 시간에 선거법이 개정되면 고등학생 유권자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마련될 것이라고 확언했는데,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선거 교육을 한답시고 아이들 앞에 선다는 게 솔직히 민망하고 두렵다. 이럴 거였다면, 선거 연령을 낮춘 게 오히려 패착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당과 후보자 간의 정책과 공약을 꼼꼼히 비교하도록 지도한다는 교육 자료의 내용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선거 교육을 담당한 교사로서 '비례 정당'의 설립을 승인해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묻고 싶다. 정강조차 없는 유령 정당에 투표하도록 만들어 놓고선, 아이들에게 대체 뭘 가르치라는 건지 모르겠다. 선거 교육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는 옆으로 가면서 아이들은 앞으로 가라는 바닷게의 우화가 자꾸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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