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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옆에 상드가 있었다, '빗방울 전주곡'의 주인공

[사연 있는 클래식] 프레데리크 쇼팽 4탄

등록 2020.03.30 08:32수정 2020.03.3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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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기사 쇼팽이 숨겨둔 왈츠, 이별이 너무 슬퍼서에서 이어집니다. 
 
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꽃을 더듬는 내 손 거두지 않는다.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에.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견뎌 낸다.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 조르주 상드의 '상처'
 
상드의 이 시는 그녀의 인생을 관통하는 시처럼 보인다.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돌아서는 상드는 사랑할 때 모든 걸 다 쏟아부었다. 그러니 설사 이별이 온들 미련도 회한도 없다. 반면에 상드와 사랑했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후폭풍을 심하게 앓았다.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들라크루아. 1838. 코펜하겐 오르드룹고르 박물관) ⓒ 코펜하겐 오르드 룹고르 박물관

 
이는 쇼팽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지를 입고, 시가를 피우고, 글을 쓰며, 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린 상드는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정작 상드를 만난 잘난(?) 남자들은 그녀의 지적인 면모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러니 아마도 그녀에 대한 비난은 그녀 곁에 가지 못하는 남자들의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에게 일방적인 파혼 선언을 당한 쇼팽은 휘청거렸다. 이런 그의 마음을 상드에게 털어놓곤 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한다고 했던가? 쇼팽은 어느덧 상드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아이가 둘 딸린 이혼녀와 만난다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불편한 쇼팽은 상드와 함께 파리를 떠나 스페인 마요르카섬으로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열흘 먼저 상드가 먼저 출발했고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대인 페르피냥에서 상드는 아들 모리스, 딸 솔랑주와 함께 쇼팽을 기다렸다.

드디어 쇼팽이 도착했다. 이때 쇼팽은 상드의 자녀들을 처음 만났고, 당시 솔랑주는 9살이었다. 훗날 상드와 쇼팽이 이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솔랑주. 1838년 11월 7일, 그들은 증기선 마요르킹 호를 타고 마요르카섬으로 향했다.
 
즐거운 항해였다. 초승달이 수평선에 걸려 있는 바다는 잔잔했다. 키를 잡은 항해사는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불렀다.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반주 삼아……. 스페인풍의 뱃노래. 쇼팽과 나는 어깨를 기대고 선창에 앉아 사공의 노래를 들었다.
- 상드의 회고록 중
.

쇼팽의 Op.57 뱃노래는 이때 들었던 항해사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고, 배에서 본 수평선에 걸린 초승달은 녹턴 G장조 Op.37-2에 묘사되었다.
 

쇼팽 초상화(글라크루아,1838. 루브르 박물관) ⓒ 루브르 박물관

 
다음 날, 마요르카의 중심 도시인 팔마에 도착했다. 문제는 숙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당시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피난을 온 본토 사람들로 팔마는 이미 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여인숙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송 방'이라는 별장을 임대할 수 있었다. 날씨는 온화하고 하늘은 화창했다. 여기서 쇼팽은 팔마의 마주르카로 알려진 op.41-2, e단조 스케치를 완성한다.

별안간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폭우가 쏟아지고 강풍이 휘몰아쳤다. 병약한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상드는 팔마에서 내로라하는 의사 세 명을 불렀다. 진단명은 폐결핵. 의사 세 사람 모두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설상가상 의사들은 폐결핵 환자가 있다고 보건당국에 알렸고, 건물주는 노발대발하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난리를 쳤다. 게다가 건물주는 건물 내부와 정원의 소독 비용, 침대와 주방용품의 소각 비용. 새로 살 가구까지 엄청난 금액을 청구했다.

법률상 결핵은 법정 전염병으로 폐결핵 환자가 만진 모든 물건은 소각하도록 법이 정하고 있었으니, 건물주의 무리한 청구는 아닌 셈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결핵 환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결핵 청정 지역에 결핵 환자가 생겼으니, 이 공포는 혐오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발데모사에 있는 카르투하 수도원에 거처를 얻었다. 가구는 낡아 빠지고 먼지투성인 곳이지만, 상드의 표현에 의하면, '시인과 화가가 이제껏 꿈꾸어 온 모든 것을 자연은 이곳에 이루어 놓았다'라고 기록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상드를 향해 '바지 입은 늙은 말괄량이'라 손가락질했고, 상점들은 상드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았다.

상드는 멀리까지 가서라도 단백질이 풍부한 식료품들을 사날랐고 극진히 쇼팽을 간호했다. 밤이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스페인에서 발간되는 신문 잡지에 원고를 연재했다. 화산 같은 에너지로 상드는 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냈다.

상드의 헌신적인 간호에 쇼팽은 차차 회복했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해 왔던 24개의 전주곡을 마침내 완성했으며, 폴로네이즈 제4번 op.40-2, 스케르초 3번 op.39, 마주르카 등 많은 곡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특히 빗방울 전주곡의 탄생은 유명하다.

상드가 식료품을 사기 위해 시내를 나갔다가 폭우를 만났다. 둑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갔다. 상드가 탄 마차가 수렁에 빠지자 마부는 달아났고, 장장 12킬로를 6시간 걸어서 맨발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상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쇼팽은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상드를 본 쇼팽의 첫마디는 "죽은 줄 알았어. 죽은 줄……."
 
그날 밤 완성 시킨 작품의 주제가 설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였을망정 그 빗물 소리는 그의 음악 세계에서는 그의 가슴을 향하여 하늘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방울이었나 봅니다.

쇼팽은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창조적 악상으로 승화해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상드는 그의 저서에 기술했다.

마요르카 날씨는 악화하였고, 쇼팽의 몸도 다시 나빠졌다.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상드는 짐을 챙겨 1839년 2월 13일 이 섬을 떠나는데, 이 과정이 눈물겹다. 쇼팽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소각해야 했으므로 쇼팽은 다 부서진 침대를 배에 실었다. 설상가상 그 배는 돼지를 실어나르는 배였고. 결핵에 걸린 쇼팽은 사람들과 격리되어 지독한 냄새가 나는 돼지 우리 헛간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쇼팽은 기진맥진하여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쇼팽이 사경을 헤매는 사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상드는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 군함 사령관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명작가인 상드의 간청은 받아들여졌다. 군의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 쇼팽은 마르세유에서 요양한다.

따뜻한 마르세유에서 쇼팽은 상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더욱더 깊어졌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천사 상드'라는 표현을 쓰면서 상드에 대한 소문은 사실과 다르고 그녀가 얼마나 인정 많고 자상한 여인인지 모른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물고 쇼팽의 건강이 나아지자 그들은 상드의 고향인 노앙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부터 상드와 헤어지기 전까지 약 9년 동안 쇼팽은 매해 파리(겨울)와 노앙(여름)을 오가며 생활했으며, 녹턴 G장조, 소나타2번 B플렛 단조, 발라드4번, 폴로네이즈 6번 영웅과 같은 수많은 명곡이 노앙에서 탄생했다.

쇼팽은 사람들에게 상드와의 관계가 연인보다는 예술적 동지로 알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파리에서 각자의 아파트를 얻었다. 파리에는 그의 제자가 되길 희망하는 귀족 자녀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쇼팽은 레슨비와 출판비 등 수입이 적지 않았지만, 최고급 취향을 가진 탓에 지출이 많았다.

명품 옷과 명품 장갑, 좋은 마차, 또 건강상의 이유로 수족처럼 움직여줄 하인들이 필요했다. 이사 광인 쇼팽은 돈만 생기면 이사를 했고, 이렇게 느슨한 경제 관념 때문에 많은 수입에도 돈이 모이지 않았다.
 

쇼팽과 상드의 잘린 이중초상화를 현대 기법으로 복원한 그림.(들라크루아) ⓒ 쇼팽박물관

  
노앙에 머무는 동안 상드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자주 초대했는데, 주로 화가인 들라크루아, 소설가 발자크, 리스트 등 대부분이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노앙의 저택에 모여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주었고, 밤이면 쇼팽의 연주를 들었다.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상드의 이중초상화를 그렸고, 발자크는 상드에게서 들은 리스트와 그의 연인 다구 백작 부인의 러브스토리를 듣고 착안하여 '베아트릭스'를 썼다.

또 쇼팽을 천사로 리스트를 악마로 쓴 소설 위르쉴 미루에(1841)를 발표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과 상드의 이중초상화는 반으로 잘려 현재는 각각 다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뤽상부르 궁 도서관 천장에 단테를 호메로스에게 소개하는 비르길리우스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단테의 모습에 쇼팽을 그려 넣기도 했다.

상드는 쇼팽에게 작곡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안정된 환경을 제공했고, 쇼팽은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을 상드에게 의존했다.
 
그의 창작은 자발적이고 마치 기적 같다. 그는 일부러 찾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듯 저절로 찾아낸다. (중략) 그러나 그때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애처로운 노동이 시작된다. 무수한 노력이 이어지고 이럴까 저럴까 하는 망설임, (중략) 자기 기준에 맞는 명확한 선율을 다시 찾아내지 못하면 속이 상해서 절망에 빠지곤 했다. 온종일 방에 처박혀서 울기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하고, 펜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한 마디를 백번쯤치고 또 치고. (중략) 악보 한 페이지를 쓰는데 6주를 고심하며 이렇게 저렇게 고쳐도 결국 마지막으로 완성된 악보는 맨 처음 쓴 대로였다.
- 상드의 내 인생 이야기 중.
 
1841년 4월, 쇼팽은 파리 플레이엘 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3년 만에 열리는 연주였다. 사실 쇼팽은 평생 공개 연주회를 30번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무대 울렁증이 있기도 했거니와 작곡 출판으로 수입이 있었고, 쇼팽의 연주를 사적으로 독점하려는 귀족들의 비호 아래 귀족 자녀의 개인 교습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을 올렸기 때문이다.

상드를 만나고는 경제적인 문제를 상드가 해결해 준 것도 원인이 되었다. 연주회는 엄청난 성공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연주회 때문에 리스트와 쇼팽의 우정은 결국 끝나버린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참고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 - 유강호, 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 - 제러미 니콜라스/ 임희근 옮김. 포노.
내 친구 쇼팽 - 프란츠 리스트/이세진옮김. 포노.
쇼팽을 찾아서 - 알프레드 코르토/ 이세진 옮김. 포노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
#피아니스트와 작가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 뿐이다.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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