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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저격한 전우용이 파헤친 근대의료 시스템

[서평]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에 이용된 근대의학 다룬 '현대인의 탄생'

등록 2020.04.04 20:38수정 2020.04.0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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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전 교수의 도발 ⓒ 진중권 페이스북

   
세상이 코로나19로 시끄러운 요즘, SNS에서는 때아닌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이 있었다. 이명박 정권의 뉴라이트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들어 조중동 보수 언론 지면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를 향한 진중권 동양대 전 교수의 저격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3월 28일 진중권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뜬금없이 '토착왜구'를 거론하며, 구한말에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만들었던 대한의원을 식민지 근대화론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였다.
 
"저들이 '토착왜구'라 부르는 이들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의학적 버전이죠. 누가 한 말일까요? '얼마 전 대구 시민들은 왜 자기 도시가 일본과 같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겁니다'라고 했던 분 있죠? '토착왜구' 박멸의 최전선에 서 계신 항왜투사, 자칭 역사학자 전우용씨입니다. 이분, 셀프 청산하셔야 할 듯."
  
진 교수는 비판의 근거로 무려 13년 전 프레시안의 기사 <"서울대병원-연세대병원 '역사 전쟁' 시작됐다">를 인용했다. 그 기사가 발췌한 전우용 교수의 발언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대한의원을 긍정했으므로 그가 식민지 근대화론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전우용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즉각 반박의 글을 남겼다. '자신은 대한의원의 설립을 식민지 근대화론이 아닌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으로 봤으며, 진 교수가 오독했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비록 대한의원은 통감부의 지시로 설립되었지만 그 과정에는 분명 대한제국의 성과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자주적으로 바라봐야 하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이 이룬 의료개혁의 성과를 탈취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와 함께 진 교수의 '자칭 역사학자'라는 비아냥거림에 대해 '진중권 석사'라고 되받아치기도 했다.

진중권-전우용의 설전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에 읽은 책 한 권이 생각났다. 바로 전우용 교수가 집필한 <현대인의 탄생>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나라의 근대 의료 시스템이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대 한국인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진 교수가 지적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왕 떠오른 거 오랜만에 책을 들췄다.
  
일제강점기의 의료 시스템

 

전우용의 < 현대인의 탄생 > ⓒ 이순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의료 시스템을 분명히 식민지 의학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비록 일본은 서구의 근대 의학을 조선에다가 본격적으로 실현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본국을 위한 것으로서 제한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인들에게 식민지화로 '문명의 혜택'을 입게 됐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식민지화가 즉각적인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의료 환경의 급속한 악화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현지화'를 빌미로 유예적인 조치가 취해졌던바, 이것이 식민지 의학의 제한성과 특징을 규정했다. - 49p
 
저자는 근대 의학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에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보여준다. 제국은 식민지를 보통 비문명 또는 반(半) 문명 상태로 두려고 한다. 이를 통해 지배민족은 현대 문명을 체현한 존재로 스스로를 형상화 시키고, 식민지는 낙후한 곳임을 강조함으로써 지배의 근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에 의학을 전수하더라도 '학문'이 아니라 '기술'만 가르쳤다. 아주 극소수의 한국인들만 의학을 공부했다. 일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한국인 절대다수를 '비과학의 영역' 안에 두고자 했다. 일본은 본국을 서양 근대 의학의 전일적인 지배영역으로 개편했지만 조선에는 전통 의학을 근대 의학 아래로 재편했다. 조선의 의학은 '비과학'이자 '이단'으로서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미개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총독부는 전통 의학을 식민지 원주민만을 위한 하위 의학으로 재편성함으로써 식민지의 의료수급의 불균형 문제를 미봉하려 했다. 전통 의학은 식민지 대중에게는 여전히 의학이었으나, 식민지 지배자에게는 의학이 아니었다. - 50p

일제는 노선의 '민간신앙'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고 부분적으로 억압하면서도 절멸시키지 않았다. 미신은 한국인다움, 즉 야만과 무지의 표상으로 남아 한국인 자신들에게는 자괴감을, 지배 민족인 일본인에게는 우월감을 심어주어야 했다. - 317p
 
일제강점기 시대의 의료 시스템을 이렇게 분명히 식민지 시스템으로 규정한 저자가 과연 식민지 근대화론자일 수 있을까? 전우용 교수는 저서에서 진중권 교수가 지적한 대한의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 통치의 미화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의 일환으로서의 서술이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을 점령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의료체계 전반을 '개혁'했다. 이 개혁에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에 본격적인 식민지 의료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식민지에서 전개되는 제국주의 의료는 자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질병의 본국 유입을 막는 데 중점을 둔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만들어 놓은 서양식 병원들을 자국민을 위한 병원이자 식민지의 풍토병 등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통합, 개편하여 1907년 대한의원을 설립했다 - 94p
 
요컨대 저자는 대한의원을 식민지 의료체계의 첨병, 일제가 자국의 팽창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기관으로 정의한다. 다만 그 대한의원은 일제에 의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가 근대화하기 위해 조금씩 쌓아나가고 있었던 의료 체계를 강제적으로 통합하고 개편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저자의 말대로 현재 우리가 할 일은 대한의원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성과를 찾고 다듬는 일인 것이다.
   
한국 전쟁과 우리의 의료 시스템


전우용 교수는 저서에서 우리의 근대 의료 시스템의 기원 외에 한국인이 어떻게 '현대인'이 되었는지 의료사적으로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현대 한국인을 만들어낸 결정적인 계기이다. 현대인을 '의학의 시선으로 자기 몸과 생활습관 주변 환경을 살피고 교정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로 정의할 수 있다면,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그런 현대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공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개개인의 몸과 마음 모두를 포획하는 압도적 상황이다. 불순한 마음과 불결한 몸은 모두 국가의 검열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국가의 검열에 걸리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훈련을 거듭했고, 그러면서 자기 몸을 의학적 시선으로 살필 줄 아는 '현대인'으로 거듭났다. - 294p

질병은 개인의 운수소관이요, 인명은 재천이라는 생각은 거듭된 의학적 계몽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개인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만다는 강력한 압력이었다. 건강한 몸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더구나 국가는 효율적인 예방수단들을 제공해 주었다.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하면 질병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 300p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많은 나라가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시스템을 보고 배우려 하지만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히 의료 시스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관점과 결부된 것이며,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궤적과도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부디 진중권 교수는 이 책을 정독하시길 바란다. 13년이나 지난 기사만 읽고 전우용 교수를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옹색한 일이다.

현대인의 탄생 -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전우용 (지은이),
이순(웅진), 2011


#진중권 #전우용 #현대인의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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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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