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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 귀국 도운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얘기는 더 감동적"

[인터뷰] KOICA 창립 29주년, 창립멤버였던 국제개발협력 전문가 송인엽 전 소장

등록 2020.04.13 10:19수정 2020.04.1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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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엽 전 소장 ⓒ 이안수

[기사 수정 : 14일 오전 9시 3분]

2003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한 고등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형과 아버지 이렇게 세 식구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1년 동안 태국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었던 어머니는 은퇴를 하자마자 평소 소원이던 타국에서의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1년 동안 봉사를 택한 그녀의 실천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2018년 5월 캄보디아 방문길에 두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반떼이민쩨이주의 주도인 시소폰(Sisophon)에 있는 민쯔이대학교(Mean Chey University, MCU)와 바탐방 주의 주도인 바탐방에 있는 바탐방대학교(UBB, University of Battambang)였습니다. 두 대학 모두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어 있었고 그 교수진은 대부분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봉사단인 월드프렌즈코리아(WFK)와 중장기자문단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코이카가 2003년 캄보디아 사무소를 개소한 이후 가장 많은 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가 한국어교육입니다. 그곳에서 교직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은퇴자들이 재교육을 받고 한국의 가족과 떨어져 최소한의 체류비용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참고 : 바탐방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한국어 말하기 발표 https://youtu.be/Mj9podb7WLA)

제가 부러워했던 미국 고등학생 어머니 같은 선택을 한 수많은 한국인이 세계 곳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음을 확인한 기쁨은 제가 한국인이라는 큰 자부심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한국인이 개발도상국가로 봉사를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외교부 산하의 원조전문기관인 KOICA에서 수원국의 필요를 조사하고 최소한의 체류비 지원과 안전을 담보하는 시스템 덕분입니다. 지난 4월 1일은 KOICA가 창립된 지 29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수원국에서 공여국이 된 대한민국은 은혜를 갚는 도의적 역할을 함과 동시에 많은 개도국의 희망과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 한국의 우정과 개발경험을 전파하고 있는 KOICA의 역할과 그리고 앞으로의 기대들에 대해 듣기 위해 코이카 창립멤버의 한 사람으로 KOICA 8개국 해외사무소장 역임 후 한국교원대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했던 송인엽 전 소장을 만났습니다.


#1

- 2018년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유라시아 대륙을 마라톤으로 횡단한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와 일정을 함께하며 후원을 해오셨잖아요. 평화마라톤 후원일은 계속하시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는 인류 아니 생명체 유일무이하게 지구를 이미 한 바퀴 발로 뛰었지만 내건 두 가지 목표가 이 지구상에 안착될 때까지 계속 달려야 하니까요. 5월에 한라산 백록담에서 시작해 남한을 종주해 백두산 천지까지 달리는 일을 기획했는데, 불행히도 코로나가 만연하여 시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실행하게 되면 DMZ까지야 문제없겠지만 평양에서 길을 열어주어야 북녘땅 종주가 가능하니까, 북쪽에 성의를 다해 요청해 보고 답이 없다면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수까지 2개월 동안 달릴 예정입니다. 10월에는 베트남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2500km를 우리의 2가지 목표에 해원상생(解寃相生)의 기치를 추가해서 2달 동안 종주할 예정입니다." (관련 기사 : 두 다리로 유라시아 건넌 강명구 "최고의 한류스타는 김정은" http://omn.kr/1ehgl)

- 2중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기획이군요. 북한의 입장과 코로나19의 팬데믹 장벽을...
"예, 하지만 평화통일 노력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니 노력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 이번에는 KOICA에 대한 얘기들을 여쭙고 싶습니다. 지난 4월 1일이 코이카 창립 29주년(1991년 4월 1일 창립)이었잖아요. 송 소장님께서 직접 코이카의 창립에 참여하셨지요?
"코이카 창립이야 국가적인 결정이었지요. 저는 당시 하위 실무자로서 법안 준비에 필요한 자료 수집 등 기본적인 일에 열심이었죠. 그리고 1991년 3월 말에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국제협력단법이 통과되어 보람을 느꼈죠. 그 후 코이카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국내의 모든 실무부서는 물론 8개국의 해외사무소장을 포함해 23년간 몸을 담았었습니다."

- 코이카 출범부터의 활동이 우리나라에서 전례 없던 소중한 경험들이군요. 그때 쌓은 전문성들이 묻히기는 아쉬운 일인데...
"네. 2013년 4월 정년퇴직 후에는 대학과 기관이나 기업에서 특강을 통해, 또한 NGO에 자문역할을 하며 그동안의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원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는 외교학의 전문분야인 국제협력을 정규과목(3학점)으로 가르쳤습니다."

- 코이카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이 나라마다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리 빈국이라 하더라도 모든 나라들은 대통령도 있고 외교부와 국방부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협력단이 정부기구로 있는 나라는 세계를 통틀어 20여 나라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 국제개발처(USAID,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라고 1946년 설립되어 비군사 원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영동AID아파트 기억하시지요? 이 아파트들이 USAID로부터 받은 차관으로 지은 아파트입니다."

- 그래서 영동AID 차관아파트라고 했지요? 지금은 삼성동 힐스테이트로 재건축되었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이 일본국제협력단(JICA, 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이 197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기관들이 자국민을 위한 역할을 하지만 국제협력단은 유일하게 외국 국민을 위해 일하는 특이한 기구입니다."

- AID아파트를 예를 들었습니다만 우리는 지금의 성장을 이루기까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렇습니다. 1945년부터 1992년까지 받은 돈이 약 140억 달러 정도입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2600억 정도에 해당합니다."

- 특히 급속 성장의 마중물로 역할을 한 종자돈이라는 점에서 액수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대단한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 종잣돈을 주면 지속가능 성장하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그것을 크게 발전시킨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개도국에 병원을 지어 주거나 직업훈련원을 건설해 주면 공여국이 직접 관여하는 2, 3년은 잘 돌아가는데 10년 뒤에 가보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종잣돈이 수백 배의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예로 현재 코로나19상황에서 공공의료 기관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은 1954년에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가 총 400만 달러를 지원해 준 것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중앙직업훈련원은 독일이 1천만 달러를 준 것이고요. 우리 젊은이들이 독일로 가서 광부로, 간호사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해서 독일이 지원한 것입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정'자와 육영수의 '수'자를 넣어 정수직업훈련원이라고 했지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도 1965년도에 미국이 1천만 달러를 지원하여 설립된 거예요. 당시 우리의 월남파병 등에 감사해서 미정부가 특별 지원한 것이지요.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은 이와 같이 선진국의 지원을 발판 삼아 열심히 일해서 몇 백배로 성장시켰지요. 그래서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다른 나라는 그게 안돼서 힘이 들어요. 이러한 현상을 '원조의 피로'라고 하지요. 그래서 저는 해외에서 일할 때 대통령부터 농민까지 만나는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에게 우리나라의 이런 성장을 예로 들어줍니다. 그러면 귀담아듣고 꼭 한국처럼 잘 성장시키겠다고 다짐들을 하지요."

- 전 세계적으로 K-Culture가 파급되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과 코이카의 역할도 상관관계가 있지 싶습니다만...
"K-Culture에 대한 사업은 코이카의 남매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교류재단(KF: Korea Foundation)이 직접적으로 하고 있고, 코이카도 간접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사실 개도국들은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공여를 받아서 성장한 한국이 공여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희망을 함께 전해주는 효과가 있어, 그들이 더욱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2

- 1991년 코이카 창립에 대한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코이카 창립은 우리가 못 살 때는 원조를 받았지만 이제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 관심을 갖겠다는 의지의 반영인 것이지요. 또한 당시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고픈 욕심을 낼 때였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볼 때 한국은 여전히 전쟁의 폐허로 기억되는 가난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어요. 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원국이 아니라 공여국이라는 위치가 필요했습니다.

국제사회에 1982년부터 국제협력단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정부수립 이후 줄곧 수입초과국이었지만 1988년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도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국제사회에서의 압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1991년 4월에 마침내 KOICA가 출범을 하게 됩니다."
 

이라크 KRG Barzani 총리(현 대통령)와 송인엽 전 소장(2005년 12월) ⓒ 송인엽

- 사실은 등 떠밀린 점이 없진 않지만 축하받을 일이군요.
"그렇지요. 남에게 도움 받다가 도움을 주게 된 일이니까요. 그 첫해의 예산이 2000만 달러였습니다. 29년이 지난 지금은 무상원조 10억 달러를 포함 우리나라의 국제협력 규모가 22억 달러를 상회합니다."

- 이렇게 비교를 하니 성장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몇 개국에 공여를 하고 있습니까?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에서 120개국을 돕고 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7000달러 이하의 모든 국가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 국가체제에 따라 돕지 못하는 나라도 있습니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가 없잖아요.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재임 시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특히 많이 돕도록 독려했었어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중국의 역할을 기대한 것 같고 인종차별을 탈피하려는 만델라 대통령을 지원하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래서 1994년 서둘러 베이징에 중국사무소를 개설했지요. 그리고 조선족이 많은 랴오닝성 선양(瀋陽)에 많은 지원이 이루어졌습니다."

- 돈을 버는 것도 어렵지만 쓰는 것은 더 어렵다고 하잖아요. 코이카의 지원은 순조로웠습니까?
"선진국 사례 연구와 경험을 통해 배워나갔습니다 선양의 조선족 지원에 대해 개도국 원조를 모니터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지적이 있었습니다. 개도국을 돕기 위해 세운 코이카가 자국 동포들을 돕는다는 의견이었지요. 동포 밀집 지역이지만 그들은 모두 중국 국적이라고 했더니 OECD에서 다음 해 같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개인이 돈을 벌어서 사회에 환원한다고 장학회를 만든 뒤 친구 아들이나 처조카들에게 장학금을 몰아주면 옳은가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이 지적에 따라 외교부에서는 동포들을 위해서는 다른 재원을 활용해야 되겠다는 인식을 하고 준비를 거쳐 1994년에 만들어진 것이 재외동포재단(Overseas Koreans Foundation)입니다."

-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외교부는 산하기구가 하나도 없다가 첫 기구로 1991년에 코이카가 설립되고, 같은 해 12월에 국제교류재단이, 3년 뒤에 재외동포재단이 만들어져서 현재 총 3개의 산하기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국제사회에서 홍보하여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를 높이는 공공외교를 전담하는 곳이 국제교류재단이고 재외동포들의 민족적 유대감을 진작시키고 지원하는 사업을 하는 곳이 재외동포재단입니다. 물론 코이카는 더불어 잘 사는 인류사회 건설을 위해 개도국의 경제사회분야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구요."

- OECD의 DAC(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개발원조위원회) 역할은 뭔가요? 우리나라는 언제 회원국이 되었지요?
"우리나라는 OECD에는 1996년에, DAC에는 2010년에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DAC는 회원국들의 원조정책 대화를 통해 원조규모 확대나 효율성을 높여서 빈곤 개도국을 지속 가능한 경제사회개발이 가능하도록 돕습니다. DAC는 OECD 25개 기구 중 가입 조건이 가장 까다롭습니다 원조규모가 자국 GNP의 0.2% 이상, 적절한 원조정책, 원조시행기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DAC를 진정한 선진국 클럽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가입 결정이 된 2009년 11월 25일에 우리의 원조액이 GNP의 0.09%였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이 2015년까지 0.25%까지 꼭 끌어올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가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0.15%에 지나지 않습니다."

#3

- 코이카가 파견하는 봉사단에게는 어떤 예우를 해줍니까?
"월드프렌즈코리아(WFK)로 명칭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봉사단원은 급여가 없습니다. 급여가 지급되면 봉사가 아니라 해외취업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한국을 대표해서 가는 봉사이므로 나라에서 파견국의 물가에 따라서 600~700달러 정도의 생활비, 350~500달러정도의 숙소 렌털비, 아팠을 경우 의료비와 왕복항공료가 지급됩니다. 물론 봉사활동에 필요한 소모품들은 모두 지원합니다. 더불어 귀국 후 정착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봉사 기간 2년 동안 정착 수당으로 월 60만 원씩의 적금을 들어서 봉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정착수당으로 그 적금통장을 줍니다.

1991년 코이카 창립 당시 봉사자 파견인원은 4개국 44명이었습니다. 현재는 50여개국에 5000명 정도를 파견하고 있지요. 2008년부터 WFK-봉사단과는 약간 다른, 국내 퇴직인력의 해당 분야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WFK-중장기자문단'이 파견되고 있습니다. 선발이 되면 매월 3000달러의 근무수당, 1000달러의 주택비, 의료비 및 왕복항공료가 지급됩니다. 이 분들에게는 정착수당은 지급되지 않습니다."
 

이라크 아르빌 공원에서 대학생들과 쿠르드족 전통 민속 무용인 초피댄스(2007년 4월) ⓒ 송인엽

- 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요즈음 해외봉사에 많이 지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변화를 원하는 것일까요?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해외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는 것이 일반적인 길이지만, 1~2년 해외봉사를 선호하는 학생들도 많지요. 환경이 좋지 못한 개도국에서 여행이 아닌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열심히 완수하고 나면 사람이 크게 성장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우선 외국어 하나를 습득하고, 지역 전문가가 됩니다. 또한, 국내에만 머물면 안일해지고, 부모나 나라에 불만스러워하던 젊은이들도, 떨어져 살다 보면 부모의 은혜와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봉사단이나 자문단 파견은 코이카 역할의 일부일 테지요?
"그렇습니다. 코이카의 사업은 8개 분야로 대별됩니다. 첫째 프로젝트사업이라고 해서 학교, 직업훈련원, 병원 등을 지어주는 사업, 둘째 봉사단 파견사업, 셋째 의료, IT 등 전문가 파견사업, 넷째 연수생 초청사업, 다섯째 개발조사사업, 여섯째 물자공여사업, 일곱째 인도적지원사업(재난구호사업), 여덟번째는 민관협력사업 등입니다.

개도국에 대한 원조는 BHN(Basic Human Needs, 인간기본욕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최저생활 유지를 위한 사항 즉 배고프고 아픈 것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이어서 고기만이 아닌 고기 잡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직업훈련 등 교육사업에 치중하다가 이제는 경제사회에 필요한 전 분야를 지원합니다. 물론 정치, 군사, 종교는 제외합니다. 현재 연수생 초청사업으로 1년에 70여 개국에서 5000명 정도를 초청해 2주에서 2년까지 교육을 실시합니다. 물자공여사업으로는 주로 자동차나 농기구, 컴퓨터 등 사무기기를 보내주지요."

- 한정된 재원으로 현지에서 일하다 보면 곤란한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만?
"대사들은 주재국의 고위직들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코이카 소장들은 그 반대입니다. 각 부처 장관들이 만나기를 청하면 다 만나주면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건설, 보건, 교육 등 각자 맡고 있는 부문이 화급하다고들 도움을 청하거든요. 그래서 접촉창구(Focal Point)를 정하여(대개는 외교부 아니면 재경부) 수원국의 요청사항을 스스로 우선순위(priority)를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산 현실은 그들이 요구하는 1/10도 돕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을 만나면 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우리나라가 분단으로 국방비에 너무나 많은 돈을 쓸 수밖에 없다. 남북통일만 되면 훨씬 많이 도와드릴 수 있으니 우리가 평화통일이 되도록 국제사회에서 지지해 달라'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분들의 대답은 늘 한결같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라고..."
 

이라크 시범학교 건설부지에서 코이카 총재, 교육부 장관, 자이툰 관계자들과 소년들(2006년 3월) ⓒ 송인엽

- 코이카의 역할은 앞으로도 더 확대되겠지요?
"예, 그래야만 합니다. 1960년 UN의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의한 내용이 있습니다. 선진국은 국민총생산액의 0.7%를 개도국에 돕도록 한 것입니다. 현재 OECD 37개 가입국 중에서도 DAC에 가입한 나라는 29개국입니다. 29개국 중에서도 20여 개국만 국제협력단이 있습니다. 나머지 나라는 외교부에서 직접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중 UN의 권고인 0.7%를 지키고 있는 나라는 스웨덴,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의 5개국뿐입니다. 이 나라들은 1% 정도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나라를 원조 선진국이라고 합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0.2%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규모가 커서 절대액수로는 미국이 1위이고 일본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지요.

DAC 회원국의 평균은 UN 권고의 반절 수준인 0.35%입니다. 우리나라는 평균액의 반도 안 되는 0.15%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DAC 회원국에서 우리의 대외원조액이 절대액수나 상대액수에서도 제일 하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경제력에 알맞게 우리의 대외원조를 확대해야 하지요.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세계시민으로서의 회비와 같다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무역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 돕는다는 것은 도움 받은 것에 대한 은혜 갚음이고 국격을 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의 수출시장 확대 같은 역할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코이카가 하는 일은 순수하게 인도적인 성격이지만 개발조사사업 같은 것을 실행하면 우리 기업들이 진출하기에 용이합니다. 또한, 우리가 물자를 공여하면 그들이 다시 한국 제품의 우수성을 알고 수입을 하게 되고, 국제기구에서 수장을 뽑을 때 지지 받을 수 있는 기반 즉 외교력이 신장되지요.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공적개발협력) 자금은 분명 우리의 지출이고 의무이지만 분명히 그 이상의 경제적 효과와 외교적 효과가 돌아옵니다."

#4

- 소장님은 코이카 창설 전에는 어느 부처에서 일하셨나요?
"저는 노동부 산하기관인 한국해외개발공사(KODCO, Korea Overseas Development Corporation)에 근무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의 해외취업과 이민을 전담하는 기관이었지요. 이 기관의 설립법인 '한국해외개발공사법'의 효력이 폐지되고 동시에 1991년 4월 1일 0시에 '한국국제협력단법'의 발효와 함께 모든 KODCO의 자산과 인력이 코이카로 이관되었습니다."

- 그 당시 인원이 몇 명이나 되었나요?
"KODCO 인력 250명으로 시작했어요. 현재 코이카 직원은 500여 명입니다."

- 코이카에서는 어떤 업무를 수행하셨나요?
"본부에 있을 때는 국제협력 사업 모든 분야를 두루 담당했으며, 8개국에서 소장을 하며 국제협력 일선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것은 코이카에서 아직 깨지지 않는 기록입니다. 에쿠아도르, 에디오피아, 이라크, 아이티 등 오지 중 오지에서 근무한 것도 특징입니다. 정년퇴직도 해외(필리핀)에서 했습니다. 코이카 근무만 23년 만이었습니다. 전신인 KODCO 때부터는 33년입니다."
 

아이티 콜레라 약품 증여, 이동렬 GAP 소장, 송인엽 소장, Larsen 보건장관(2010년 12월) ⓒ 송인엽

- 코로나 사태로 아프리카의 우리 교민들이 국내로 오는 항로가 마땅치 않아 어려웠으나, 에티오피아가 적극 협조해 주어 해결되었는데요. 한국전쟁 때에 우리를 도와주고, 코로나 때에도 도와준 에티오피아에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습니다. 송 소장님이 겪은 에티오피아 현장에서의 일들 중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요?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253전 253승을 거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Kagnew, 초전박살 및 혼돈에서 질서를 세우다라는 의미)의 생존 부대원들을 만나 그분들의 한국전 경험들을 직접들은 것입니다. 전투에 임해서는 '이길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We will fight until we win or die)',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One for All, All for One)'라는 용맹과 충성심으로 한국전에서 큰 공을 세운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강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우리 국민에게 이를 알렸지요. 그 책에 에티오피아 기르마(Girma) 대통령이 감동적인 추천사를 써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를 친구로 대해 주셨습니다.
 

?Fasika 예비역 대령과 4남 Samuel, 송인엽 소장(2009년 11월), 한국전 당시 강뉴부대의 Fasika 소대장을 격려중인 Dulles 미국 국무장관, 화천(1953년 5월) ⓒ 송인엽

또한 2009년 10월 국정감사단의 일원으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셨던 정의화 전 국회의장님이 생각나는군요. 그분이 외교위원으로 당시 12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에티오피아를 국정감사차 방문했습니다. 대사관과 코이카가 피감사기관이었지요. 감사가 끝나고 다음 날 한나절은 유적지를 시찰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정 의원께서는 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대신 시장에서 삶의 현장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시장은 치안이 좋지 않다며 대사가 난감해 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시장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부터 젊은이들까지 30여 명이 따라붙었습니다. 그분이 사진을 찍다가 상점에 들어가서 수십 개 달린 바나나 두 송이를 사시더라고요. 그 많은 바나나를 어찌 하려나 궁금했죠. 가게 밖으로 나와서 두 개를 따서 본인이 하나 먹고 하나는 저를 주시더라고요. 조금 전에 식사를 해서 배가 부르다고 사양을 했더니 그래도 하나만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싼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두세 개씩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참을 가시더니 이번에는 땅콩을 두 되 사서 두어 알을 드시고 저에게도 몇 알을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움큼씩 나누어 주었어요. 그 후부터는 그들이 모두 친구처럼 되어버리더군요. 치안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왜 먹고 나누어 주었는지를 정 의원께 물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그냥 주면 시혜이지만 우리가 먹으면서 주면 동참이니까요'. 그 말씀이 남을 돕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남았습니다."
 

2008년 7월 귀국길에 에티오피아 국정감사단의 일원으로 오셨던 정의화 국회부의장을 방문했을 때 정의원은 구태여 송소장을 자신의 직무석에 앉히며 오지에서의 노고를 격려해주었다. ⓒ 송인엽

- 이라크 전쟁 중 아르빌 근무시 위험한 고비도 많이 넘기면서 활동하셨다고 알려졌는데...
"전쟁지역이라 위험은 늘 있었지요. 그래서, 그 더운 지역에서 외출 시에도 방탄조끼, 헬멧에 방탄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쿠르디스탄(Kurdistan)의 최대 공여기관이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대학 특강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하면 된다'라는 한국 특유의 정신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KOICA의 활동으로 '한국과 쿠르디스탄이 형제국'이라는 평가를 바르자니(Barzani) 대통령이 하셨고, 저를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또한, <페쉬메르가의 연인>이라는 이라크 배경 실화소설(미국작가 진 세이손 Jean Sasson의 작품)을 번역 출간하였고, 제가 아르빌을 떠나 서울 본부로 부임해 올 때 저에게 명예대사 역할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 2010년 1월, 아이티에 대지진으로 32만 명의 사망자가 났을 때, 우리 국민들이 의연금도 많이 갹출한 기억이 나는데, 국가차원에서 KOICA에서는 어떤 활동이 있었나요?
"당시 우리 국민들이 1달 만에 1000만 달러 이상의 의연금을 갹출하여, 대한적십자사를 비롯해 5~6개 NGO가 여러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때가 우리나라가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지 12일째 되는 때였어요. 그래서 청와대와 외교부에서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코이카는 재난구조대와 응급의료단을 현지에 급파하고 바로 사무소를 설치하여 제가 사무소장으로 에티오피아에서 아이티로 급파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지원예산은 1200만 불. 일본은 1억 불, 미국은 15억 불이었어요. 저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이었으나, 창궐한 콜레라 퇴치 및 무너진 전력공급 등 시급한 곳에 집중하였고, 마르텔리(Martelly) 대통령께 한국전의 뼈아픈 경험과 그를 극복하기 위한 새마을운동 등 '하면 된다'는 한국정신을 많이 이야기했지요. 그래서 이에 동감한 대통령실의 주선으로 국회의원, 각료, 재계 인사들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국발전이 아이티에 주는 교훈'이라는 특강을 하였는데, 중앙TV에 여러 차례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 우즈베키스탄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으셨는데, 그곳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그곳에는 연해주에 정착해 있다 스탈린에 의해 1937년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25만여 명이 살고 있었어요. 그곳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초기에 살아남느라 여력이 없어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질 못했어요. 우리나라도 그들을 도와줄 힘이 없었고요. 그래서 IT교육센터 건립과 한글보급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수도 타쉬켄트와 9개주 지방대학에 한국어과나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도록 지원하였지요. 지금은 우리나라와 여러 방면에서 교류가 활성화되어 한국어과가 가장 인기 있는 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당시 우즈벡대학 Gyret 총장님의 강권으로 한국학을 강의하였는데, 거기서 명예문학박사를 수여해 주었습니다. 그 총장님은 그 후에 교육부 장관이 되셨고, 2018년도에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타슈켄트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내에서 평화행진을 함께 하였고, 평화마라토너와 저를 3개 대학에 초청하여 도전정신과 한국발전에 대하여 특강을 하도록 주선도 해 주셨습니다."​

- 선한 인연은 이렇듯 이어져서 여러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군요. 그 많은 나라들에 대한 경험들을 책으로 묶은 것은 없습니까?
"정년퇴임하는 날에 2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해외사무소장으로 근무한 나라 8개국, 출장국인 36개국, 여행까지 포함하면 101개국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경험들을 <우리의 일터는 5대양 6대주다>와 <시로 노래하는 세계여행>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주로 오지와 재난지역을 누빈 국제개발협력 전문가로서의 경험들을 담았습니다."

- 소장님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더군요. 누구나 그렇듯 현재는 인내의 대상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들이 좀 가벼운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조언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젊은이들에게 고민이 많고 무기력에 빠진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지진으로 두 팔이 잘렸어도 해맑은 아이티 소녀의 눈망울 속에서 본 희망과 세 시간을 걸어 맨발로 학교에 가면서도 의사가 되고픈 에티오피아 산골 소년의 꿈 그리고 포탄 속에 부모를 잃었어도 잃지 않은 이라크 소년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짓누르는 고민은 바위산의 무게이지만 무기력을 찾아볼 수는 없어요. 그들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국제협력을 강의하며, 학생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역사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역사발전과 인류공영>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제 강의교재의 하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역사는 인류공영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저의 소신을 담은 책입니다. 힘겨워하는 청춘들에게 사랑으로 돌파하라고 조언합니다. 더불어 <청춘 데카메론>이라는 책으로 사랑의 힘을 확신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Oromia 주민과 송인엽 소장 부부(2008년 10월) ⓒ 송인엽

송 소장님은 긴 시간의 대화에서도 여전히 청년의 기개를 보였습니다. 송 소장님의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공존과 공영과 사랑이었습니다. 송 소장님은 앞에 인류를 놓습니다. 그런데 꼭 인류가 아니라 이웃을 놓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웃과 공영이 곧 인류공영의 출발이니까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사태 앞에 세계가 시련 속에 있습니다. 이 시점에 소장님께서 설파한 세계평화와 인류공영, 이웃공존의 삶을 위한 코이카의 가치와 역할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코이카 #KOICA #송인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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