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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위해 장기기증 10분만 미루자는 의사, 그는 영웅일까

[리뷰] tvN 목요스페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20.03.29 16:05최종업데이트20.03.2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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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 생활> 포스터 ⓒ tvN

 
삐뽀삐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응급차가 멈춰 선다. 피흘리는 환자가 들것에 실려 나오고 의사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진다. 보호자의 울부짖음과 함께 낯선 의학용어들이 쏟아진다. 그게 아니라면, 숨막히는 정적 속에 수술 집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수술실 내부, 집도의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과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긴장감을 돋우는 차가운 의료기계음만이 가끔씩 정적을 깬다.
 
그동안 흔히 보아왔던 메디컬드라마의 전형적인 첫 장면이다.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채송화(전미도 분)와 양석형(김대명 분)이 별장에서 감전당한 사람을 돕는 것을 첫 신으로, 메디컬드라마의 전형을 무너뜨리며 신선함의 포문을 열었다.
 
기존의 메디컬 드라마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병원 내부의 권력 쟁탈전을 주요 소재로 삼아 매회 권모술수로 인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긴박감을 더하는 형식, 혹은 천재적인 의술과 함께 휴머니즘까지 장착한 영웅 의사 한 사람이 주축이 되어 감동신화를 이끌어내는 형식이 그것이다. 그 외에, 심각하게 부상 입은 환자의 모습이나 지나치리 만큼 상세한 수술 장면 같은 자극적인 영상,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의학상식과 용어들을 스토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재미 같은 것들이 대부분의 메디컬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특성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메디컬 드라마라 칭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어떤 명칭을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에는 '메디컬이라 쓰고 라이프라 읽는 우리네 평범한 삶의 이야기'라 쓰여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표현이다.
 
이 드라마는 다섯 명의 의과대학 동기들이 20년 후 한 병원의 의사가 되어 겪는 이야기들과 대학시절의 에피소드들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이며 진행된다. 그런데, 그중 재단 이사장의 막내아들인 안정원(유연석 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단 이사장 자리를 스스로 주전무(김갑수 분)에게 넘겨주면서 권력다툼의 싹은 애초부터 잘려나가고 없다.
 
그렇다면 메디컬 드라마의 두 번째 옵션, 이 다섯 명의 의사들이 영웅으로 그려지는 것일까? 영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그대로 빌려오자면, 그들은 확실히 영웅은 아닌 것 같다.

갖가지 디자인의 캐릭터 밴드에이드를 책상에 늘어놓고 아이 환자에게 어떤 것을 붙여줄까 고민하는 소아외과 의사 안정원. 자신이 돌보던 아이가 잘못될 때마다 신부인 형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고,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우는 그에게서 기존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벌 2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환자들을 도와온 '키다리 아저씨'가 그였다는 사실이 1회부터 밝혀지며, 차별화된 재벌2세로서의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진다.
 
1회에서 아들의 다스베이더 가면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로 수술을 집도하는 상황을 연출하며 단번에 자신이 유쾌한 캐릭터임을 알린 간담췌외과 의사 이익준(조정석 분). 3회에서는 자신에게 수술받고 퇴원했던 환자가 다음날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져 장기적출 수술을 받게 되자, 장기를 받으러 온 의사들에게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의아해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 아들이 다섯 살인데, 이름은 원준이고. 오늘… 어린이날이라 아빠랑 자장면 먹기로 했거든요. 근데 원준이… 앞으로 평생 못하게 됐어요, 그거. 우리 딱 10분만 있다가 시작해요. 애가 매년 어린이날마다 돌아가신 아빠 때문에 울면서 보낼 수는 없잖아요."
 
흉부외과 김준완(정경호 분)은 병원에서 한두번 쯤 마주쳤을 법한 정없고 싸가지 없는 의사다. 3회에서 그는 "우리 아이가 삼일 뒤에 결혼하는데 수술 다음주로 미루면 안되겠습니까?"라는 환자의 물음에 "안됩니다! 돌아가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하며 자리를 뜬다. 수술실 앞에서 "선생님, 그럼 크게 걱정 안해도 되는 거죠? 생명에 지장 있다거나…"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딸에게는 "그건 장담 못드리는 거구요. 수술할 땐 워낙 변수들이 많아서"라 말한다. 이처럼 대답하는 데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던 그가 후배에게 양복을 빌려입고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딸의 휴대폰 사진으로 밝혀진다. 사진 속에는 좋아하는 갈비탕 쿠폰을 손에 쥔 그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다.
 
막 수술을 마친 작디 작은 아가의 심장에 손을 대어 본 본과 실습생 장홍도(배윤성 분)와 장윤복(조이현 분)은 커진 눈으로 말한다. "교수님, 저 흉부외과 갈래요!" "그래, 뭐 좋은 선택들이다."시크하게 말하고 돌아서던 김준완은 장난끼어린 미소를 띠며 속삭인다. "쟤들 맘 바뀌기 전에 얼른 각서 받아놔."
 
본과 실습생 시절 같은 경험을 했던 김준완도 그랬다. "자두 만한 심장이 이렇게 힘차게 뛸 줄 몰랐습니다. 멈췄던 아기 심장을 교수님이 다시 뛰게 하셨어요. 교수님, 저 흉부외과 가겠습니다!" 왜 흉부외과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PC방에서 옆에 있던 선배가 가라고 해서라고 무심히 답했던 그도 과거 그들과 똑같은 경이로운 선택의 순간에 서 있었던 것이다.
 
혀를 내두를 만큼 빈틈없이 맡은 일을 해내고 후배들에게 차갑도록 엄격해서 '귀신'이라 불리는 채송화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보호자와 마주친다. "지 아들한테만 정신이 팔려갖고 지그 엄마는 아픈지 어짠지도 모르고 나가 죄인입니다."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아들과 신경교종 악성일지 모르는 어머니를 둔 사람이었다.
 
"아드님이 그런 상황인데 어느 엄마가 다른 데 신경을 쓰겠어요. 아무도 어머니 욕 못해요." 상담할 때도 자분자분 분명하지만 안타까운 목소리였던 채송화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때 남편에게 온 속없는 메시지에 감정이 폭발한 보호자는 "선생님, 시상 천지에 나같이 복없는 년이 또 있을까요? … 진짜로 내가 살고 싶은 마음이 손톱 만큼도 없고 죽고만 싶당게요." 통곡하며 주저앉는다. 엘리베이터가 마지막층까지 내려가도록 보호자 곁에 함께 주저앉아 등을 어루만지는 채송화.
 
간이식을 서둘러 받을 수 있도록 동분서주 해준 채송화 덕분에 아들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어머니도 다행히 1단계라 치료 가능하단 얘기를 들은 보호자는 복도가 울리도록 높아진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한다.
 
"선생님 지가요, 이 시상 천지에서 제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만큼 복많은 년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시요. 내가 복이 많습니다. 내가 제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랑께 이라고 좋은 선생님도 만나고 우리 엄마도 인제 살 수 있고. 이런 복이 어디 있을까요? 아유우… 아유, 선생님. 아유 선생님…"
 
이제 그녀의 신분은 '시상 천지에 복없는 사람'에서 '시상 천지에 제일로 복이 많은 사람'으로 승격됐다.
 
눈물 많은 키다리 아저씨 안정원, 어린이날을 넘길 수 있게 10분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이익준, 안타까운 상황의 보호자 결혼식에 참석해 갈비탕 쿠폰을 손에 쥐고 미소짓는 김준완, 엘리베이터를 끝까지 타고가며 보호자의 등을 따뜻이 데워주는 채송화… 이들은 영웅일까? 아닐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과 카리스마를 지니고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그런 영웅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마음과 배려의 손길로 때로 누군가에게는 영웅이 되기도 하는 그들의 이야기. 우리들 모두도 살아가면서 가끔 누군가에게는 영웅이 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세상이란 소수의 '늘상' 영웅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선의를 지닌 '때로' 영웅들에 의해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
 
딱히 영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웅이 아니지도 않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슬기로운 의사생활>. 다음주 목요일이 기다려진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드라마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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