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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전의 시대착오적 오류... 만약 내가 작가였다면

[서른 넘어 읽는 고전] 오노레 드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

등록 2020.04.02 16:09수정 2020.04.0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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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읽는 고전'은 30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 독서인이 뒤늦게 문학 고전을 접하며 느낀 재미와 사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1년 전부터 서양미술사를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 여태껏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미술의 세계를 접하며, 예술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인간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다.

하지만 모든 예술작품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도무지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는 작품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누드화다. 대상이 남자건 여자건 누드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적은 거의 없다. 그저 '어째서 미술작품 속 남자들은 하나같이 몸짱일까?' '어째서 벌거벗은 여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조금 생기다가 말뿐이다.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을 돌아다녀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여성 누드를 볼 수 있다. 그중 제일 많이 그려진 인물이 바로 비너스, 즉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일 것이다. 서양 사회에 뿌리 깊은 관음증 문화의 증거가 바로 '잠자는 여자'다. 신분이 높은 여인들은 그런 그림의 모델을 할 수 없었으니 모델 대부분은 그림 주문자의 정부이거나 창녀였으나, 여성의 알몸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검열은 피하고자 한 사람들을 위해 '비너스'라는 신화의 옷을 입혀놓았다. -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조이한 지음, 한겨레출판사(2019)
 
'미지의 걸작'의 충격적 오류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녹색광선(2019) ⓒ 녹색광선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는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여인'을 실제로 만나 그녀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화폭에 담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 부유한 천재 화가 프렌호퍼가 등장한다.

사실 그에게는 십 년 동안 작업에 매달렸지만 아직 미완성 상태로 숨겨놓은 그림이 한 점 있다. 한동안 그는 그림을 완성했다고 믿었으나,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몇몇 오류를 발견하고는 크게 좌절하고 있었다.

그가 그린 여인은 분명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혹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지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을 실제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럼 확실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그린 여인이 가장 완전무결한 여인인지 아닌지.

그러던 중 우연히 그는 젊은 무명화가 '니콜라 푸생'을 만나게 된다. 프렌호퍼의 미완성 작품에 관한 사연을 듣게 된 푸생은 '봄날처럼 예쁜' 자신의 아름다운 연인 질레트가 어쩌면 프렌호퍼가 찾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그의 연인 질레트가 위대한 화가 프렌호퍼를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그는 프렌호퍼 밑에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고 돈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푸생은 질레트를 설득하고, 그녀를 프렌호퍼에게 데려간다.


그는 화가로서 자신의 '미래의 영광'을 위해 질레트를 이용한다는 것과, 다른 남자 앞에 자신의 연인을 모델로 세운다는 것에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지만, 죄책감보다 화가로서의 성공에 더 마음이 기운다. 질레트는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푸생에게 실망하고, 수치심도 느끼지만 결국 사랑하는 연인 푸생을 위해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자" 그가 말했다. "이 여자는 세상의 모든 걸작들에 비할 만하지 않나요?"

프렌호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질레트는 강도들에게 유괴당해 노예 상인 앞에 끌려온 순진하고 겁먹은 조지아 처녀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태도로 거기에 서 있었다. 수줍어하는 듯한 홍조가 그녀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고,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두 손을 허리 곁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수치심에 가해진 폭력에 저항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푸생은 이 아름다운 보물을 그의 창고에서 꺼낸 것에 절망했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리고 젊음을 되찾은 노인의 눈을 보자 숱한 양심의 가책으로 심장에 고통을 느꼈다. 노인의 눈이 화가의 습관으로 이 젊은 여인의 옷을 벗기고 가장 은밀한 형태까지 읽어냈기 때문이다. (120~121쪽)

만약 이 소설을 고쳐 쓴다면

소설의 시작부터 펼쳐지는 발자크의 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와 철학, 시대를 앞서 간 세련된 감각에 연신 감탄하며 읽던 나는, 질레트의 등장과 동시에 내가 받은 감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소설의 말미에 이르자, 내 안에서 대문호 발자크의 훌륭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발자크는 분명 질레트가 느끼는 '수치심'과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을 보았지만, 곧 그녀의 연인 푸생과 '예술'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작가는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을 한 남자의 '소유물'에 난 흠집 정도로 치부해버렸고, 그녀가 받은 상처보다 '자기 여자'를 잃은 남자의 절망을 더 부각시켰다. 위대한 예술 앞에서 질레트의 상처와 수치심은 너무나 사소했다.
 
서양미술사에서 여성 납치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간과 폭행과 납치가 아름다운 예술작품 속에 녹아 있다. (…)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누군가는 맘껏 상징과 비유를 썼고, 거기에서 약자들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만들어지든 말든, 그들이 상처를 받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건 그저 '예술'이라고 했다. (…) 예술은 예술로 받아들이라고 수천 년에 걸쳐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겨 비판적으로 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조이한 지음, 한겨레출판사(2019)

1831년에 쓰인 이 소설이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었다면, 지금을 사는 나에게 이 소설은 다른 의미에서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이 소설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버리기엔 아깝고 갖고 있기엔 꺼림직한 낡은 고전들을 고쳐 써보는 작업을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의 중심인물,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감독은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각색해 1991년 <누드 모델 La belle Noiseuse>을 만들었다. 자크 리베트 감독은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질레트'라는 인물을, 화가에게 굴복하지 않고 "내가 찾겠어요. 내 자리, 내 움직임, 내 시간"이라고 말할 줄 아는 조금 더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물 '마리안'으로 변신시켰다. '질레트'가 '마리안'이 되기까지 무려 160년이 걸린 셈이다.

발자크의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 조금 낡은 구석이 있지만, 아주 손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버리기 아까운 빛나는 부분들이 많다. 만약 발자크가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떨까? 그가 정말 위대한 작가라면, 그의 소설 속 프렌호퍼처럼 발자크도 자신이 이미 완성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 속 '몇몇 세부에서 확실하게 오류를 범했'다고 느껴 싹 다 뜯어고치고 싶어지지 않을까?

미지의 걸작

오느레 드 발자크 (지은이), 김호영 (옮긴이),
녹색광선, 2019


#서른넘어읽는고전 #서평 #미지의걸작 #발자크 #녹색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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