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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큰딸은 박근혜 아닌가요?'라고 묻는 당신께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26)]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⑪

등록 2020.04.07 20:32수정 2020.04.1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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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 자료사진

 
여러 유형의 사람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다. 집 안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집 밖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집 안팎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오래도록 연구하고 가까운 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째 스타일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매서워 보이는 풍모와 달리 실제로 만나 보면 아주 수줍음을 잘 타는 샌님 형이라는 증언이다(한때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옛 상사 김점곤씨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터뷰 중). 

박정희 대통령은 생전에 육영수 영부인과도 이런저런 일로 자주 다퉜기에 그 부부싸움을 '육박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하지만 박정희는 '육박전'에서 배우자를 이기진 못한 듯하다. 그에겐 가장으로서 약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육 여사와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했기에 전처 딸을 돌봐야 했고, 형(박상희)의 유가족도 돌봐야 할 처지였다. 군인 박봉을 쪼개 부인 몰래 딸에게 또는 형의 유가족에게 학비·생활비를 보내줘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 첫 부인 친정인 도개마을 어귀 낙동강 일선교 ⓒ 박도

     
박정희의 '아픈 손가락'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중, '양반이 좋다'는 아버지의 성화로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의 김호남씨와 결혼해 1938년에 첫째 딸 박재옥씨를 낳았다. 박재옥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뒤, 한때는 외가에서, 구미 각산에 사는 사촌 오빠(박재석) 집에서, 할머니 약목댁과 함께 상모동에 살면서 구미 초·중학교를 다녔다.

이후 서울에 살던 사촌 언니(김종필 총리 부인 박영옥)를 따라 서울로 와서 동덕여고를 다녔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육영수 여사가 재옥씨를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근혜, 근영, 지만 등 이복 아우들과 같이 한 집에서 지냈나 보다. 

그렇게 지내다가 1958년 당시 아버지의 부관이던 한병기씨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박 대통령 재임 시절은 물론, 그 뒤로도 언론을 극도로 피해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박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절반 이상을 캐나다 등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다음은 한 월간지에 실린 박재옥씨 수기를 기자가 조금 다듬어 옮긴 것이다.
  

아버지 박정희와 맏딸 박재옥 씨 ⓒ 자료사진

 
'미안하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크게 꾸중을 듣거나 싫은 말씀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계신 탓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나에게 눈에 띄는 애정표현은 못해도 그렇다고 야단을 치는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서 마주 치면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했다. 나는 그때마다 쌀쌀맞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대했다. 그때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 같아 두고두고 후회 막심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육영수 여사)와 친하게 지낼 수 있게 하려고 여러 모로 애쓰셨다. 내가 용돈을 달라거나 무슨 의논이라도 하려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와 상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내가 육 여사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고자 그러셨던 것 같았다.

육 여사와 나는 열두 살 차이였다. 나는 그분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이 쉽사리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어쩔 수 없을 때만 어렵사리 그 호칭을 썼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능한 아버지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꼭 한 번은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울어버린 일이 있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다.  그때 남편(한병기)이 공화당 공천을 받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새벽 영옥 언니로부터 공천자 명단에 남편 이름이 빠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한 나머지 청와대로 갔다. 육 여사에게 한참 하소연을 한 뒤 돌아오려는데, "아버지 뵙고 가야지" 하시기에 아버지 집무실로 찾아갔다.


"아버지, 남편이 그렇게 하고 싶어 했는데…"
"정치를 해 봐라, 정치인이란 결코 행복한 게 아니란다."


아버지는 나에게 "네 남편이 정치인이 되면, 너의 코흘리개 시절 이야기
까지 낱낱이 들추어지고, 별 별 얘기를 다 듣게 된다. 남편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너에게 불행이 되면 됐지 좋은 일은 아니다"는 말로써 달랬다.


"남편이 출세한다고 여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그 말씀에  "그건 아버지 생각이에요"라는 말을 불쑥 뱉고는 울면서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러자 육 여사는 아버지와 똑같은 말씀으로 나를 설득했다. 나는 두 분의 말씀이 백 번 옳은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제8대 총선에서 한병기씨는 강원도 속초 지역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공천받아 당선했다. )

어머니(김호남 여사)는 1990년 일흔둘의 나이로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말년 불교에 귀의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다 용서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사를 잘 돌보시라고 날마다 기도를 드리셨다. 사후에는 아버지 명복을 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많이 후회했다. 내 나름대로 돌봐드린다고 애썼건만, 막상 돌아가시자 잘해드리지 못한 일만 자꾸 생각났다. 나는 한 동안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 속에 지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슬픔이야 말로 다할 수 없지만, 그 와중에서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동안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고, 주목받아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에,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박재옥 씨와 남편 한병기 씨. ⓒ 자료사진

  
하늘은 모든 복을 다 주지 않는다

박정희 큰딸 박재옥씨는 그렇게 조신하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대통령 장녀'로 화려한 각광은 동생 근혜에게 양보한 채, 늘 그늘진 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대통령의 장녀'라는 존재조차도 잊혔나 보다.

아마도 '치국(治國)보다 더 어려운 게 제가(齊家)'인가 보다. 그리고 하늘은 한 사람에게 모든 복을 다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보고 들은 바, 인간 박정희는 업보(業報)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분은 출생부터 마지막 운명의 순간까지도 악전고투요, 파란의 연속이었다. 말년에는 둘째 딸 근혜에게 접근하는 '똥파리' 한 마리도 제대로 쫓지 못할 정도로 나약했다. 그래서 사후에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는 더 짙은 법이다.

인생이란 지내고 보면 '새옹지마'요, 한낱 '일장춘몽'이다. 사람의 행복은 권력, 금력과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이, 아니 조금 부족한 게 더 행복할지도. 나는 요즘 따라 예사로운 일상이 행복임을 절실히 느낀다.

대통령의 맏딸로서 평생 자중 자애하면서 조용히 살았던 박재옥씨는 올해 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명복을 빌며 이번 회를 마친다. 

(*박정희 대통령 편은 다음 회로 끝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조선> 1995년 12월 호 ‘나의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김호남’ 편과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고향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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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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