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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지지 선언했다는 이유로? 황교안은 왜 욕먹나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전두환 정권의 공안 조작 '아람회 사건'

등록 2020.04.16 19:13수정 2020.04.16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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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22일 자 <동아일보>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1년 7월 12일 대전고등학교 3학년 학생 라아무개는 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중학교 친구 최재열의 소개로 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 역사 교사 황보윤식의 집을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라아무개는 황보윤식, 박해전, 김창근 등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다수의 시민들이 사망한 사실을 들어 전두환을 비판하고 미국에 대해 비판적 발언하는 것을 듣는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라아무개는 대전고등학교 교련 교사 이아무개에게 알렸고, 이아무개는 대전경찰서에 신고했다.

대전경찰서 수사관들은 7월 중순경 황보윤식 등을 차례로 연행해 충남도경 대공분실과 대전경찰서 인근 여관에서 충남도경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지원을 받아 조사한다. 한 달 후인 8월 18일 수사관들은 대전지검에 국가보안법위반 피의사건 발생 및 검거보고를 했다. 8월 20일 대전지법으로부터 황보윤식, 김창근 등 8명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대전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하고 9월 7일 대전지검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이에 대해 대전지법은 11차 공판을 거쳐 1982년 2월 11일 판결을 내렸다. 박해전에게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황보윤식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정해숙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김창근 등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등을 각각 선고하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최재열에 대해서는 벌금 50만 원을 선고유예했다.

이 판결에 대해 실형을 선고받은 박해전 등 6명과 검사가 각각 서울고법에 항소했다. 서울고법은 4차례 공판을 거쳐 6월 19일 1심 판결내용 가운데 박해전 등의 반국가단체 구성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다른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했다. 그 결과, 대전고법은 박해전에게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 황보윤식에게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정해숙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김창근 등에게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 등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대해 박해전 등 6명과 검사가 각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1982년 9월 28일 박해전 등이 "민중봉기를 유도해 군사파쇼정권을 타도할 준비를 하면서 북괴 주장과 같은 노선에 따라 행동할 단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에 환송했다.

1983년 2월 16일 환송심에서 서울고법은 반국가단체 구성을 유죄로 인정해, 박해전에게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황보윤식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정해숙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김창근 등에게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 등을 선고했다. 박해전, 황보윤식, 정해숙, 김창근 4명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1984년 6월 14일 대법원이 기각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

재판 진술

실형을 받기 전 피해자들은 당시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1981년 11월 1심 공판과 1982년 5월 6일 서울고법에서 김창근은 이렇게 진술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공분실에서 수사관들이 '다른 사람들은 다 시인한다'며 '왜 부인하느냐'고 하면서 수갑을 채우고 무릎 밑에 곤봉을 넣고 얼굴에 수건을 놓고 그 위에 물을 부었으며 이런 고문을 밤 10시경에 2번 정도 당했다. 1981년 8월 18일 밤 11시경 대공분실에서 대전경찰서로 넘겨져 그곳에서는 검찰이나 법원에서의 신문을 예상해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해 놓고 녹음기까지 틀어놓고 반복해 연습시켰다. 검찰에서 조사할 때 경찰관들이 입회했다가 내가 부인하면 검사가 자리를 뜬 사이에 협박해 사실대로 진술할 수 없었다."

1981년 11월 16일 4차 공판에서 박해전은 이렇게 진술했다.

"대공분실에서 수사관이 머리를 거꾸로 해 수건으로 코를 막고 물을 다섯 번가량 붓는 물고문을 했고,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으며 유서를 쓰라고 협박했고, 대공분실에서 황보윤식과 정해숙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대전경찰서 유치장으로 넘어온 뒤 수사관들이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목록으로 작성하였고, 목록 그대로 자연스럽게 진술하도록 연습을 시킨 후 진술 내용을 녹음했다. 검사실에서 조사받을 때 수사관들이 있었다."

같은 공판에서 정해숙은 이렇게 진술했다.

"대공분실에서 수사관들이 '함석헌, 장준하, 김대중은 용공분자라고 하며 나도 그 사람들과 가까이했으니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물고문, 구타 등을 하였다. 수사관이 검찰로 넘어올 때 말이 다르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했고, 검찰에 조사받으러 갔을 때 담당 수사관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있었다."

1982년 5월 6일 서울고법에서 황보윤식은 이렇게 진술했다.

"대공분실에서 고문에 못 이겨 공소사실과 같은 내용에 대해 시인했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대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뒤 지하조사실에서 꾸며진 결과를 암기하도록 강요받았으며, 검찰에서 고문한 수사관이 검사실에서 입회했다."

같은 재판에서 이재권은 이렇게 진술했다.

"수사관들이 몽둥이로 때리다가 비명을 지르면 입을 틀어막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다른 사람의 자술서를 가져와서 시인하라고 했고, 1981년 8월 20일 정식으로 구속된 뒤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진 뒤로는 검찰이나 법정에서의 신문에 대한 대답을 녹음까지 해가면서 연습시켰고, 고문을 당해 (결국) 당뇨병이 발병했다."

진실위 진술
  

아람회 사건 피해자 기자회견 ⓒ 진실위 자료사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는 훗날 이 사건을 조사했다. 지난 2007년 피해자들은 진실위에서 진술했는데 피해자 박해전은 이렇게 진술했다.

"1981년 7월 19일 대전경찰서 김아무개 경사 등에게 연행되어 눈을 가리운 채 지하조사실에 감금되어 8월 20일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32일 동안 불법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변호인 접견이나 가족들의 면회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누구는 이렇게 진술했는데 왜 너는 얘기하지 않느냐'며 고문과 허위진술 강요를 반복했고, 조사 초기에는 이재권의 자술서를 바탕으로 압박했고, 김아무개가 진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푸레나무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고, 다른 수사관들로부터 여러 차례 폭행과 4차례의 물고문을 받았고, 김아무개 경위가 수사관 7∼8명과 함께 들어와 나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양쪽 턱을 손가락으로 세게 잡아 누르며 이적단체 구성을 인정하라고 했고, 그 후 다른 수사관들이 합세해 온몸을 사정없이 손과 발로 때렸고, 검찰 송치일에 검사실에서 김아무개 등 수사관들이 조사가 끝날 때까지 함께 있었다."


황보윤식은 이렇게 진술했다.

"1981년 7월 16일 학교에서 어딘지 모르는 곳의 지하로 붙잡혀 가서 30여 일간 구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다른 사람들의 진술 내용을 요약한 메모지를 가지고 와서 '그 사람들은 이렇게 진술했으니 너도 사실대로 시인하라'고 하고 부인하면 몽둥이 등으로 무수히 구타했고, 머리채를 잡고 '너 뭐뭐 했잖아'하며 욕조물에 처박았고, 통닭구이를 동반한 물고문을 세 번 받았다."

정해숙은 이렇게 진술했다.

"1981년 7월 23일 금산읍 다방에서 연행되어 보문산 인근의 대공분실 조사실에서 30여 일 구금되었다. 수사관이 '아람회'라고 적혀 있는 체계도를 보여주며 자신이 수괴, 황보윤식이 부책, 박해전이 행동책, 이재권은 재정책 등 아니냐며 추궁해 부인하자, 무릎을 꿇게 하고는 오금에 몽둥이를 끼워서 양발로 올라타서 다리를 압박했고, 이외 여러 차례의 폭행과 통닭구이를 동반한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고, 대공분실에서 박해전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김창근은 이렇게 진술했다.

"천안경찰서 남부파출소에서 순경으로 재직하던 1981년 7월 18일 위 파출소에서 천안경찰서 경찰관에게 연행된 뒤 충남도경 사무실을 거쳐 대공분실로 옮겨져 30여 일간 조사받았다. 연행되고 며칠 지나서 천안경찰서 경무과 직원이 찾아와서 사직서를 받아 갔다. 몽둥이 등으로 10여 차례 구타를 당할 때 양쪽 귀 부위를 심하게 맞아 특히 왼쪽 귀가 잘 안 들리고 이명 증상이 생겨 현재 왼쪽 귀의 청력이 40% 정도 상실되는 등 치유되지 않았고, 이외 통닭구이 물고문 두 차례, 오금에 몽둥이를 넣고 발로 누르는 고문 등을 당했다."

김현칠은 이렇게 진술했다.

"전아무개, 김아무개, 박아무개 등이 손과 몽둥이로 3∼4회 집단폭행했고, 담당 수사관 최아무개는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 '누구는 뭐했다고 하는데 왜 너는 얘기 안 했냐'며 숱하게 몽둥이나 손으로 엉덩이와 얼굴을 때렸고, 전아무개와 박아무개 등으로부터 통닭구이 물고문을 수회 받았다."

김난수는 이렇게 진술했다.

"경찰에서 수사기록이 새로 올 때마다 민아무개, 이아무개 상사에게 맞았으며 총 10여 차례 한 번에 20여 대씩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았다."

김이준은 이렇게 진술했다.

"대전경찰서 유치장에서 박해전을 보았을 때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 있는 등 고문을 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흔적들을 보았다."

신용은 이렇게 진술했다.

"조사실에서 팬티만 입은 채 조사를 받았고, 질문에 대해 부인했다가 따귀를 4∼5대 맞은 적이 있고, 다른 조사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공포심을 느껴 결국 허위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경옥은 이렇게 진술했다.

"대공분실에서 황보윤식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허위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쌍소리를 하는 수사관이 들어와서 '죽어 나갈 수도 있다'고 협박해 수통리 수련회에서 '아침은 빛나라 동방의 타오르는 별' 등 전혀 모르는 북한 노래를 들었다고 하는 등 수사관의 요구대로 허위 자술서를 썼다."
 

최재열은 이렇게 진술했다.

"여관에서의 조사 방향은 황보윤식 등을 간첩 비슷한 사람들로 몰아세우는 것이었고, 질문에 대해 부인하자 머리를 때리거나 '이 자식 혼나봐야 되겠구만'하더니 물이 들어차 있던 욕조로 들어가게 한 뒤 손들고 앉아 있으라고 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결국 수사관들이 가져오는 다른 사람들의 조사내용에 맞게끔 허위자술서를 썼고, 경찰에서 풀려난 뒤에도 담당 형사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어디 가려면 연락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집안의 뒷조사까지 해 심하게 불안하고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검찰에 가서도 황보윤식 선생님이 용공 발언을 했다는 것 등 사실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도 다 인정했으며, 1심 재판을 받는 날 담당 형사에게 전화가 와서 법정에 함께 갔는데 '잘못 얘기하면 재판이 길어지고 또 들어와야 한다'고 부담을 주어서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게 되었다."


진실규명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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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등 위반 혐의로 억울하게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아람회 사건'의 피해자 4명(오른쪽부터 조영건씨, 김현칠씨, 박해전씨, 정해숙씨(맨 왼쪽))과 고 이재권씨의 부인 박천희(가운데)씨, 5.18유공자인 장두석(맨 왼쪽에서 두번째)씨가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있는 고 이재권씨의 묘소에서 사법부가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을 읽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아람회 사건에 대해 지난 2007년 진실위는 아래와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제5공화국 시절 현실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학생, 청년, 교사들에 대해 강제연행·장기구금·고문 등에 의해 자백을 받아 처벌한 사건으로, 대전경찰서는 대전고등학교 학생 라아무개의 제보를 받고 같은 학교 교련 교사가 전화신고를 한 것을 계기로 피해자들이 주거지, 식당 등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대해 비난하거나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것을 빌미로 수사에 착수해 이들을 불법 연행한 후,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약 10일 내지 35일 동안 가족 및 변호인의 접견을 차단한 채 충남도경 대공분실과 여관 등에 불법 감금한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해 허위자백을 받았고, 이 자백을 근거로 해 반국가단체 구성, 찬양고무 등으로 처벌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진실위 결정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5월 21일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이 28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등법원은 이날 '아람회 사건' 재심 판결에서 1981년 계엄법 위반혐의 등으로 기소돼 중형을 선고받고 징역을 살았던 박해전 등 6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그날 판결을 하며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말부터 정권의 안정을 기할 목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아람회 사건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피고인들에게 고문, 폭행, 협박 등 불법적 수단을 사용해 친목회를 반국가단체로 조작하고, 구성원들을 좌익용공세력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신군부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맞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피고인들에게 유죄판결한 원심을 파기한다.

당시 재판부는 혹독한 고문에 허위자백을 했다는 피고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늘의 법관들은 오욕의 역사를 되새기며 선배 법관들을 대신해 억울하게 고초를 당하고 힘든 여생을 살아온 피고인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힌다."


피해자 성명
  

아람회 사건 피해자 기자회견 ⓒ 진실위 자료사진

 
그러나 공안검사 출신으로 지난 2015년 박근혜 정권의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황교안 미래통합당 전 대표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사건인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3월 30일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은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황교안이 짓밟은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의 원상회복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전두환 5공 내란반란정권의 아람회 사건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로서 2015년 2월 26일 피고 대한민국, 법률상 대표자 황교안에 의해 침해된 인권의 신속한 원상회복을 문재인 대통령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에게 요청합니다.

박근혜 정권의 법무부 장관 황교안은 피고 대한민국 법률상 대표자로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을 한 김지하 사건 배상과는 전혀 다른 이중기준을 적용해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을 한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의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부당하게 가로막은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을 가로막아 또다시 피눈물 나는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박근혜 정권의 피고 대한민국 법률상 대표자 황교안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회정의의 추구'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러나 항상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황교안의 삶의 행적에서 나는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나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권력추구형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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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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