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n번방 사건'에 대한 어느 90년대생 남성의 반성

[주장] '억울하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에겐 성찰과 반성이 절실하다

등록 2020.03.26 10:42수정 2020.03.26 17:56
293
원고료로 응원
 

'우리 모두는 가해자였다'는 구호를 제안합니다 ⓒ needpix

 
텔레그램을 이용한 범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SNS상에서 해시태그 운동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쉽게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얼마전 읽은 책에서 "너무 쉬운 공감을 의심한다"라는 구절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아는 것도 많지 않고, 글솜씨도 변변찮은 제가 이런 글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봅니다. 저는 1993년생입니다. 이 글은 제 또래, 90년대에 출생한 남성들을 향해 쓰였습니다. 부디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들 계신가요? 실시간 검색어에 '텔레그램 탈퇴'가 오르내린 건, 접속한 사람이 그 정도로 많다는 뜻일까요. 26만 명,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네요. 저는 이글을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 대다수의 남성분들에게 보냅니다.  어떤가요? 성착취를 당한 여성들을 가엾게 여기며 분노하고 있나요? 혹은 해시태그 운동에 동참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나요? 아니면 보지도 않은 영상 때문에 모든 남성이 싸잡아 욕을 먹어 불쾌해하고 있나요?

다소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불쾌한 마음을 품을 자격이 있을까요? 혹은, 분노할 자격이 있을까요? 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남성 모두는 잠재적 가해자였음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우리 90년대생 남성은 특별하지 않은 한, 누구나 여성혐오를 자행하며 살아온 남성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래왔습니다. 여성혐오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김치녀와 된장녀, 김여사나 맘충과 같은 용어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술자리에서 성매매 경험담이나 주변인 외모품평이 오르내려도, 잠자코 듣는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휴가를 나가는 소대원에게 성매매하지 않을 것을 교육할 때 "여자는 사먹는 거 아니야"라는 말도 입에 올리곤 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성혐오를 수도 없이 해 왔을 겁니다. 아마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훨씬 많을 겁니다.

네, 몰랐습니다. 하지만 무지는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무언가 잘못을 했다면, 그것을 반복하지 않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여전히 불쾌한가요? 아니, 억울한가요? 나는 맘충이라는 말도 안 쓰고 일베도 하지 않고, 여성들에게 친절하고 성매매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데, 왜?라는 생각이 드나요? 말 그대로 '잠재적 가해자'로 몰려 불쾌한가요? 잠재적 가해자로 몰린 우리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실질적 피해자입니다.

항상 그래왔습니다. 여성들 때문에 취업이 안 된다고 생각하나요? 공기업을 포함한 여러 기업에서 고의로 여성을 탈락시킨 채용 성차별이 자행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군대 때문에 커리어가 늦어져 불만인가요? 수많은 여성들이 결혼/출산/육아로 인해 커리어의 단절을 겪습니다. '한남'이라고 싸잡아 욕먹으니 좋은 감정이 들래야 들 수가 없나요? 그 이전에 김치녀와 된장녀를 비롯한 00녀는 수도 없이 오르내렸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맘충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나요.

이런 사회가 지금의 한국 사회입니다. 작가 그레이슨 페리의 표현을 빌려오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를 이야기하는 것은 '물고기들을 상대로 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만연해 있기 때문에 모두들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 글은 여러분을 가르치려 드는 것도, 제가 잘났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기점으로 우리 모두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텔레그램 n번방은 우리 모두의 침묵과 함께 자라온 것입니다. '국산 야동'으로 소비되던 불법촬영물, 소라넷, 버닝썬 사건 등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그릇된 성 인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릇된 성 인식, 강간 문화, 여성 대상화, 만연한 여성혐오가 이 사태를 만든 것입니다. 노골적인 혐오 발언은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여성혐오를 하면서 살아왔을 겁니다. 대상화도 많이 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침묵으로 동조한 것입니다. '나는 아니니까'에 숨어 침묵하지는 않았나요? 그 침묵이 이 사태를 만든 근본 원인입니다. '나는 성매매 안 했으니까', '나는 텔레그램 성착취 영상 안 봤으니까'라는 말 뒤에 숨지 맙시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였습니다.

이번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국민 청원이 진행중입니다. SNS상에서 동참을 권유하는 글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하는 이들의 성별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이 역시 우리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성들에게는 이 사건이 그저 '남일'로 치부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남성들에게는 '나는 안 봤으니까'라는 말로 쉽게 비껴갈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또한 젠더 권력이 작동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발을 뺄 수 있는 것 자체가 우리 남성의 특권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였다'라는 고백은 이승한 작가의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그냥 가해자였다"라는 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말이 과거형이 되기 위해서는 깊게 뿌리 내린 강간 문화, 침묵의 카르텔, 여성혐오를 해소해야 합니다. 여전히 불쾌하고 억울한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에 발을 들이기를 소망합니다. 그것만이 또다른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또래 남성분들께 '그 방에 있던 너희는 살인자다'가 아닌 '우리 모두는 가해자였다'라는 구호를 제안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성찰과 반성입니다. 제가 잘났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은 동조와 같습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텔레그램 n번방 가해자 엄벌과 피해자 구제를 촉구하며 글을 마칩니다.
댓글29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6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AD

AD

인기기사

  1. 1 "용퇴" 요구까지 나온 윤석열, 자업자득이다
  2. 2 신천지에서 딸이 돌아왔다, 전쟁이 시작됐다
  3. 3 "불륜설 흑색선전" 울먹인 이언주, 박재호 후보 고소
  4. 4 추미애, '윤석열 검찰-채널A 유착' 보도에 감찰 시사
  5. 5 한국과 같은 날 시작했는데... 미국, 왜 이렇게까지 됐냐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