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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서 7시 사이, 발코니에서 만나는 거 어떨까요

[주장] '서로를 지키는 방법'이 '거리'여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다

등록 2020.03.27 18:45수정 2020.03.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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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전 세계가 감염 차단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 unsplash

  
'사회적 거리두기'를 검색하던 중 '레이저 거리측정기'라는 상품을 보게 됐다. 본체에서 레이저를 발사하고 그 레이저가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거리를 산출하는 방식의 거리측정기.

온 세상이 코로나19의 영향력 아래 있다 보니 잠시 만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지근거리의 사람에게 시뻘건 레이저를 발사해 거리를 측정하고 2m 내로 접근하지 못 하도록 하는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이한 장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서로를 지키는 거리'라 칭하며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감염 통제 조치 혹은 캠페인을 이르는 말'이라 정의한다. 상세지침으로는 행사나 모임 참여 자제, 부득이하게 사람을 만나더라도 2m 이상 거리두기, 악수는 팔꿈치로 대신하기, 마주 보지 않고 일정 거리 두고 식사하기, 퇴근 후에는 약속을 잡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등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사회적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며 '물리적 거리두기'(physical distancing)라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의 교체는 말장난에 불과하지 않을까. 어찌 됐든 거리를 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물리적 거리두기란 필연적으로 사회적 단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캐네디언에 미친 영향

며칠 전 나무 자재를 사기 위해 건축자재 판매점에 들른 적이 있다. 그런데 직원에게 물건 위치를 물으러 갔던 남편이 돌아와 전한다. "나한테서 떨어져요. 2m 거리두기 몰라요?" 그 직원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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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다 마주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지나가 버렸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다정히 인사를 건네는 캐네디언의 성향을 좋아했었는데, 분명 이건 코로나19의 영향일 터였다. ⓒ unsplash

 
지난 주말에는 산책하다 마주친 할머니에게 "Hi, How are you?"하고 말을 걸었지만 돌아온 것은 묵묵부답이었다.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겠거니 했다. 다음번 마주친 사람에게 또 한 번 인사를 건넸지만 다시 쌩하니 지나가 버렸다. 정말이지 생소한 일이었다. 누구든 눈만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고 모르는 사람끼리라도 다정히 인사를 건네는 캐네디언의 성향을 좋아했었는데, 분명 이건 코로나19의 영향일 터였다.
  
15년을 캐나다에 살면서 경험한 캐네디언들은 배려와 존중, 친절함과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민족이 모여 사는 이민국가, 다문화국가인 캐나다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사회를 지탱해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이기에 아이들 학교에서도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라 가르친다.

물론 자재를 사러 간 곳에서도 여전히 유쾌한 농담을 하는 직원이 있었고, 그날 산책길에서도 변함없이 웃으며 눈인사를 건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은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일상이 회복되면 사라질 일시적인 해프닝이라 여겨본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처럼 사람들을 예민하게 만들었지만, 그로 인한 단절감과 공허함을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어떤 식으로든 이웃과의 연대를 이어가고자 하는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는 것.

'서로를 지키는 거리'의 역설
  
<월스트리트저널>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Can You Socialize While Social Distancing? Sort of)이라는 제목의 3월 26일 자 기사에는 다음의 사례가 소개되었다.

로렌 우드는 최근 이웃의 누군가가 현관문에 붙여놓은 초대장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이웃님! 사회적 거리는 지켜야겠지만 그렇다고 교제를 할 수 없는 건 아니지요. 집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기로 해요. 음료수를 들고나와 발코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어떨까요? 내일 5시에서 7시 사이 아무 때나요. 적당히 떨어진 채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상쾌한 저녁 공기도 느껴봐요.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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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피해로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전 세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긍정의 힘을 모으고 있다. ⓒ unsplash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지에서 발코니가 코로나19 극복의 장이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집에만 갇혀 있어 답답하고 우울해진 누군가가 발코니로 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거기에 다른 이가 화음을 넣고 또 다른 이들은 냄비 뚜껑을 두드리거나 손뼉을 치며 한 편의 감동적인 '플래시몹'(flash mob)을 만들어낸다. 화선지 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위로와 격려가 세상 속으로 번져간다.

온라인상에서라도 연대감을 갖기 원하는 이들은 '하우스 파티'(House party) 같은 앱을 찾기도 한다. 그룹으로 비디오 채팅을 할 수 있는 앱으로, 최대 8명의 인원이 한데 모여 게임도 할 수 있고, 온라인상에 있다면 친구의 친구들까지 참여해서 어울릴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집돌이 집순이'가 되어가는 요즘,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는 위시리스트가 자꾸만 늘어간다. 옆집 할머니와 포옹하며 아침 인사도 나누고 싶고,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싶고, 지인들과 한데 모여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고도 싶다.

팔꿈치로 악수하기나 마주 보지 않고 식사하기와 같이 참으로 이상스러운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닌, 다가오는 누구든 힘껏 껴안아 주는 '프리허그' 캠페인이 다시 가능해지는 그날, 거리로 나가 곰돌이 탈이라도 뒤집어쓰고 사람들과 포옹을 나누고 싶다. 

서로를 지키는 거리. 꽤 그럴듯한 표현이고, 이 시기에 지켜야 할 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서로를 지키는 방법'이 '거리'여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다. 본디 서로를 지키는 일이란,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일이란, 얼굴 대고 마주 앉아 침도 좀 튀겨가며 생각을 나누고 교감해야 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남편과 함께 세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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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째 손 맞잡고 함께 걷는 한 남자, 그리고 꽃같고 별같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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