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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조끼, 그땐 그냥 입었지만 이젠 싸울 겁니다"

[나의 꿈은 '노동자'입니다 ①] 민주노총 아사히비정규직 지회장 차헌호

등록 2020.04.07 08:41수정 2020.05.1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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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지식인, 혹은 스타들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속에서 진짜 이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어릴 적 꿈과 직장을 구하는 과정, 일터에서의 보람, 힘든 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진솔한 삶을 기록합니다.[기자말]
 

민주노총 아사히비정규직 지회장 일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계열사인 아사히글라스는 '고용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외국인 투자 기업으로 구미에 공장을 세웠다. 이 회사는 우리 정부로부터 12만평에 이르는 공장부지를 50년간 무상으로 임대받고, 5년간 국세 전액감면, 15년간 지방세 50퍼센트 감면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고용창출과는 거리가 먼 사내 하청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규직과 같은 일을 시키면서 최저임금만 지급하고 갖은 차별을 일삼았다. 2015년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지자 1달만에 하청업체인 지티에스 직원 전원을 문자로 해고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사히비정규직노조는 길고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 신유아

 
"학창시절, 노동자가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노동조합이 뭔지도 몰랐죠."
 

경상북도 상주가 고향인 차헌호씨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당연히 공부에도 관심이 없었다. 막연히 "나중에 뭐라도 해서 먹고살겠지"라 여겼을 뿐이었다. 그때의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노동자란 '힘들게 사는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정도의 인식만 갖고 있었다.

자신이 나중에 노동자가 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임에 긍지를 느끼는 어른으로 성장할 줄 상상도 못 했다. 초중고 12년 동안 학교는 그에게 노동의 가치나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행복한 노동자로 사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야 그는 그런 것들을 노동조합을 통해 배웠다.

1995년 스물세 살의 차씨는 구미에 올라와 한국합섬에 취업했다. 그해 12월 2일 탱크로리 안에서 작업하던 한국합섬 노동자 2명이 사망하는 산업재해가 발생했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한국합섬 노조는 격렬한 투쟁을 시작했다. 마지막엔 합의를 끌어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두 명이 분신하고 45명이 구속되는 상처를 남겼다.
  
"그때 저처럼 신참 노동자였던 20대 동료가 구속되었어요. 그 친구 어머니를 모시고 면회를 몇 번 갔었죠. 그 어머니가 착한 우리 아들이 왜 감옥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우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그는 한국합섬에서 만 1년을 일하고 직장을 옮겼다. 최신 설비라 일하기가 더 편하다고 소문난 새로 생긴 금강화섬으로 몇몇 동료들과 함께 갔다. 그리고 그가 입사한 지 3년 만에 금강화섬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섬유 업계는 계속 호황을 누렸고 회사 매출도 늘어났지만, 노동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3년, 금강화섬 노조는 당시 3조 3교대로 돌아가던 근무를 4조 3교대로 바꾸기 위해 첫 파업을 단행했다. 월 매출 100억 원이 넘는 공장을 3일 동안 멈춰 세웠다. 그때 그는 쉼 없이 돌아가던 기계가 정지된 고요한 공장 안을 바라보며, 값비싼 기계와 거대한 공장도 노동자의 피땀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음을 실감했다.

이 파업의 결과 회사 측은 4조 3교대 근무에 합의했지만, 이듬해 3월 금강화섬이 폐업하며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그 과정에서 차헌호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인수업체의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565일의 긴 싸움을 했다. 이 투쟁으로 그는 수배되어 9개월 남짓 옥살이를 했다.

점심시간 20분, 징벌조끼 입히는 비정규직 차별

2007년 6월 집행 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된 그는 제일모직에서 2년 일한 뒤 2009년 9월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인 지티에스에 입사했다. 아사히글라스에서는 800명의 정규직 직원 외 도급계약을 맺은 세 곳의 하청 업체 비정규직 직원 300명이 일하고 있었다. 도급 계약을 맺었다지만, 실상은 같은 공장에서 아사히글라스 관리자들의 감독을 받으며 정규직 직원들과 똑같은 일을 했다. 전형적인 불법파견이었다.


그는 일반 회사로 치면 '반장'에 해당하는 리더격이었지만, 일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비정규직은 똑같은 일을 하고도 퇴직할 때까지 최저임금만이 지급되었다. 물론 경력도 인정되지 않았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시간 외 근무를 해 잔업 수당을 받아야만 했다. 한 달에 두 번 쉬기 위해 주말에는 12시간 맞교대를 했다.

"점심시간이 20분밖에 안 되었어요. 기계를 멈추지 않고 계속 돌려야 하니까 교대로 밥을 먹게 했죠. 회사식당이 있어도 이동시간이 걸리니까, 요식 업체에서 도시락을 공장 휴게실까지 배달했어요. 식대에 배달 비용까지 포함되다 보니 식사 질이 많이 떨어졌지요. 그나마도 교대로 먹어야 하니까 식어버린 밥을 먹었죠. 그러다보니 컵라면을 사서 밥이랑 때우는 경우가 흔했어요."

또 하청노동자들에겐 특별한 규정도 없이 '징벌조끼'라 불리는 빨간색 조끼를 입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어요. 20분 내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다 보니, 한 동료가 화장실에 실내화가 아닌 안전화를 신은 채 들어갔어요. 그걸 본 관리자가 본청 관리자에게 보고하고 징벌조끼를 입혔어요. 한 번 입으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씩 입고 있어야 했어요."

고용도 불안정했다. 물량이 줄어들면 권고사직으로 내보내고, 물량이 늘어나면 내보냈던 사람들을 다시 전화해 불러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노조 결성 이유로 해고 통보받은 178명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지회장 차헌호와 조합원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들은 해고된 2015년부터 지금까지 회사 앞 농성장에서 24시간 릴레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농성장에는 23명의 조합원만 남았다. 2019년 8월 23일에야 노조원들을 복직시키라는 1심 판결이 나왔지만 회사측은 이에 불복해 상소한 상태다. ⓒ 차헌호

 
그는 최저임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대리운전까지 하면서 지티에스에서 일했다. 그렇게 6년째 되던 2015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그해 5월, 아사히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졌다. 반응은 뜨거웠다. 지티에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훌쩍 넘는 138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노조 설립 한달 만인 6월 30일에 지회장 차헌호씨를 비롯한 지티에스 비정규직 178명은 문자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원청인 아사히글라스는 지티에스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했다. 이때부터 길고 긴 복직 투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억울하니까, 정당하니까, 우리가 쫓겨날 이유가 없으니까 싸운 거죠. 노동자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노동부인데, 노동부에 고소한 지 2년 1개월 후에야 결과가 나왔어요. 길어질수록 버티기가 힘들지만, 우리 지회는 더 강해졌어요."

2017년 노동부는 지티에스 노동자 178명을 직접 고용하라는 행정지시와 함께 17억 8천만 원의 과태료 처분을 내며 이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아사히글라스는 노동부의 판결에 불응해 행정소송을 내는 한편 해고자 178명을 희망퇴직으로 회유했다(이 중 150명이 희망퇴직으로 떠났다). 그리고 해고된 지 만 4년이 지난 2019년 8월 23일에야 1심 판결이 나왔다. 노조의 승소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사히비정규직지회에는 23명의 노동자만 남았다. 그리고 회사는 이마저도 불응해서 항고한 상태다.

일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그룹 계열사인 아사히글라스는 2004년 한국 정부가 '고용창출'을 위해 유치한 외국인 투자기업이다. 그들이 받은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12만 평에 이르는 공장부지를 50년간 무상으로 임대받고, 5년간 국세 전액 감면, 15년간 지방세 50% 감면 특혜를 받았다. 아사히글라스는 이런 특혜를 바탕으로 10년간 연평균 매출 1조 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사내유보금도 720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고용창출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이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부당해고 인권침해에 시달려 왔다. 

차헌호씨의 싸움이 길어지면서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궁금했다.
 

차헌호씨 가족 투쟁이 길어지면서 '아내와 딸들에 대한 미안함이 끝도 없다'는 차헌호씨는 그래도 노동조합을 통해 당당한 노동자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작년 복직판결 후 잠깐 틈을 내어 두 딸과 구미시 금오산을 등산했을 때. ⓒ 차헌호


"아내와 딸들에 대한 미안함은 끝도 없어요."
 

차씨는 20대부터 어설프게 노동조합을 경험하고 갈수록 더 진지해졌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노동조합을 또 만들었을 때 아내는 무척 힘들어했다.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일만 하느냐? 가족은 뒷전이고 동료들이나 노조가 우선인가'라는 원망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그는 해고된 이후 자신이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적 책임도 못다 하고, 옆에서 함께 생활하고 보듬어주고 얘기 들어주지도 못하니, 가정 안에 아빠가 없는 것과 비슷하죠. 빨리 아사히에 이겨서 돈도 가져다주고 일상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아내와 저녁에 맥주 한 잔 하고, 애들과 가끔 바다 여행도 갔던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일상을 잃은 차헌호씨는 그러나 노동조합을 했기에 행복하다고 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 삶이 20대부터 노조와 연관되어 왔는데 굉장히 행복합니다. 노조를 만들고 싸우면서 저와 동료들은 당당한 노동자로 변했어요. 예전엔 징벌조끼를 입히면 그냥 입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오면 싸우겠다고 하죠. 자존감이 회복됐고, 내 목소리를 내면서 무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됐어요. 점점 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아지는 지금의 세대들이 노동조합을 만나지 못한다면, 미래는 너무 절망스럽지 않을까요?"

코로나19로 타격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IMF 사태 이후 생기기 시작한 비정규직은 해마다 늘어나 지금은 천만을 넘어서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일하는 곳이 자신의 일터라는 애착도 없고, 동료들과 깊은 인간관계도 잘 맺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같은 곳을 몇 년씩 다닌다. '잠시'가 아니라 청춘을 다 보내는 것이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내가 공부를 못 하니까 비정규직이 됐다, 나처럼 못난 사람들은 비정규직 일자리밖에 없어서 무시 당하며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초중고 교육을 다 받고, 고등학교까지 나왔어도 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노동 3권과 노동조합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도 없다.

그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고 해고에 맞서 싸우면서, '텔레비전에는 안 나오는' 많은 노동자를 만나면서 변해갔다. 공장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교사도 교수도 비정규직이 있고, 그들도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잘못에 맞서야 세상이 달라지고,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자존감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몇 년씩 싸워보고 나서야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망퇴직을 선택한 150명은 돈 많은 기업이 불법을 저지르거나 협박을 해도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노동자로 떠나갔다.

차헌호씨는 제대로 된 노동조합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처럼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중심으로 노조 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자신들보다 열악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함께 해야 진정한 노동조합일 것이라 했다. 그래야 많은 이들이 노조를 선택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노조야말로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단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리란 말도 덧붙였다.

"지금 아사히비정규직지회에 남은 22명의 조합원은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어요. 노조 활동은 결국은 공동체 활동입니다. 가정 문제나 개인의 고민도 함께 나누고 공감하며 살아가고자 해요. 그래야 불합리에도 함께 맞설 수 있죠. 동료들끼리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찾으면서요."

코로나19로 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걱정하는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미 대량해고가 벌어진 사업장들이 많다고 했다. 하루, 한 달 벌어야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열악한 노동자들부터 거꾸로 일자리를 잃고 있는 현실을 그냥 둔다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우리 중 누구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차헌호씨와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크다. 이제 사회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다음 세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 조합 #차헌호 #아사히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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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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