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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이 터뜨린 억눌렸던 목소리들

[게릴라칼럼] 수사기관이, 사법부가, 정치권이, 언론과 여론이 해야 할 일

등록 2020.03.31 20:27수정 2020.03.31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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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 청와대

 
"모두가 26만 명의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법이 그들을 봐주면 무슨 소용입니까?"

지난 27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N번방 담당판사 오덕식을 판사자리에 반대, 자격박탈을 청원합니다"를 올린 청원인이 물었다. 이 청원은 시작 나흘 만인 31일 42만 명이 넘게 동의했다. 청원인은 오덕식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형사20단독)를 소환하며 이렇게 썼다.

"최종범 사건의 판결과 피해자이신 고 구하라의 2차 가해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큰 화를 산 판사입니다. 그 후 수많은 성범죄자들을 어이없는 판단으로 벌금형과 집행유예 정도로 너그러운 판결을 내려주었던 과거들도 밝혀져 더욱더 화가 난 국민들이 더 크게 비판했던 판사였죠. 이런 판사가 지금 한국의 큰 성착취인신매매범죄를 맡는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법부의 선택이 의심스럽습니다.

판사는 시험 잘 보고 나면 그 사람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그 판결이 누가 봐도 잘못한 판결이면 아무 제재도 할 수 없는 겁니까? 그는 이미 성범죄자들을 이상할 정도로 너그러운 판결을 내려준 전적이 있는 판사입니다. 성인지감수성 제로에 가까운 판결과 피해자를 2차 가해를 한 판사를 n번방 담당판사로 누가 인정해줄까요. 그 판결은 과연 안 의심스러울까요? 국민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나요?"


오 부장판사가 최근 조주빈이 운영한 '박사방'에서 지난해부터 지난 2월까지 '태평양'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16살 이아무개군의 재판을 맡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다. 민중당 당원 5명은 30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오 부장판사의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오 부장판사는 작년 8월 고 구하라씨에 대한 협박과 상해 등으로 기소된 최종범씨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등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것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이 밖에도 고 장자연씨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전 <조선일보>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등 성범죄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내려왔고, 2013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강의 중 성희롱성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에 대해 법률전문 매체 <로톡뉴스>는 "'n번방 재판' 맡은 오덕식 판사, '성 노예 협박' 사건에도 집행유예" 기사에서 "'n번방'과 흡사한 과거 사건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며 "서울중앙지법이 다섯 개 성범죄 전담 재판부를 두고 있어, 4분의 1 확률로 서울중앙지법 관할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오 부장판사가) 심리하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한국여성단체연합도 27일 "오덕식 판사는 텔레그램 성 착취 관련 재판을 맡을 자격이 없다"란 성명을 발표했다. 조주빈의 검거와 신상공개 이후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청원의 동의자가 총 560만을 넘긴 가운데, 오 부장판사에 대한 반대 목소리와 같이 성착취 사건 주범과 공범, 가담자 전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신상공개를 넘어 이처럼 더 섬세하고 유의미한 목소리들이 공감을 얻고 있다.

봇물 터지듯 나오는 더 섬세하고 유의미한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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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당원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n번방'사건 담당 오덕식 부장판사 교체를 촉구하며 기습 시위를 하고있다. ⓒ 이희훈

 
직접 피해자들이 나서는 것은 물론 이번에야말로 재발방지 및 사회적‧법적 구조 개선을 이뤄내겠다는 여성들의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30일 게시 하루 만에 36만이 넘는 동의를 얻어낸 "박사방 회원 중 여아살해 모의한 공익근무요원 신상공개를 원합니다"란 제목의 청원이 대표적이었다.

"조주빈이 공익근무요원(강아무개씨)과 살해모의를 한 여아의 엄마입니다. 2012년부터 2020년 지금까지 9년째, 살해협박으로부터 늘 불안과 공포에 떨며 살고 있는 한 여자이자 한 아이의 엄마이자 중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잘못된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용기 내어 글 올립니다.

박사방의 회원이자, 개인 정보를 구청에서 빼돌린 공익근무요원이자, 조주빈과 저희 아이 살해모의를 한 피의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가 담임을 했던 저희 반 제자입니다."


당해보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힘든 청원인의 절박함이, 그럼에도 무릅썼을 용기가 한 문장 한 문장에 박혀 있는 듯했다. 소셜미디어상에선 청원 내용을 접한 이들이 함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복역 후 출소 뒤에도 범행을 지속했다는 강씨. 그의 스토킹을 비롯한 갖가지 범죄 행위의 전말은 이랬다.

청원인에 따르면, 고1 학생과 담임선생님으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강씨는 "겉으로는 소심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청원인은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이 원활하지 않았던 강씨를 칭찬과 격려로 상담해줬고, 이후 강씨의 집착이 시작됐다. 이후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유지를 위해 일정 정도 거리를 두자, SNS 등에서 이중적인 생활을 해오던 강씨가 무섭게 집착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학교 측은 반을 바꿨지만, 강씨가 이를 거부하며 자퇴했고 이후 일반인이라면 경험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물리적·정신적 협박이 계속됐다고 한다. 연락이나 접촉 거절과 경찰 신고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미성년자였던 강씨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데 그쳤고, 그러면 그럴수록 협박과 폭력은 계속됐다고 한다.

개명과 이사는 물론 학교까지 옮기며 강씨를 피하려는 갖은 노력을 했다는 청원인은 결혼 후 결국 강씨를 고소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출소한 강씨는 아이와 가족에 대한 협박으로 범위를 넓혔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강씨가 출소 직후 구청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개인정보 유출과 협박으로 실형을 살다온 사람한테 손가락만 움직이면 개인 정보를 빼갈 수 있는 자리에 앉게 하다니요. 60년 넘게 잘 살아오던 저희 부모님도 이름과 주민번호를 바꾸었고 평생 살던 지역에서 이사를 가셨습니다. 온 가족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하면서 힘들게 노력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교육청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사의 사생활 정보가 왜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합니까. 제가 어느 학교에서 근무하는지 이름만 치면 공지사항에 모두 볼 수 있게 해놓은 제도가 불합리하다고 민원을 넣었지만 현재 검토하고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답변만 얻었고 그래서 학교를 옮기면서 또 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사의 인권은 어디에서 보장받을 수 있나요."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2012년부터 시작된 강씨의 범행은 끈질겼다. 고교 재학 시절 청원인을 협박, 소년보호처분을 받기도 한 강씨는 2015년 11월부터 2017년까지 총 16회에 걸쳐 협박문자를 보냈다. 그 중엔 '내 목숨을 무기로 쓸 수 있게 되었지'와 같은 섬뜩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경기도 한 병원 원무과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던 강씨. 그는 2017년 12월 청원인의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를 복사하고 사본을 유출, 결국 구속수감됐다. 강씨는 1심에서 징역 1년 2월형을 받았고, 2심은 강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 과정에서 강씨는 심신 미약 등을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결국 상고를 기각, 1심 판결을 확정했다.

문제는 작년 3월 출소한 강씨가 수원시의 한 구청에서 남은 복무를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강씨는 재차 청원인의 개인정보를 빼돌린 후 또다시 협박을 이어갔고, 결국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 협박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어이없게도, 강씨가 조주빈의 범행에 가담한 것 역시 이 기간이었다.

함께 청원인의 아이를 살해모의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주빈과 강씨는 경찰 조사에서 엇갈리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주빈이 "살해에 가담할 마음은 없었고 돈만 받았다"는 입장인 반면 강씨는 공동 범행을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끈질기고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강씨를 청원인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청원인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강씨의 신상공개라도 요청한 절박한 심정은 이 마지막 문장에서도 잘 드러나 있었다.

"신상공개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신상공개를 원한다는 국민 청원글을 보고 또 저와 아이를 협박하겠지요. 그다음에는 정말로 누군가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안전한 나라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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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대전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성 착취 동영상 유포 사건인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이 묻고 있다.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에 가담한 남성들과 오 부장판사와 같은 이들이 무엇이 다르냐고. 남성 중심 사회가 소라넷 이후 'N번방'과 '박사방'이란 최악의 디지털 성범죄를 방치한 것 아니냐고. 소라넷 이후 디지털성범죄가 공론화됐음에도 왜 근절하지 못하느냐고. 아니 근절할 의지는 있느냐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 특별조사팀을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한 80% 이상 여성 조사팀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에 25만 명 넘게 동의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비록 수사기관에서 법을 집행하는 남성들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메시지 말이다.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이 공분을 일으키면서 근절해야 할 성범죄와 엄벌에 처해야 할 성범죄자들이 하나둘 조명을 받고 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로 알려진 '웰컴 투 비디오'의 주범 손아무개씨도 그중 하나다.

손씨가 다음 달 출소를 앞둔 가운데, 그를 기소한 미국 수사기관의 범죄자 인도요청에 한국 정부가 응할 것을 요청하는 "유/아동 성착취 동영상 유통시킨 다크웹 손모씨의 미국 법무부 강제송환을 실행해주십시오"란 청원 역시 15만 명 넘게 동의하며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손씨를 수십 년형도 가능한 미국으로 강제 송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법무부가,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천명한 정부가, 과연 손씨의 송환 여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피해자들이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30일 오후 오덕식 판사의 교체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은 오 판사가 직접 재배당을 요구하는 서면을 제출했고, "배당된 사건을 처리함에 현저히 곤란한 사유가 있어 재판장이 그 사유를 기재한 서면으로 재배당 요구를 한 때"란 법원 예규를 근거로 해당 사건의 재판부를 형사22단독(박현숙 판사)으로 재배당했다고 밝혔다. 

오 판사 본인이 껄끄러웠을 수 있다. 법원 역시 부담스러울 수 있다. 어찌 됐든, 오 판사 교체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강경한 '액션'이 사법부에 전달됐고, 그 결과 사법부의 움직임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을 해결코자 하는 일시적 여론에 마지못해 응답했다기보다, 향후 한국 사회가, 수사기관이, 사법부가, 정치권이, 언론과 여론이 이러한 액션에 지속적으로 화답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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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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