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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봄인데, 이 꽃향기 못맡으면 서운해요

[만고땡의 식물 이야기] 신화 속 주인공, 히아신스

등록 2020.04.12 11:10수정 2020.04.1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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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히아신스 향 한번 못 맡고 지나가나 싶었다. 봄이 오는지 마는지 정신이 없고 그나마 마스크를 사러 외출한 날, 약국 옆에 있는 꽃집에서 히아신스를 샀다.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복원해 보자는 각오를 가졌다.


나는 알뿌리 식물, 알줄기 식물은 다 좋다. 봄의 전령사다. 관리가 쉬운 편이라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어서 좋고, 하나 같이 꽃이 이색적이고 예뻐서 좋고, 향기로워서 좋다. 요즘 한창 피어나는 수선화와 튤립, 무스카리가 대표적인 봄 구근 식물이다. 프리지어와 크로커스도 구근 식물로 불리지만 사실은 구경, 알줄기 식물이다.

봄, 히아신스 만나기 좋은 계절입니다

히아신스를 처음 보면 영락없이 양파 같다. 요 양파처럼 생긴 통통한 알뿌리에 영양과 수분을 가득 저장해 두고 있어 물과 햇빛 조절을 세심하게 하지 않아도 자기가 가진 영양으로 충분히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참 신통방통하다.

히아신스는 수경 재배로 키우는 것도 좋다. 양파 키우는 거랑 같다. 적당한 용기에 물을 채우고 양파처럼 생긴 알뿌리를 얹어두면 된다. 단, 알뿌리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한다. 투명한 용기에 키우면 알뿌리에서 자라는 하얀 수염 뿌리도 볼 수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에서 키우는 경우에 꽃이 더 풍성하게 자랐다.
 

히아신스 알뿌리가 온전하게 보이도록 심는다. 꽃이 피기 전에 모습이 참 예쁘다. 이제 곧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 김이진

 
알뿌리 식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가을 즈음 신문지에 둘둘 말린 알뿌리를 몇 개 받았다. 집에 와서는 알뿌리가 보이게 심으란 말만 기억나고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심으면 과연 뭐가 자라긴 하나 싶었다. 그냥 둘 순 없어 화분에 주섬주섬 흙을 담아 알뿌리를 심었다. 알뿌리에 독성이 있는지 맨손으로 조물락 만졌더니 피부가 붉어지면서 근질근질했다.

늦가을에 심어두고 거의 잊다시피 했다. 겨울 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너무 마르지 않을까 염려가 돼서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동면을 하는 식물인가 싶을 정도로 고요하더니 오오, 초록색의 뾰족한 새순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정지 화면처럼 멈춰 있다가 까맣게 색이 변하며 죽어 버렸다.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물렀던 모양이다. 그대로 자랐다면 그 다음해 4~6월쯤에 꽃을 피웠을 텐데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봄이 되면 꽃집에서 히아신스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걸. 본래 히아신스는 터키와 발칸반도 지역이 원산지인데 우리가 보는 히아신스는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생산한 것을 수입해 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만난 알뿌리는 겨울을 나지 않은 것이고, 봄 시즌 꽃집에서 만나는 히아신스는 수입한 알뿌리를 겨우내 싹 틔우고 개화 준비를 끝낸 상품이다.

히아신스는 알뿌리에서 튤립처럼 생긴 매끈한 잎이 돋아나고, 중앙 부분에 꽃대가 올라온다. 나는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전, 잎 사이에서 야무지게 앙다물고 있는 꽃봉오리 상태가 참 좋다. 단단한 뿌리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겨울 동안 땅 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조금씩 영양을 모으고, 기다리고, 봄을 맞이하는 모습은 뭔가 대단하다.

꽃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고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성질이 어찌나 급한지. 꽃 피우는 게 절정에 이르면 밤 사이에도 으라차차 기지개 켜듯 꽃을 부지런히 피워낸다. 참고로 온라인 배송으로 히아신스를 주문했다가 꽃이 다 핀 히아신스를 받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시간의 흐름을 한 번에 보여주는 것처럼 급격하게 변화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세요?" 묻고 싶어질 정도로 쑤욱 자란 꽃을 볼 수 있다. 별처럼 생긴 작은 꽃잎들이 촘촘하게 모여 하나의 꽃덩이가 된다. 나는 그냥 꽃방망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아래쪽부터 꽃이 피어난다. 작은꽃들이 모여 큼직한 꽃방망이가 된다. 향은 또 어찌나 향기로운지 ⓒ 김이진

 
꽃이 필 때는 서늘하게 해 주는 것이 좋다. 실내가 따뜻하면 급한 성질이 더 급해진다. 하루 이틀 사이에 활짝 피어 무거운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푸욱 쓰러진다. 게다가 알뿌리 식물 중에서도 향이 아주 강한 편이라 밀폐된 공간에서는 독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한 송이만 피어도 집 전체에 향이 난다. 환기를 자주 해주자.

뿌리 색소에 따라 달라지는 꽃 색깔

그리고 재미난 점 하나. 히아신스는 흰색, 분홍색, 보라색, 청보라색, 다양한 색감이 있다. 나는 꽃 색이 복불복인 줄 알았다. 어느 히아신스 뿌리에서는 흰색 꽃이 피어나고, 어느 뿌리에서는 보라색이 피어나고 종잡을 수 없었다. 어찌나 무지했던지. 한참 뒤에야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알뿌리의 색소가 흰색을 띠고 있으면 흰색 꽃을 피우고, 붉은색 톤이면 붉은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알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진짜 신기했다.

히아신스는 꽃이 지고 난 뒤 관리가 어렵다. 모든 꽃이 그렇듯이. 알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정석대로 하자면 잎을 자르고 알뿌리를 수확해서 저온 처리를 거친 뒤 늦가을에 다시 심어야 한다. 근데 참 번거롭다. 구근을 건강하게 보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꽃이 지고 난 뒤 미련 없이 알뿌리를 버린 적도 있다. 나쁘지 않다. 식물 가족을 늘리지 않아도 되니 가뿐하다.

나는 고민하다가 아이비와 함께 심는 방법을 즐긴다. 물 줄 때 조금씩 물도 함께 먹을 수 있고, 햇빛도 쬐고 그럭저럭 살만하다. 그러다 꽃이 지면 잎이 누렇게 될 때까지 충분히 영양을 거둬들인 뒤 잎을 잘라버리고, 알뿌리는 그대로 둔다. 안타깝지만 튤립이나 히아신스는 해를 지나면서 알뿌리 영양이 소모된다. 다음해에는 꽃이 부실하게 피고, 그 다음해에는 잎만 돋아나거나 그런 식이다. 그만큼 알뿌리의 영양이 중요하다. 
 

히아신스와 아이비를 함께 심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의외로 건강하게 잘 자란다. ⓒ 김이진

 
옆지기가 꽃 피운 히아신스를 물끄러미 보더니 한마디 한다.

"신화 속 주인공이 생각보다 별로네요."

여보셔, 간신히 봄 기분 좀 내보려는데 분위기 깨긴.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로신과 원반 던지기를 하던 미소년이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질투어린 바람을 맞아 숨진 자리에서 히아신스가 피었다고 한다. 신화와 현실 사이는 본래 까마득하게 먼 것이고, 구체화된 실재란 뭐 그렇다. 사람 눈이란 이렇게 다르구나. 내 눈엔 신화처럼 예쁘기만 한데.
#히아신스 #구근 식물 #봄 식물 #식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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