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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환희'에서 '코로나 사이렌'까지... 극적인 영국의 100일

[런던아이 LondonEye ⑤] 번영 약속했던 존슨 총리는 지금 감염 상태로 병원에 있다

등록 2020.04.11 11:47수정 2020.04.1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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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19의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해 미국 등에서 최근 수개월내 실업자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수준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사진은 영국 런던의 테임즈강변. 웨스트민스터 다리 건너로 국회의사당 등이 보인다. ⓒ 김종철


창 밖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누군지 모를 응급환자를 실은 구급차다. 영국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정말 쩌렁쩌렁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이 소리를 요즘 들어선 하나 둘씩 세고 있다. '오늘은 몇 번 들었지?'라고... 텔레비전을 켜고, 식사 준비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오늘의 데이터를 챙긴다.

10일 오전(영국 현지시각) 확진자는 모두 6만5077명, 사망자 7978명으로 8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곳 뉴스는 연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건강 상태와 총리 대행의 권한과 책임을 두고 말들이 많다. 지난 3월 27일 서방 주요 국가 정상 가운데 유일하게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 됐던 그였다. 총리실은 지난 9일 오후 "총리의 건강 상태가 호전돼,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평상시와 같은 치료를 받고 있다"라고 전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총리관저가 있는 곳)로 언제 돌아올지 아직 모른다. 

9일은 코로나19가 세계보건기구(WHO)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날짜를 뒤로 돌려보면, 지난해 12월 31일이다. 이날 중국은 WHO에 후베이성 우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페렴이 발생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공식적'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보건학계에선 이미 지난해 12월 초에 코로나19로 인한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이 왜 12월 마지막 날에 코로나19를 세상에 알렸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과 WHO 지도부와의 유착 등 온갖 이야기들이 여전하지만, 그날 이후 100일 만에 온 세계는 1918년 스페인 독감, 1930년 대공황에 버금가는 혼란에 빠져 있다. 과연 이 혼란을 누가 예상했을까. 존슨 총리의 말대로, 영국도 그 100일을 '극적으로(dramatically)' 보내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잠시 시계를 돌려보자.

[100일 전 12월 31일] 존슨의 영상 메시지 "성장과 번영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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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존슨 영국총리는 23일 오후(현지시각) 대국민성명을 통해 "수퍼마켓과 약국 등 필수 업종을 제외한 모든 상점들은 즉시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국민들은 집에 머물러야 하며, 3명이상 모이는 집회도 금지된다. 이번 조치는 3주동안 시행된다. 사진은 총리관저 TV 화면 캡처. ⓒ 김종철


지난해 12월 12일 영국은 사상 초유의 '크리스마스 총선'을 치렀다.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밀어붙이던 존슨 총리가 '조기 총선'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고, 일부 야당 등이 호응하면서 이뤄졌다. 1923년 이후 거의 100년 만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선거를 치른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지만, 우리로 따지면 대통령 선거나 다름없다.

집권 보수당은 브렉시트의 조기 실현, 노동당은 정권 심판론으로 맞섰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는 보수당의 압승이었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라는 성적표를 받았고, '트럼프의 꼭두각시'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존슨 총리는 새로운 리더로 떠올랐다.

12월 31일, 존슨 총리 역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처럼 새해 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비비씨(BBC) 등 방송에 나와 "2020년은 성장과 번영, 기회로 가득찬 흥미로운 10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고, '희망'과 '약속'이라는 메시지로 연설의 대부분을 채웠다. 스마트폰으로 중계된 그의 연설을 뒤로 하고, 나는 런던 시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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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영국 런던의 옥스퍼드 서커스 거리. 수많은 사람들이 연말 쇼핑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 김종철


세밑 영국 런던 중심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유명 상점 등이 몰려 있는 피카딜리와 옥스퍼드 서커스 등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국회의사당 주변과 웨스트민스터 등 일부 구간은 아예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다. 새해맞이 불꽃 축제 때문이다. 이날 저녁께 도착한 버킹검 궁전 앞에도 이미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내 주변 곳곳에선 다양한 언어가 들려왔다. 


1월 1일 0시가 가까워오자 그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높이 들었다. 런던의 상징인 시계탑(빅밴)의 종소리와 함께, '런던 아이' 대관람차 주변 밤하늘은 화려한 불꽃으로 장관을 이뤘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포옹하며 "해피 뉴 이어"라며 인사를 나눴고, 독일에서 온 한 청년은 '노 브렉시트(No, Brexit)'를 외치기도 했다.

[1월 31일] 역사적인 브렉시트... 코로나19는 국제뉴스 단신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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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1일 영국 런던 버킹검 궁전 앞.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보고 있다. ⓒ 김종철


그렇게 2020년이 시작됐다. 이후 영국은 오로지 '브렉시트'였다. 지난 43년 동안 유럽의 일원으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 등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을 전망하느라 바빴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사회 등 각 부문에서 '브렉시트'는 말 그대로 '가 보지 않은 세계'였다. 

1월 31일 11시, 영국은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BBC 등 주요 방송은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본부 건물 앞 국기 게양대에서 영국 국기가 내려지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영국과 유럽연합의 국경이 맞닿은 곳에서 기자들의 현장 리포트도 이어졌다. <더 타임스> 등 주요 신문도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특별판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영국에서 코로나19 관련 소식은 국제뉴스의 단신에 머물 정도였을 뿐이다. 2월 들어 한국을 비롯해 일부 아시아 국가로 확산 기미를 보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월 말께 이탈리아 북부에서 코로나19 확진 사례가 크게 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들도 그제서야 조금씩 관련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나 공공기관 어디에서도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적극 알리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영국인들에게 코로나19는 과거에도 나왔듯이 '또 하나의 플루(flu)'로 여겨지는 듯했다.

[3월 3일] 존슨 총리 회견 "잘 준비하고 있다"... 현장에선 "헛소리(bull s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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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구급차들이 환자를 실어 나르고 있다. ⓒ 김종철


3월 초까지만 해도 TV엔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서로 악수하며, 볼키스 등을 하는 장면들이 자유롭게 나왔다. 심지어 3월 3일 존슨 총리는 코로나19 관련 기자회견 자리에서 "잘 준비하고 있다"라면서 자신이 병원에서 사람들과 만나 악수를 나눈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병원은 이미 코로나19 확진자가 수십여 명 나온 곳이었다. 총리 스스로 기본적인 방역 수칙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었지만, 주변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다. 또 바이러스 관련 정부 브리핑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하기로 했다가, 뒤늦게 하루에 한 번으로 고쳤다. 이날 런던 스탬퍼드 브릿지 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영국 FA컵 5라운드 첼시 대 리버풀 경기엔 수만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3월 13일 회견에서는 논란의 '집단 면역' 이야기가 나왔다. 집단 면역은 감염 등으로 한 집단에서 일정 비율 이상 면역력을 갖게 되면, 그 집단 전체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패트릭 발란스 영국 최고과학보좌관은 이날 별도의 도표까지 보여주면서 "우리 목표는 바이러스를 전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정점이 되는 시기를 늦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환자들 대부분이 가벼운 증상을 보이거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라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면역이 생길 경우, 일종의 집단 면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같은 정부 계획은 거대한 후폭풍을 가져왔다. 감염병 전문가들 사이에서 코로나19가 다른 독감 등에 비해 치명률이 매우 높다는 반론이 제기됐고, '국민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도박'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옵서버>는 3월 15일자 신문에서 영국 대형병원 호흡기 내과의 한 시니어 의사 이야기를 실었다. 해당 의사는 "존슨 총리는 우리의 NHS(국민보건서비스)가 코로나19에 준비가 잘 돼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헛소리(bull shit)"라고 비판했다. 그는 "의료현장에 마스크와 고글조차 제대로 없다"라면서 "만약 이탈리아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우리도 80세 환자와 30, 40대 환자 가운데 누굴 먼저 치료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라고 토로했다.

[3월 23일] 결국 런던 '록 다운' 선언... 모든 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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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신문 <더 데일리 테라그래프>의 지난 3월24일치 1면. 전날(23일) 보리스 존슨 총리가 영국 전역의 학교 휴교를 비롯해 모든 카페와 펍, 식당 등의 문을 닫도록 지시한 내용을 '자유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머릿기사로 담고 있다 ⓒ 김종철


영국 정부는 3월 16일 영국 런던 한 대학의 '20만 사망 가능성 보고서'가 나온 뒤, 사실상 집단 면역 전략을 폐기했다. 이어 3월 20일부터 모든 학교의 휴교와 함께 카페와 펍, 식당 등의 문을 닫도록 했다. 존슨 총리는 이어 3월 23일 저녁 대국민 성명을 통해, 슈퍼마켓과 약국 등 필수 영업장을 제외한 모든 가게의 영업을 중단시키고,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3월 27일, 존슨 총리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맷 핸콕 보건부 장관을 비롯해 내각 일부 장관들도 확진 판정을 받고 자가격리에 들어가기도 했다. 코로나19 전쟁을 지휘할 국가 지도부마저 방역에 허점을 보인 셈이다. 이후 영국의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연일 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제 이탈리아·스페인이 강력한 통제로 확진 사례가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주말마다 수만여 명의 함성으로 가득찬 런던의 많은 축구 경기장과 주변 펍은 적막한 곳이 돼 버렸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바글거리던 런던 주요 명소는 썰렁한 모습 그 자체다. 햇볕 쐬러 공원에 나온 시민들 옆으로 경찰이 다가가 귀가할 것을 종용하는 장면도 눈에 띈다. 또 여전히 적지만,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회사 업무와 학교 수업도 온라인으로 대체 되면서 사람들은 또 다른 생활에 적응하느라 애 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단 몇 주만에 이뤄진 일들이다.

<가디언> 칼럼니스트 조나단 프리드랜드는 "총리가 100일 전에 예상했던 모든 것은 실현되지 못했다"라면서 "2020년은 결코 성장과 번영의 해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그는 "지금 중요한 것은 사느냐 또는 죽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창 밖으로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사이렌 소리를 뒤로, 나는 다시 집 밖을 나선다. '오늘 슈퍼마켓의 대기 줄은 얼마나 길까'라는 생각으로.
#런던 아이 #보리스 존슨 #코로나바이러스19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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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연재 코로나19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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