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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공백이 괴물 낳았다

아기 성착취 영상 다크웹 운영자 고작 징역 1년 6월... 제대로 양형기준 마련해야

등록 2020.03.31 11:59수정 2020.03.3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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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빈 검찰 송치, 강력한 처벌 촉구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 등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 촬영을 강요해 만든 음란물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호송차에 태워져 검찰로 송치되는 가운데,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요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n번방 사건'이 대화 소재로 자주 올라오곤 한다.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들썩이는 지금,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대표적이다.

인식적인 측면에서 성찰할 부분도 많아 보이지만, 정책의 영역에서도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법의 양형기준을 명확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은 정도가 자극적이라는 점만 다를 뿐, 한국 사회에서 늘 벌어지고 있었던 디지털 성범죄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양형기준 마련과 관련 정책 개선 시급해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시급하게 바뀌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양형기준 마련'이다. 양형기준이란 법관이 형을 정함에 있어 참고할 수 있는 기준을 말한다. 보통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법 감정과 동떨어진 판결이 나오는 것도 양형기준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다. 대표적으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일종이었던 '다크웹 사건'에서 운영자가 징역 1년 6개월형만 받은 사례가 있다. 

앞서 양형기준을 설정하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이하 양형위)는 2020년 상반기에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설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이번 'n번방 사건'이 일어나면서 더더욱 그 필요성이 강조되는 중이다. 양형위는 양형기준을 두고 "범죄의 발생빈도가 높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의 양형기준을 우선 설정"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양형위는 2019년에도 여러 차례 전체 회의를 열어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논의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 중 아동·청소년이 다수 포함된 만큼 양형위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이른 시일 내에 의결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사실 디지털 성범죄 자체에 대한 양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합의는 사법부 내에 생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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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글고 왼손에는 법전을 안고 있다. ⓒ 권우성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백광균 판사가 디지털 성범죄, 특히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처벌과 양형에 대하여 발표한 자료(대법원 양형위원회, '디지털 성범죄와 양형', 양형연구회 심포지엄)에 따르면, 2018년 1월부터 2019년 4월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선고된 164건의 관련 판결문을 전수조사하여 분석한 결과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실형을 받은 비율은 10%밖에 안 되는 반면 집행유예는 41%, 벌금형은 46%나 나왔다. 

양형기준만큼 관련 정책 개선이 필요하다.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2018년 내놓은 보고서 <디지털 성범죄 대응 정책의 운영실태 및 개선과제>에 따르면 2011~2016년 불법촬영 및 유포 혐의로 입건된 이후 구속수사를 받는 비율은 2.1~2.9%로 매우 낮다. 입법조사처는 형사소송법 198조에 따라 피의자에 대한 수사를 불구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불구속 수사가 이뤄지는 경우 피해 촬영물에 대한 증거의 은닉, 폐기, 나아가 2차 유포의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같은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김영미 변호사 또한 디지털 성범죄는 2차 피해가 매우 심각하며 피해자의 23%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촬영물이 유포된 사건의 비율도 4.18%(2011~2016년)에서 10.7%(2017년)로 증가했다. 디지털 성범죄 대응 정책이 확실히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정부의 확고한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국회 입법조사처는 위 보고서에 따라 불법 촬영물을 유포한 자에 대해 강력한 초동수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 불법 촬영물 등을 은닉하거나 폐기하고, 사후에 온라인상 유포할 수 있는 위험이 높은 경우 구속 수사의 목적과 침해되는 이익 간의 비례성을 위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피의자를 구속 수사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음. 

- 나아가 국내인이 해외 서버를 통해 불법 음란, 유흥 사이트를 운영하고, 이러한 사이트의 유인을 위해 피해 촬영물을 게시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이들 사이트 운영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수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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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룡 경찰청장은 24일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에 대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영상의 생산·유포자는 물론 가담·방조한 자도 끝까지 추적해 검거하겠다"고 밝혔다. ⓒ 청와대

  
지난 24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n번방 관련 청원 5건에 대해 민갑룡 경찰청장과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응답했다. 해당 청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답변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안의 심각성과 긴급함에 대해 정부가 공감한 셈이다.

답변 영상에서 민갑룡 경찰청장은 "'박사방' 사건은 아동·청소년과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잔인하고 충격적인 범죄"라며 "검거된 운영자 조주빈 뿐 아니라 '박사방'의 조력자, 영상 제작자, 성착취물 영상을 소지‧유포한 자 등 가담자 전원에 대해 경찰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엄정하게 대처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 장관은 유관기관과 협력하여 디지털 성범죄 대응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 마련을 포함한 2차 디지털 성범죄 종합대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지속해서 문제 제기되어 오던 부분에 대해 정부가 엄정 대응할 것임을 다짐한 것과 다름없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관련 정책을 개선하고 디지털 성범죄 전반에 대한 양형기준 설정에 나서야 한다.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여성긴급전화 1366,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텔레그램대화방성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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