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공장 하나 때문에 마을 전체가 중금속에 오염됐습니다

[영풍과 환경오염 ③] 물돌이 옥토를 차지한 영풍 석포제련소

등록 2020.04.18 20:13수정 2020.05.04 15:27
11
원고료로 응원

영풍 석포제련소가 들어서기 전인 1968년 3월의 석포마을과 석포제련소 공장 터. 두 달 뒤 1공장 터에서 제련소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 국토지리정보원

 
경북 봉화군에서 가장 험한 산악지대인 석포면의 심장부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석포마을과 영풍 석포제련소가 마주하고 있다. 산 좋고 물 맑은 해발 500m의 강가 땅에 석포마을이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지만 50년 전 석포제련소가 불청객으로 찾아와 주인 자리를 차지했다.

석포마을은 내와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마을 왼편으로는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석개천과 석포리천이 흐른다. 오랜 세월 하나의 강과 두 개의 내가 만나면서 삼각형의 완만한 땅이 생겨났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터를 잡았다. 사람들은 마을 주변의 평지와 산등성이를 따라 논과 밭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했다.

석포마을을 감싸듯 흐르는 낙동강은 석개천과 석포리천을 합류한 후 석포제련소 공장 터를 크게 몇 번 휘돌아 나간다. 물살이 빠른 쪽은 침식이 일어나 가파른 사면이 되고 물살이 느린 반대편은 강물에 실려 온 퇴적물이 쌓여 평평하거나 경사가 완만한 물돌이 땅이 되었다.

이 과정은 무수히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났다. 46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한 이래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된 자연 현상의 결과였다.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풍화와 침식, 퇴적 작용이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단단한 암석이었던 곳이 농지가 되고 마을이 되었다.

석포제련소가 들어서기 전 공장 터는 논과 밭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강물에 실려 온 영양물질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땅이어서 비옥했을 것이다. 1공장 터는 석포의 강가 땅 중에서 가장 넓고 평평한 곳이다. 평지가 드문 석포에서 편안함과 아늑함을 주는 특별한 땅이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귀한 옥토였던 땅이 영풍의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땅이었다. 영풍이 1961년부터 개발한 연화광산은 석포역에서 북서쪽으로 8km 떨어진 송정리천 가에 있었다. 연화광산에서 채굴된 아연과 납은 선광(불순물을 제거하고 광물의 함유량을 높여 정광을 만드는 과정) 처리되어 트럭으로 석포역까지 옮겨졌고 열차로 부산으로 운반되어 일본에 수출되었다. 넓고 평평하면서 교통이 편리한 물돌이 땅은 제련소가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환경법규는 미비했고 법 있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2018년 10월의 ㈜영풍 석포제련소. ㈜영풍의 전신이었던 영풍상사(주)가 1968년 5월 착공을 해서 1970년 10월 1공장 터에 제련소를 완공하고 가동을 시작했다. ⓒ 구글지도

 
영풍이 아연제련소 건설을 추진할 당시 일본에서는 이타이이타이병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라 있었다. 이타이이타이(아프다 아프다)병은 카드뮴에 의해 뼛속 칼슘이 녹으면서 신장장애와 골연화증 등이 나타나는 병이다.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은 도야마현 진즈강 상류에 있는 미쓰이 금속광업의 가미오카 광업소에서 흘려보낸 카드뮴이었다.


<전후일본공해사론>(미야모토 겐이치 지음, 김해창 옮김, 2016)에 따르면, 이타이이타이병은 1910년대부터 있었지만 원인불명으로 방치되고 있다가 1950년대 일본 의학계에 의해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 정부가 연구위원회를 구성했고 1968년 5월 이타이이타이병이 카드뮴 공해병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환자와 사망자 유족들은 미쓰이 금속광업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카드뮴으로 인한 피해는 도호아연의 안나카제련소에서도 나타났다. 안나카제련소는 1937년 군마현 안나카시에 설립된 아연제련소이다. 제련소 가동 이후 아황산가스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공장폐수로 인한 토양오염 피해가 나타났다. 1968년 5월 일본 정부가 이타이이타이병을 공해병으로 인정하자 안나카에서도 카드뮴 오염 조사와 주민건강검진이 시작되었다. 1972년에는 피해 농민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4년이란 긴 재판 투쟁 끝에 보상이 이루어졌다.

영풍의 아연제련소 건설은 환경오염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던 일본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1968년 5월 영풍은 석포제련소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석포제련소 가동 한 달 전인 1970년 9월에는 <경향신문>이 로이터 보도 내용을 인용해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도했다.
 
"환경오염에 대한 일반의 아우성 소리가 점점 드높아짐에 따라 일본의 대산업체들도 수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생산을 줄이든지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자 일본 내나 혹은 해외에 새로운 공장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중략) 중부지방에 있는 니뽕광업의 두 아연공장은 40% 생산 감축 조치를 취하고, 일본 동부에 있는 도호아연 공장도 연간 생산량 1만1,600톤을 삭감했으며, 북부지방에서도 한 아연 및 납 제련공장이 생산 감축 조치를 했고, 스미도모의 한 공장은 완전히 생산을 중단했다." (경향신문 1970.9.29.)
 
일본에서는 환경오염 문제로 아연제련 공장들이 생산을 감축하거나 중단하고 있었지만 근대화가 시대정신이었던 한국에서는 자연의 소중함이나 환경오염의 위험성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무소불위의 힘으로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환경법규는 미비했고 법이 있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도호아연의 기술로 설립된 영풍 석포제련소

영풍은 아연제련소 건설을 위해 외국자본을 도입하고자 했다. 경제개발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가 1965년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일본 차관을 받아들이자, 영풍은 이듬해에 294만 달러의 일본상업차관을 신청했고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지급보증이 발급되지 않아 상업차관 도입이 무산되자 연화광산 탐광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던 도호아연(東邦亞鉛)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받는 방법을 선택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영풍은 도호아연으로부터 일체의 기술지원을 받았고 자재와 기기도 일본에서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동방아연Co.는 얼마 전에 한국의 영풍상사에 전기아연 생산기술을 원조하는 가계약을 맺었다. (중략) 계약에 의하면 약 15억 원의 자금을 들여 영풍상사가 제련공장을 건설, 연산 약 1만 톤의 전기아연과 2만 톤의 유산(황산)을 생산하는데 동방아연Co.는 이 제련공장의 건설, 취업자의 훈련 등 일체 기술 지도를 맡게 되며 지도료는 약 1억 원에 달한다. 또한 약 8억 원의 건설자재, 기기 등도 일본에서 수출한다." (매일경제 1969.1.28.)
 
석포제련소는 오염방지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가동에 들어갔을 것이다. 영풍이 외국자본과 합작하여 1974년에 설립한 고려아연의 경우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 건설 공정이 70% 진행되었을 때 <동아일보>(1977.8.13)는 "선진제국에선 전 공장시설비의 20%가량을 공해방지시설에 투자하고 있다는데 고려아연은 시설비의 0.6%도 안 되는 2억 원을 공해방지시설비로 책정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영풍은 연화광산과 석포제련소를 통해 급성장을 이루었다. 성장엔진을 멈출 수 없었던 영풍은 연화광산의 아연광석이 점점 고갈되어가자 1980년대 중반부터 외국에서 아연정광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993년 연화광산 채굴이 중단된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아연정광을 수입해서 제련소 가동을 이어갔다.

석포제련소의 아연괴 생산 규모는 1970년 연간 9000톤에서 1991년 9만 톤, 2001년 22만 톤, 2019년 40만 톤으로 확대되었다. 영풍 석포제련소는 시설 확대와 개선을 통해 성장을 거듭했고 오늘날 세계 4위의 아연제련업체가 되었다(고려아연이 세계 1위이다).

영풍의 성장과 함께 석포의 땅은 중금속으로 오염

영풍이 성장하는 동안 평평하고 아늑하던 석포의 물돌이 땅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옥토에는 중금속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연괴 생산 규모가 커지고 영풍이 성장할수록 제련소 부지와 주변 땅은 더 넓고 더 깊이 중금속으로 오염되었다.

2014년 석포제련소 주변 땅이 중금속에 오염되었다는 환경안전건강연구소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오염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제련소 부지와 주변 땅에 대한 환경부의 정밀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제련소 부지와 주변 석포리·승부리의 땅이 중금속에 광범위하게 오염되었음이 밝혀졌다.

제련소 부지인 1공장 원광석 보관장과 3공장 동스파이스 보관동 뒤편의 경우 여러 지점에서 표토로부터 60cm에서 4m 깊이까지 비소, 아연, 카드뮴, 납 등 4개 항목 이상의 고농도 복합오염이 나타났다. 1공장 부지와 2공장 부지도 지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표토로부터 3m 깊이까지 5개 항목 이상의 고농도 중금속 복합오염이 확인되었다. 제련소 부지의 오염원인은 운영 과정에서의 흘림이나 취급부주의 등으로 판단되었다.

제련소 부지뿐만 아니라 제련소 주변 석포리와 승부리 등의 마을과 임야에서도 광범위한 오염이 확인되었다. 오염원인은 아연제련 공정에서 발생한 배출 분진이었다. 배출 분진에는 매우 높은 함량의 중금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련소 반경 2km 이내는 배출분진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련소 반경 1.5km 이내에 있는 석포마을 전체를 포함해서 주변 농지와 임야 등이 심각하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봉화군은 다섯 차례에 걸쳐 토양정화명령을 내렸다. 전체 정화예상면적은 64만㎡이고 정화예상부피는 49만㎥에 이른다. 정화예상면적의 8.2%만 공장 부지이고 나머지는 마을과 농지, 임야 등이다.
 

봉화군의 오염토양 정화조치명령 ⓒ 손영호

  
토양정화명령에 따라 석포제련소가 정화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매우 더디다. 2015년부터 정화명령이 내려졌지만 2019년 10월 현재 석포초등학교 운동장 932㎥, 석포중학교 운동장 5577㎥만 정화가 완료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체 정화예상부피의 1.33%에 불과한 양이다. 정화가 완료되지 않은 곳의 이행상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화기한도 연기되고 있다. 봉화군이 제련소 부지의 오염 토양에 대해 2017년까지 정화를 완료하라는 1차 명령을 내렸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2019년까지 완료하라는 2차 명령을 내렸지만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영풍의 소송에 의해 현재는 정화기한이 2020년 3월과 6월로 연기되어 있다.

석포제련소 측은 오염토양을 그 자리에서 정화할 수 없는 경우 외부로 반출해서 정화작업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제련소 부지의 경우 공장건물 하부에 있는 토양을 긁어내야 하는데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는 작업이 불가능하다고도 한다.

정화작업은 오염물질 제거 아닌 이동에 불과

석포제련소가 가동된 50년 동안 제련소 부지와 주변 땅이 중금속에 오염되면서 석포의 생태계는 훼손되었다. 땅속과 땅 위의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농사가 안 되어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기도 했고 남아 있는 주민들도 어려움을 호소한다.

토양정화작업을 하면 석포의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을까? 오염토양을 퍼내고 새 흙으로 채우면 이전보다는 나아지겠지만 복잡하면서도 경이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원래의 생태계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염이 되어도 정화하면 된다는 믿음은 오히려 오염을 정당화할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화방식도 문제다. <석포초등학교&중학교 오염토양 정화사업 정화검증 용역>(경기환경과학연구원, 2019.11.) 보고서에 따르면 오염 토양을 세척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데, 토양세척 중 발생한 폐기물(세척자갈 및 전석, 슬러지)은 ○○시멘트, ○○개발과 같은 건설자재 회사로 보내졌다. 오염 토양에 들어있던 중금속이 폐기물로 분리돼 건설자재로 재활용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최병성, 2015)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집 짓는 데 사용되는 시멘트는 석회석에 산업폐기물을 섞어 만들어진다. 석포초등학교와 석포중학교의 오염토양에는 1급 발암물질인 비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척과정에서 분리된 비소가 시멘트로 변해 다른 콘크리트 건물 속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정화는 오염물질의 제거가 아니라 이동에 불과하다.

시멘트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다. 환경부는 시멘트에 유해물질이 포함되어 있어도 굳으면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시멘트는 실내의 습기를 흡수하고 내뱉으며 화학작용을 반복하는 불완전한 물질이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수명은 30~40년 정도라고 한다. 중금속이 포함된 시멘트로 아파트를 짓는 것은 중금속의 처리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땅속에서 캐낸 중금속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염된 땅을 오염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도 없다. 자연에는 자생력이 있지만 한 번 파괴된 생태계가 원래대로 회복되지는 않는다. 차선책이 있다면 그것은 오염을 멈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오염원을 그대로 두고 정화작업을 하는 것은 모순이다.

영풍(永豊) 석포제련소는 물돌이 땅에 세운 영풍제국에서 영원한 풍요를 누리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석포제련소도 언젠가 문을 닫아야 한다. 그 언젠가가 내일일 수는 없는가?
덧붙이는 글 다음 연재 글은 ‘④ 이곳은 ‘석’포가 아니다’입니다.
#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댓글1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윤 대통령, 달라지지 않을 것... 한동훈은 곧 돌아온다"
  3. 3 왜 유독 부산·경남 1위 예측 조사, 안 맞았나
  4. 4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5. 5 창녀에서 루이15세의 여자가 된 여인... 끝은 잔혹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