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태권도는 '예뻐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릴레이 회원에세이: 운동하는 여자들Ⅰ] 지구용사의 꿈

등록 2020.04.02 11:27수정 2020.04.02 11:51
1

[릴레이 회원에세이: 운동하는 여자들Ⅰ] 지구용사의 꿈 ⓒ 한국여성민우회

 
"나를 막을 모든 이유들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태권도를 한다."

나는 태권도를 한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만화인 '지구용사 벡터맨'에서 주인공 '타이거'가 흰 태권도복을 입고 발차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태권도에 빠져버렸다.

그 무렵 나는 해리포터에 푹 빠진 아이들이 호그와트에 입학하라는 편지를 가지고 올 부엉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 어깨에 형광색 점이 밝게 빛나기를,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지구용사가 될 운명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도 다니고 싶던 태권도 학원도 다니지 못했다. 아빠는 "태권도는 여자가 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했다. 

몇 년 동안 매달려 봤지만 아빠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고,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이유를 참지 못했던 어느 날 밤새 서글프게 울고 나서야 마침내 태권도장에 다닐 수 있었다. 도복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나는 늘 운동시간 두 시간 전부터 도복을 입고 있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도장에서 가장 먼저 200개의 칭찬 스티커를 모아 당시 대유행이던 킥보드도 받았다. 

그러나 행복한 나날은 길지 않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태권도와 강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나를 막을 모든 이유들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태권도를 한다.

"몸을 쓰면서 내 몸이 비로소 내 몸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좋았다."


운동을 막 시작했을 때는 예상했던 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나의 몸은 생각보다 더 많이 굳어 있었고 다리는 마음만큼 높이 올라가지 않았다. 욕심을 내서 운동을 하고 난 다음날이면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통으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서 어렴풋이 몸에 밴 동작들을 지워내고 새롭게 다시 배워야 했고, 품새는 예전만큼 쉽사리 외워지지 않았다. 몸이 아프고 고단하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꾹꾹 눌러왔던 소원을 푸는 시간들이 행복하고 소중했다. 운동을 한지 몇 개월이 지나니 다리와 팔에 힘이 붙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은 강해질수록 점점 더 내 마음과 같이 움직였다.

몸을 쓰면서 내 몸이 비로소 내 몸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좋았다. 미트에 팡팡 소리가 나게 발차기를 하고 나면 며칠간 묵은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다. 완벽한 뒤후려차기를 찬 날에는 스스로가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집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에게 태권도는 지구용사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몸과 마음을 강하게 해주는 운동이다.

"살면서 예뻐지려고 태권도 한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어쩌면 꽤나 많은 사람들은 태권도 하는 여자에게서 용사의 면모는 전혀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자기 전 태권도 관련 영상들을 찾아보던 나는 한 태권도 관련 예능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9명의 여자 연예인들이 팀을 이루어서 세계태권도 한마당 태권체조부문에 출전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웹 예능이었다. 나에게 이것은 기대로 시작했다가 모욕감으로 끝난 시리즈였는데, 가장 통쾌했어야 할 공연 장면이 문제였다. 

몇 주간 열심히 태권체조를 연습한 출연자들은 배꼽이 보이는 흰색 민소매와 다리에 딱 달라붙는, 통이 작은 흰바지를 입고 춤을 췄다. 캐스터는 "와 섹시합니다."라는 멘트를 날렸고 카메라는 연신 환호하는 남성 관중들을 비춰줬다. 이후 발견한 대한태권도협회의 태권도 소개도 유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는 신체운동으로서 태권도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어린이의 성장발육, 청장년과 노인의 체력증진, 여성의 건강과 미용증진"을 들고 있다. 살면서 예뻐지려고 태권도 한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제 연약한 버전, 섹시한 버전, "미용증진"에 열을 올리는 버전 다 지겹게 보았다. 도대체 지구용사 버전은 언제 나오는 거지?  

 

(출처: 유튜브 영상 화면 캡쳐, https://youtu.be/C_nH3PtZZG4) ⓒ K-Tigers TV

   

(출처: 대한태권도협회 홈페이지) ⓒ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하는 여자 지구용사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끔 힘이 빠질 때가 있다. 화가 날 때도 있다. 태권도를 한다고 하면, 유단자라고 하면, 대뜸 손 크기를 재보자고 하는 남자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중에 정권지르기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여자 사범님들이 많이 늘어나고 도장에서 더 이상 "여자보다 못한다"고 혼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세상은 변하고 바뀐 세상에서 여자들은 더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나도 비위 상하는 몇 가지 버전은 제쳐 두고 열심히, 오래오래 운동할 것이다. 태권도 하는 여자 지구용사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글/장아지(민우회 회원)]
 
#페미니즘
댓글1

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