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와 함께 '양병론'을 주장한 호남 의병장

삽봉 김세근 장군을 기리는 '학산사'

등록 2020.04.13 11:56수정 2020.04.1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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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팔학산 기슭에 임진왜란 때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제봉 고경명 장군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삽봉 김세근(揷峰 金世斤 1550~1592) 장군을 배향하는 사당, ‘학산사(鶴山祠)’가 있다 ⓒ 임영열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포악한 철권통치를 했던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 이융(李㦕)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조선 10대 왕으로 등극했다. 1494년 겨울, 연산의 나이 19세였다.

왕위에 오른 지 5년이 되는 1498년.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피바람이 몰아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성종실록의 사초에 실린 것이다.


글을 쓴 사람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이었고, 조의제문을 실록의 사초에 실은 장본인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史官)으로 있었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었다.

사초를 열어본 연산군은 김종직이 증조할아버지 세조를 능멸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대노한다.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속에서 시체를 꺼내 목을 잘라버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을 집행했다.

김종직의 부관참시에도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연산군은 조의제문을 아버지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성종실록'에 기록하려 한 직필 사관 김일손과 이에 동조한 사림파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하고 유배를 보낸다. 역사는 이를 1498년 무오년에 사림(士林)들이 화(禍)를 입었다 해서 '무오사화(戊午士禍)'라 기록하고 있다.
 

삽봉 김세근 장군(1550~1592)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학산사 ⓒ 임영열

 

학산사 현판. 전북 김제 출신 서예가 강암 송성용(1913-1999)의 글씨다 ⓒ 임영열

 
직필 사관 김일손의 후손, 삽봉 김세근 '붓을 꺾고 칼'을 들다

죽고 죽이는 사화와 당쟁의 시기. 피바람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무덤 속에 있던 김해 김씨 김일손의 아버지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역적의 굴레는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대대로 경상도 함안군 마륜동에 살았던 사관 김일손의 후손들은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연좌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흥을 거쳐 광산군 서창면 세동마을,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으로 이사해 정착하게 된다.
 

학산사 제택, 경의당. 2018년 광주광역시 서구 향토문화유산 제1호다 ⓒ 임영열

 

경의당 현판. 전북 김제 출신 서예가 강암 송성용(1913-1999)이 썼다 ⓒ 임영열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팔학산 기슭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정론을 펼친 사관 김일손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제봉 고경명 장군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삽봉 김세근(揷峰 金世斤 1550~1592) 장군을 배향하는 사당, '학산사(鶴山祠)'가 있다.


한 집안이 도륙되는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재앙을 피해 아버지 김석경(金碩慶)과 함께 광주로 온 김세근은 27세 때인 1576년 선조 9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다음 해인 28세 때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학산사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 임영열

 
35세에는 종 6품,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승격했다. 종부시 주부는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직책으로 요즘으로 보자면 청와대 민정수석실 대통령 친인척 담당 행정관 정도 되는 핵심 요직이었다.

왕의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좌하며 권력의 한가운데 서있던 김세근은 이때 율곡 이이와 함께 왜침에 대비해 군사를 훈련하고 양성해야 한다는 '양병론(養兵論)'을 주장했다. 하지만, 노회한 조정의 대신들은 태평시대에 양병론은 부질없이 민심을 동요하는 요사스러운 사론(邪論)에 불과하다며 이를 묵살했다.

나라의 안위는 나 몰라라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먼 간신배들이 득실거리는 조정에 실망한 김세근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쯤의 일이다.
 

학산사 외삼문 ⓒ 임영열

 
광주 세하동으로 돌아온 김세근은 머잖아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마을 뒤 백마산 수련골에서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장정들을 불러 모아 군사 훈련을 하며 군대를 양성했다. 평소의 소신대로 국가에서도 외면한 양병론을 몸소 실천했다. 김세근은 '직필(直筆)의 붓'을 꺾고 '의병의 칼'을 들었다.

"이 칼이 녹슬거든 내가 죽은 줄 아시오"

김세근 장군이 백마산에서 군대를 양성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광주는 물론이고 화순과 담양 나주, 장성 일대에서 장정들이 몰려와 그 수가 수 백 명을 넘어섰다. 지금도 백마산 일대에는 그때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수련골, 병사들이 차일을 치고 휴식을 했던 차일봉, 물을 마셨던 옥동샘, 장수굴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머잖아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김세근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고향으로 내려와 군사를 조련한 지 5년쯤 지난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삽봉의 나이 42세였다. 무능한 군주와 조정 대신들은 제 살길 찾아 도망가기 바빴다. 호남의 의병들이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늘 그랬듯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민초(民草)' 들의 힘이었다.
 

경의당 뒤편에 세원진 학산사 묘정비 ⓒ 임영열

 
제봉 고경명 장군이 주축이 되어 호남 의병청(義兵廳)이 담양 추성관(秋城館)에 설치됐다. 김세근 장군은 그동안 훈련시킨 의병들과 함께 담양에 있는 추성관으로 향했다. 김덕홍, 유팽로, 안영 등의 의병장들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결의를 혈서로 다졌다.

그러던 중 몸에 이상이 생겼다. 온몸에 열이 끓어 올라 몸을 가눌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일단 신열을 치료한 다음 후발대로 참전하기로 하고 세동마을로 돌아와 몸을 추슬렀다. 몸을 회복하던 중 스승이었던 호서 의병장 중봉 조헌의 격문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몸은 아직 낫지 않았지만 출전을 결심한다.

김세근 의병장은 출전하기 전 부모님의 묘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부인 청주 한씨(韓氏)와 어린 아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김세근 장군은 평소 허리에 차고 다니던 요도(腰刀)를 부인에게 건네주면서 "이 칼이 녹슬거든 내가 죽은 줄 아시오···" 유서가 될지도 모를 마지막 말을 남겼다. 칼을 받아 든 한 씨 부인은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학산사 내삼문. 창열문 삽봉 김세근 장군을 배알 하기 위해서는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 임영열

 
김세근 장군은 수련골에서 훈련한 의병 300여 명 이끌고 고경명 장군과 합류하기 위해 금산으로 가던 중 전주에 이르러 그곳에 흩어져 있던 관군 200여 명을 규합하여 충청도 영동 부근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해 7월 10일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합류하여 싸우던 중 중과부적으로 순국한다.

김세근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없어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를 치른다. 장례 후 부인은 "지아비는 충(忠)에 죽고 지어미는 열(烈)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의 당연한 도리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남편이 출전하면서 맡긴 요도로 자결한다. 

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의 벼슬을 내리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한 뒤 녹권(錄券)을 하사했다. 한씨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 됐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장 삽봉 김세근 장군의 묘소.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학산사 입구 팔학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있다 ⓒ 임영열

 
김세근 장군이 순국하고 366년이 지난 1958년, 광주·전남의 유림들과 후손들은 장군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서창동 팔학산 기슭 불암(佛岩) 마을에 학산사(鶴山祠)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내고 있다. 선조로부터 하사 받은 녹권과 출전 시 장군이 한씨 부인에게 준 요도(腰刀)를 유품으로 보관해오다가 지금은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청이 있었던 담양 추성관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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