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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반인 박정희? 그를 위하는 길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27)]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⑫ 마지막 회

등록 2020.04.10 18:42수정 2020.04.1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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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 자료사진

  
박정희, 상반된 평가

지난 2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 박정희편' 중 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진작 쳐 죽였어야 할 다까기 마사오"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을 인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갈린다. 좋고 싫음이 뚜렷하다. 또 사람마다 가지각색의 평가를 내놓는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인간 박정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 자취를 보다 깊게 연구하고자 2000년 여름에는 만주 대륙을 홀로 헤매기도 했다. 그리하여 현지 사람조차도 잘 모르는, 창춘의 만주군관학교까지 애써 찾아가 그의 행적을 오롯이 더듬기도 했다.

그곳 현지인 평가도 극과 극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 동포보다 중국인들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숭상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나는 또 박정희 친지나 고향사람들로부터도 숱한 이야기를 들었다. 상모동 이웃마을 형곡동에서 평생 살고 있는 한 친구는 "그분은 보통 한국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돌연변이"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가난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은인"이라고 했다.

상모동 이웃 임은동에 사는 한 선배는 생전 박정희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청탁에 관한 한 매우 차가웠던 분으로, 군 재직 시절 고향 친지들이 추수 뒤 참깨나 고춧가루 같은 걸 가지고 서울로 가서 자식을 후방으로 빼달라는 부탁을 하면 그 자리에서 매정히 돌려보내는 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박정희 어린시절 공부방 ⓒ 박도

 
'똥별'의 유래

박정희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스스로 체구가 작음을 결점처럼 여겼다고 전해지고,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의 정코스인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해방 뒤 한때 좌익에 연루돼 군사재판에서 무기형을 받았지만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래서 그는 꿈이요, 생명줄과 같았던 군을 떠나야 했다. 그는 그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도, 다시 그 절벽을 기어올라 5.16 쿠데타 이전에 육군소장까지 올랐다. 

과거의 우리 국군은 각종 비리의 온상이라고 할 만큼 부정부패가 매우 심한 곳이었다. 군인들의 의식주 가운데에 부정이 없는 곳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부대의 담요와 휘발유는 물론 탄피, 탱크의 포신까지도 잘라 팔아먹었다. 또 전방 산의 나무도 마구 벌채해 숯으로 구워 팔아먹기도 했고, 사병들에게 돌아갈 양식도 빼돌렸다.

부정부패 비리로 젊은이들을 징집해놓고 굶겨 죽이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져 그 책임자가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대 부정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날 장성들은 '똥별'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런 진흙탕 속에서 박정희는 남달랐기에 상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3.15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용퇴하라"는 하극상 직언의 편지도 띄워 끝내 예편시키기도 했다. 그는 5.16 쿠데타 이후 숱한 도전자를 죄다 물리치고 장장 18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했다. '총구'에서 나온 힘도 있었을 테지만, 젊은 날부터 대권을 향한 강한 야망으로 소탐대실치 않았던 생활신조와 불굴의 신념, 강단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구미초등학교에 있는 박정희 동상. ⓒ 박도

 
"진선진미한 사람은 없다"

그의 재임 중 3선 개헌,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10월 유신. 장준하 국사봉 의문 추락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등 그밖에 젊은 여성 간음을 비롯한 여러 사건 등은 큰 패착이었다.

그는 과오에 대한 진솔한 사과 한 마디 없이 동향 김재규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훗날 그의 차녀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이 됐을 때, 아버지의 실정을 명쾌히 밝혀 진솔히 사과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국정농단의 한 축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탄핵돼 현재 수감 중이다.

내가 항일유적 답사 길에 베이징에서 만난 한 원로 독립투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사람은 없다. 그 사람 공(功)과 과(過, 허물)가 7대 3이냐, 3대 7이냐, 5대 5이냐가 문제다. 기록자는 양심에 따라 그 인물에 대한 공과를 사실대로 기록하면 된다."

그 어른은 나에게 기록자의 기본 자세를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그런 기록에 대한 평가는 후일 독자의 몫일 테다.

박정희,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다. 대단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만주군관학교에서 드넓은 대륙을,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일인들의 섬세함을, 미국 포병학교에서 미국인들의 실용성을 배웠다.  

그는 젊은 날 당시 사람으로는 드물게 중·일·미 3국에서 견문을 넓힌 사람으로, 그 때문에 체구는 작았지만 스케일(통)은 컸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말한 익자삼우(益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의 하나로, 그가 익힌 견문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듬는 데는 일조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대구사범학교의 현재의 모습(현, 경북사대부고). ⓒ 박도

    
'불행한' 사람

나는 뒤늦게 우리 근현대사와 그 주인공 인물들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흑백논리로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한 역사적 교훈을 배우는 데는 소홀했다. 그리하여 잘못된 역사가 고쳐지지 않은 채 되풀이 되고 있다.

이제 이 기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작가 이병주가 그의 작품에서 한 말을 새삼 상기시킨다.

"세상에 도의가 제대로 작용한다면 '그'는 평생을 뒤안길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만일 나에게 집필의 장과 건강이 허락된다면 다른 형식의 글로 인간 박정희를 그려보고 싶다. 그분은 구미초등학교를 1932년 3월에 졸업했고, 나는 26년 후인 1958년 3월에 졸업했다. 나인들 같은 금오산인으로 왜 근원적인 애정이 없겠는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한 평범한 인간으로 놓아주는 일이다. 그를 반신반인이라며 우상화·신격화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그도, 그의 부인도 비명에 갔고, 그의 딸은 예사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더디게 했다.

몇 해 전 고향에 갔을 때 나는 구미시장도 참석한 그 자리에서 말했다. 박정희 숭모제, 탄신제, 초헌관, 아헌관, 그런 요란한 제복과 행사부터 없애라고. 그런 허례허식은 민주주의 시대에 역행하는 왕조시대 일로 고인도 결코 그런 걸 원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 행사를 주관하거나 몰려든 이들은 제 잇속이나 차리는, 또 하나의 최아무개 같은 '똥파리'들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자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의 전역사 한 구절을 약간 바꿔, 5대에서 9대에 이르는 18년 간의 재임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할 최장수 대통령 박정희 편에 마침표를 찍는다. 

"다시는 이 나라에 박정희와 같은 '불행한' 정치인이 없도록 합시다."

(* 다음 회부터는 최규하 대통령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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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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