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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을 '세습'합니다? 초대형교회의 두 얼굴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명성교회 도서관 ②

등록 2020.05.14 09:04수정 2020.05.1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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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교회 도서관'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개신교 '집사'였던 박인근은 1975년부터 국고 지원을 받아 1987년까지 12년 동안 부랑아를 위한 시설을 운영했다. 시설에 노숙인, 행려병자, 고아뿐 아니라 멀쩡한 사람까지 잡아들여 강제노역을 시키고 군대식으로 운영했다.


구타와 성폭력이 난무했고, 12년 동안 513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유명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그들은 원생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고, '복지'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다. 신을 믿는 자가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사회 지도층 개신교 신자의 비행과 불법도 잇따랐다. 현역 육군대장 박찬주는 공관병 갑질에 이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찬주 대장뿐 아니라 구속 수감된 이명박 대통령 역시 교회 '장로'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문직 종사자 중 '성범죄자'가 가장 많은 직업군은 종교인이고 목사가 1위였다.

용산구 삼일교회를 신도 수 2만 명의 대형교회로 키운 전병욱 목사는 여성 신도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다. 전병욱은 홍대새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소속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시 전병욱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늑대로부터 양떼를 지켜야 할 목회자가 양떼를 농락한다면 그는 양치기가 아니라 늑대다.

교리로만 존재한 사랑과 나눔
 

영화 <카트> 부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2014년 11월 개봉한 영화. 상업영화로는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다뤘다. 81만4천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신교 기업’을 표방한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가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 명필름

 
'개신교 기업'을 표방한 이랜드는 노동자 착취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는 영화 <카트>로 제작, 개봉되기도 했다. 영화 <카트>에 나오는 대사다.

"일을 시켰으면 제대로 월급을 주셔야 할 것 아니에요. 사람이 일만 하니까 쉬워 보여요?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아요? 두 달 못 채우면 월급 제대로 안 줘도 된대요?"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사랑의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교회 이름이 사랑이고, 교회가 사랑과 나눔을 얘기하지만, 기업 운영은 사랑과 나눔이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영역인 걸까? '섬김'이 아닌 '군림'으로 직원을 대하는 기업이라면, 신앙과 삶이 따로 노는 무늬만 '개신교 기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이 목사로 변신했다. 그가 수많은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회개와 용서를 구했다면, 그의 목사 변신은 어쩌면 아름다운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피해자의 용서 없이 '셀프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누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용서'는 가해자의 권리가 아니다. 진정성 있는 '참회'만이 가해자의 책무다. 영화 <밀양>에서 유괴살인범 박도섭(전영진 분)이 신애(전도연 분)에게 남긴 말이다. 

"하나님이 죄 많은 놈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중략)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영화 <밀양>의 이야기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 이야기도 비슷하다. 서지현 검사가 그의 성추행과 인사 불이익을 폭로한 계기는 안태근의 온누리교회 간증 동영상 때문이었다. '면죄부'를 구입한다고 모든 죄를 사할 수 없는 것처럼, '셀프회개'가 '셀프구원'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참된 개신교인이라면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뿐 아니라 의로움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명(以義證信)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신자(信者)와 비신자(非信者)의 삶이 아무런 차이가 없고, 신앙인의 삶이 상식에 어긋난다면, 신앙에 대한 신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신앙이 '앎과 의를 추구하는 신앙'(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d justice)으로 바뀌지 않으면, '신앙 따로 삶 따로'인 개신교인의 모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이비 종교를 이끌다가 개신교 목사로 박근혜에게 접근, '구국십자군'을 이끈 최태민의 사례를 떠올려 보자. 사기·횡령·추문으로 물의를 일으켜 박정희가 '친국'을 하기도 했던 최태민의 파장은 1970년대에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를 쏜 김재규는 10.26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목사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들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은 박근혜의 비선 실세로 국정을 농단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내밀한 관계와 커넥션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었다. 그녀에게 표를 던진 시민들은 이런 불투명한 관계가 대통령직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걸까? 탄핵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박근혜 이야기는 두고두고 후세의 입방아에 오를 것이다. 우리 후손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통령을 뽑았냐는 냉소를 곁들이지 않을까.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어떻게 우리의 발목을 잡는지 알려주는 사례다.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와 단체는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 유신체제를 찬양했다. 1980년 8월 6일에는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 기도회는 TV로 생중계되었다.

정교유착 속에 교세를 급팽창한 개신교가 최근 들어서는 태극기 부대와 함께 정치집회를 주도하고, 정당 창당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단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다. 개신교 '일부' 종파가 참여한 한기총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단체인 양 행동해왔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나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빤스 벗으라면 다 벗어. 목사가 벗으라고 해서 안 벗으면 내 성도 아니지."

이 발언으로 '빤스목사'로 불리는 전광훈 목사는 기독자유통일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개신교는 이제 '정교유착'도 부족해 '제정일치' 사회를 꿈꾸는 걸까?

"하나님 앞의 평등"을 말하는 개신교는 평등을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교회 내 신도는 평신도, 집사, 권사, 장로처럼 '직분'으로 계급화되어 있다. 교회가 헌금을 통해 직분을 '매매'한다는 비판도 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도 '서열화'되어 있다. 신학대학의 서열과 인지도는 졸업생의 교회 '취업'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법 앞의 평등' 뿐 아니라 '신 앞의 평등'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다. 개신교 신자의 상당수가 여성임에도 여성의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도 있다.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교단에서 여성 목사 비율도 10% 안팎으로 높지 않다. 교단 총회에서 의결권을 지닌 총대의 여성 비율도 15% 안팎에 머문다.

'유리 천장'을 타파해가는 사회 분위기와 달리, 개신교가 여전히 성차별적인 형태로 교회와 교단을 운영함을 알 수 있다. 교회의 가부장적 체제에 순응하면 '성녀'이고 불응하면 '악녀'가 되는 이분법적 구도로 교회를 운영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종교 아닐까? 개신교회는 아직도 '남존여비' 시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성경의 말씀은 늘 교회를 향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교회도서관'
 

명성교회 도서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도서관일 뿐 아니라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도서관 중 최대 규모 도서관이다. 1996년 개관했다. 직원 3명으로 규모에 비해 직원 수는 적다. 직원 중에 사서가 있다. 명성교회 신도 뿐 아니라 서울시민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명성교회도서관은 교육청 소속인 강동도서관과 고덕평생학습관보다 규모가 적지만, 강동구에서 건립한 5개 구립도서관보다는 면적도 넓고 장서도 많다. ⓒ 백창민

 
서울시 강동구에 있는 명성교회 도서관은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교회도서관'일 것이다. 실제 둘러본 명성교회 도서관은 큰 규모를 자랑했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1990년 교회 본당 5층에 마련한 7244권의 장서에서 출발했다. 명성교회는 1996년 14500권 장서를 모아 교회 신도를 대상으로 도서관을 개관했다. 2000년 11월에는 지역사회 주민에게 도서관을 '개방'했다. 2001년에는 샬롬교육관 전층을 도서관으로 확장했고, 2004년 1월에는 도서관을 신축해서 문을 열었다. 2014년에는 도서관 별관을 개관했다.

2019년 현재 명성교회 도서관 장서량은 13만 권(13만650권)을 넘겨 웬만한 공공도서관 장서 수준을 웃돈다. 장서 중 34%인 4만4784권은 기독교 분야 책이다. 일반 분야 장서는 5만1454권으로 39.3%이며, 나머지 3만4412권은 어린이 책이다. 기독교 분야와 어린이 책 장서가 상대적으로 많지만, 일반 분야 장서도 적지 않다. 전자책, 오디오북, DVD 같은 비도서 자료도 4603점 보유하고 있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장서뿐 아니라 시설면에서도 눈에 띄는 교회도서관이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본관과 별관, 2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은 지하 2층, 지상 5층 규모로 지상층 연면적은 1360.40㎡다. 본관 1층엔 영유아자료실이, 2층엔 어린이자료실이 있다. 3층엔 신학자료실, 4층엔 기독교자료실이 있고, 5층은 기증도서자료실이다. 지하 1층엔 자유열람실이, 지하 2층엔 보존 서고가 있다. 본관은 297석의 좌석을 갖추고 있다. 

별관은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다. 지상층 연면적은 본관의 절반 수준인 682.49㎡다. 본관과 별관을 합하면, 지하 공간까지 연면적이 2,819㎡가 넘는다. 별관 1층엔 디지털자료실이 있다. 2층엔 정기간행물실과 참고문헌실이 있다. 3층은 문학자료실, 4층은 기술 예술 역사 자료실이다. 지하 1층은 인문사회과학자료실이다. 별관 좌석은 49석이다.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예배'로 본다면, 교회의 핵심 공간은 '예배당'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도서관이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은 아니다. 한국 대형교회는 예배당 중심의 단일건물에서 다양한 부속건물로 구성된 복합건물로 외형을 키워왔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복합화하며 성장한 대형교회의 건물 성장사를 잘 드러내는 곳이다.

그나저나 교회는 왜 도서관이 필요할까? 서구는 중세 수도원 장서관을 통해 지식을 전승해온 역사가 오래다. 우리도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 장경판전을 통해 불경을 전승했고, 사찰은 또 하나의 도서관 역할을 이어왔다. 

한국에서 교회도서관은 언제부터 자리잡기 시작했을까? 한국 교회도서관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없지만 1920년대부터 '교회도서실' 설치에 대한 기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동아일보> 1922년 1월 19일 자 기사는 함경남도 홍원 삼호교회 기독청년회가 자선도서실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1927년 5월 9일 의주기독청년회가 6~7백 권의 책을 갖춘 도서관을 회관 안에 개관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로부터 한국 교회도서관 역사를 헤아린다면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종교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근대 사회에서 교회도서관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교회 자료를 소장하고 보존하는 의미는 지금도 있지만, 과거처럼 사회의 지식 전승을 담당하는 기능은 퇴색했다고 할 수 있다. 

도서관이 부족한 시절에는 지역 사회의 부족한 공공도서관 인프라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서울 강동구에서, 수색장로교회도서관과 은광교회 김종대목사기념도서관은 서울 은평구에서 공공도서관 역할을 담당해왔다. 

공공도서관이 늘어난 최근에는 어떨까? 도서관을 선호시설로 여기는 사회 인식을 받아들여 교회에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례도 늘었다. 교회도서관은 카페처럼 '교회 쇼핑족'과 새 신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각광 받는 부대시설의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앞으로다. '종교 없는 삶'을 이야기하는 탈근대 시대, 교회도서관은 어떤 지향을 가질까?

명성교회의 또 다른 '명성'
 

명성교회 1980년 7월 6일 명일동 홍우상가에서 출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이며, ‘명일동의 소리’라는 뜻으로 명성교회라 이름 지었다. 명일동 일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면서 급성장했다. ⓒ 백창민

 
교회도서관으로 유명한 명성교회가 또 다른 이슈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명성교회는 등록한 교인이 10만 명, 출석하는 교인이 5만 명에 달하는 초대형교회다. 단일 교회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 중 하나다.

일요일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 수가 2천 명을 넘는 곳을 '대형교회'(mega-church)라고 한다. 대형교회는 한국에만 900개 정도 있다. 전체 교회의 약 1.7%를 차지한다. 미국의 경우 대형교회의 비율이 0.005~0.007%라고 하니, 한국 교회에서 '대형교회'의 비중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비중이 높을 뿐 아니라 상당수 교회가 성장 지상주의를 꿈꾼다는 점에서 한국의 '대형교회 현상'은 심각하다.

일요일 예배 신자가 1만 명을 넘는 교회를 '초대형교회'(giga-church)라 하는데, 2011년 현재 한국의 초대형교회는 14개다. 교인 수가 2만 명을 넘는 교회도 7~8개다. 미국과 비슷한 숫자다. 초대형교회인 명성교회의 교세와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대형교회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도 1950년대 이후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다. 한국에서 초대형교회는 이미 1960년대에 출현했다. 한경직 목사가 이끈 영락교회는 1965년 재적 교인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1945년 27명으로 출발한 영락교회가 20년 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대형교회가 아닌 교회의 사정은 어떨까? 교회의 70~80%는 '미자립 교회'로 알려져 있다. 잘 나가는 소수의 대형교회와 재정적으로 어려운 대다수 교회로 한국 교회가 나뉘어 있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 상황은 '양극화'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축소판이다.

한국에 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가 유독 많은 이유는 뭘까? 미국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성장 지상주의로 바뀌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유가 뭐든 '성령'이 아닌 '성장'이 이끄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일 수 있을까. '종교기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종교기업'이 아닐까.

명성교회는 '대형교회 현상'을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다. 김삼환 목사는 1980년 교회를 창립해서 명성교회를 초대형교회로 키웠다. 김삼환 목사는 사랑의교회 옥한흠과 오정현, 순복음교회 조용기와 함께 팬덤을 거느린 스타 목사 중 하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삼환 목사는 2015년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원로목사'로 명성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2017년 11월 12일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가 담임목사로 있는 새노래명성교회와 '합병'했다. 교회 합병 후 명성교회는 김하나 목사를 새 담임목사로 임명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새노래명성교회는 명성교회가 설립자금 수백억 원을 댔고, 신자 1천 명도 명성교회에 다니던 신도였다. 명성교회가 편법 또는 변칙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세습했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예장통합)은 2013년 총회에서 교회의 세습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다. 명성교회는 예장통합에 속한 교회다.

명성교회는 세습뿐 아니라 장로와 권사, 안수집사라는 직분에 따라 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자발성에 의한 헌금이 아니라 강제성을 띤 헌금이었던 것이다. 교회에서 전근대적인 세습이 일어났음에도 상당수 명성교회 신자가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명성교회는 교회뿐 아니라 국내외에서 방송국, 학교, 병원, 교도소 같은 여러 개의 수익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명성교회는 '신앙 공동체'일뿐 아니라 '경제 공동체'이기도 하다. 신앙뿐 아니라 '이권'과 '밥줄'이 걸려 있는 것이다.

명성교회 세습과 함께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도서관 역시 '세습'되었다.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은 공공기관이 세운 '공립' 공공도서관이지만, 개인이나 민간이 세운 '사립' 공공도서관도 더러 있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이라는 근대 시설을 세습한 흔치 않은 사례다. '공공성'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 도서관에서 '세습'이라는 전근대적 작태가 횡행했다는 점에서 명성교회 도서관은 또 다른 이목을 끈다. 

흔히 한국 근대화의 특징은 '이식된 근대화'이자 '압축된 근대화'로 설명되곤 한다. 한국 근대화의 이런 특성은 우리 도서관 분야에서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짧은 시간 동안 근대화 과제를 수행하다 보니, 우리 사회와 도서관에는 전근대(pre-modern)부터 근대(modern), 탈근대(post-modern)의 흔적이 공존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지금'(Now)을 살고 있지 않다"는 블로흐(Ernst Bloch)의 말처럼, 이식과 압축 근대화로 인한 '비동시성의 동시성'(simultaneity of non-simultaneous)이 한국 근현대 도서관사를 관통하는 특징 아닐까. 

교회 공동체를 넘어 지역 공동체를 위해 공공도서관을 선구적으로 개관한 점에서 명성교회 도서관은 탈근대 시대 교회도서관이 가야 할 미래를 상징한다. 반면에 근대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공공도서관의 세습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명성교회 도서관은 전근대적이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 모습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명성교회 도서관은 흥미를 끈다. 명성교회 도서관은 세습이 된 가장 큰 공공도서관으로 기억될 것이다.

'세습'이라고 쓰고 '청빙'이라고 쓰자?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 장로회가 아닌 오순절 계열 교회다. 조용기 목사에 이어 2008년부터 이영훈 목사가 부임했다. 목회자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판옵티콘 구조로 설계한 건물이다. 원형 평면을 가진 교회로, 건축가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신자이기도 한 조행우다. ⓒ 백창민

 
교회 세습 문제는 비단 명성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8년 1월 <뉴스앤조이> 발표에 따르면 혈연에 의한 세습이 일어난 교회는 350개다. 전체 교회 수의 0.45%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파급력이 큰 초대형 또는 대형교회에서 혈통 세습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 파장은 적지 않다. 

2012년 여름 한기총은 성명서를 통해 교회 세습을 '세습'이나 '승계'라고 하지 말고 '청빙'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습이라 쓰고 청빙이라 말하자'는 건가? 상당수 교회가 '반공'을 앞세워 북한 정권을 비판하면서 북한과 똑같이 '세습'하는 점도 흥미롭긴 하다. '세습'으로 뭉친 한 민족일까? '내로남불'인 걸까?

세습 자체도 문제지만 '절차'도 문제다. 1997년 가장 먼저 교회를 세습한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는 주일에 공동의회를 열고 제대로 된 투표나 설명 없이 "반대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라고 말한 후 세습을 '결정' 지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이렇게 하진 않는다. 세습뿐 아니라 상당수 교회에서 목사직 승계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점도 함께 지적할 부분이다. 

'세습'은 왜 문제가 될까? '권력'은 집단 안의 자원을 동원하고 배분한다. 권력이 절대화 할수록 집단 내 '자원 동원'은 '자원 독점'으로 이어진다. 목사는 교회의 의사결정 기구인 당회(堂會)의 장으로 교회 행정과 재정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교회 내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이 목사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대형교회의 목사는 수십 년 동안 '권력자'로 교회 내 자원을 독점해온 경우가 많다. 이렇게 독점한 권력을 혈통 세습을 통해 대물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혈연에게 세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일 때 가능하다. 교회를 세습한다는 것은 교회가 특정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사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세습은 뭇사람의 노력으로 성취된 조직의 성과를 한 사람이 소유물로 전환하여 완전히 사유화함을 뜻한다.

'세습'이 왜 문제인지 우리는 수천 년 동안의 계급 사회를 거치면서 그 폐해를 목도해왔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을 보자. '성군'(聖君)이라 칭송받는 왕이 드물다. '폭군'(暴君)이나 '암군'(暗君)이 더 많았다. 혈통 세습을 통해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의 리더를 뽑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세습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정치적 계급이 세습되지 않을 뿐 한국의 기업과 교회, 학교에서는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세습이 횡행하고 있다. 세습이 인정되는 '계급사회'인 것이다. 교회와 기업, 학교는 창립자의 공헌도 있지만 수많은 구성원의 노력으로 성장했다. 그 과실을 특정 개인이 소유하고 세습하는 게 온당한 걸까? 

근대 사회는 정치·경제·종교적 특권과 세습을 배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교회든 기업이든 정치권력이든 '절대 권력'의 속성은 늘 같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교회는 비자금이 왜 필요할까
 

충현교회 부산 동일교회 김창일 목사가 1953년 아현동에 설립한 교회. 서울동일교회로 출발하여 1954년 충무로로 이전했다. 충무로의 ‘충’과 아현동의 ‘현’을 따서 충현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1980년대 들어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다닌 교회로 유명해졌다. ⓒ 백창민

 
2015년 명성교회의 재정장로가 자살한 사건이 터졌다. 재정장로 자살 후 그가 관리했던 '비자금'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명성교회 비자금은 알려진 금액만 800억 원이다. 교회가 비자금을 운영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규모 역시 충격적이다. 

800원이라면 회계 상의 실수라고 할 수 있으나 800억 원이라면 다르다. 투명하지 않은 자금이 800원도 아닌 800억 원씩이나 필요할까. 교회가 아닌 그 어떤 조직이라도 비자금을 800억 원이나 운용한다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는 '비자금'이 왜 필요할까? 비자금 이전에 한국 교회는 왜 이렇게 '돈'에 민감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단체도 운영자금은 필요하다. 자금이 필요하면 신도에게 공개하고 투명하게 모아 집행하면 될 일이다. 성경에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박득훈 목사는 돈을 좇는 한국 교회 문제를 '맘몬(mammon) 숭배'로 비판한 바 있다. 한국 교회가 물신 숭배로부터 자유롭다 말할 수 있을까? 일찍이 니체는 이렇게 예견한 바 있다.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던 것을 이제는 돈을 사랑하기 위해 한다."

몇몇 교회에서는 목사와 신도가 결탁해 권력을 과점하면서 교회를 비자금 창구로 활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종교를 매개로 비자금 같은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회가 '사교'(社交) 모임이 아닌 '사교'(邪敎)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의 대형교회가 추종하는 것은 신을 섬기는 '신본주의'일까, 사람을 생각하는 '인본주의'일까, 돈을 좇는 '자본주의'일까.

교회는 감사를 받거나 세무조사를 받는 대상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공금 유용, 횡령과 배임, 비자금 조성이 방치되고 있다. 이쯤 되면 '면죄부'를 판매했던 중세 교회의 부패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언자 아모스(Amos)의 말처럼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흘러야 할" 교회가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종교가 사회 일반 수준의 '투명성'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인 과세에 있어서도 개신교의 '조세 저항'이 특히 심하다. 국민의 의무인 '납세'를 거부하는 것은 국민이기를 거부한다는 뜻일까?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탈세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의도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교회가 비과세 특혜를 통해 카페를 운영하거나 부동산 투자, 재단을 통해 돈세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유일하게 종교인에게 과세하지 않는 나라였다.

최근 종교인 과세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었다. 2018년 1월 1일부터 종교인 과세가 시행되었지만 종교인 스스로 근로소득세로 신고하지 않으면 기타 소득으로 과세하고, 급여보다 금액이 더 클 수 있는 목회 활동비가 종교인 소득에서 빠지고 말았다. 

대형교회 목사는 임금소득보다 목회 활동비가 큰 경우가 많다. 심방비, 결혼 주례비, 장례 집전비 같은 비용은 교회 재정이 아니라 목사가 '쌈짓돈'으로 챙기는 경우가 많다. 일부 담임목사는 퇴임하는 과정에서 화려한 은퇴식에, 거액의 사례비를 일시불 또는 월정액으로 받고, 교회가 설립한 기관 운영권과 건물 사용권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법조계뿐 아니라 개신교의 '전관예우'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 개신교회에 만연한 이런 풍조를 '은퇴 비리'라고 지칭해 비판한 바 있다. 마귀를 몰아내야 할 교회가 '복마전'(伏魔殿) 아니냐는 탄식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 헤롯 성전에서 환전상을 회초리로 쫓아내며 한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a house of prayer)이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a den of robbers)로 만들었구나."

개신교의 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사의 과세 유보 및 세무조사 예외 주장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공평 과세에 어긋날 뿐 아니라 종교에게 특혜를 달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 게 옳은지 물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교회의 돈 문제는 과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과세뿐 아니라 교회 재정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은 기업과 결탁해서 기업 비자금으로, 나아가 정치권으로 유입되는 불법자금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를 넘어선 문제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는 재정에 대해 내부 또는 외부 감사를 받는 사례가 거의 없다. 신도가 교회의 장부를 열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백주년 기념교회나 일산 광성교회처럼 재정을 공개하는 교회도 있지만 일부 사례일 뿐이다. 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에게 바치는 돈'이라면, 투명하게 그 쓰임을 '공개'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이후 줄곧 성장을 거듭하던 개신교는 21세기를 맞아 감소세로 돌아섰다. 2005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04년 사이에 개신교는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교회는 2000년대 들어 신자 수는 줄고, 교회 수는 늘어나는 기이한 상황을 맞고 있다. 개신교도가 감소하는 추세 속에 교회가 난립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보급이 늘면서 교회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 '수평이동'하는 신자가 많아지고 있다. 종교를 '신앙'하는 시대에서 종교를 '소비'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교회가 자초한 '가나안' 시대
 

사랑제일교회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교회. 1983년 전광훈 목사가 설립했다. 동대문구 답십리동 상가건물에서 출발, 1995년 지금의 위치에 있던 예배당 건물을 매입하여 이전했다. 전광훈 목사는 자신의 발언 때문에 ‘빤스목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 백창민

 
2013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19.4%였고, 불신한다는 결과는 44.6%로 나타났다. 201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한국인 중 43.9%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의 종교를 신자 수 순서로 나열하면, 개신교, 불교, 천주교 순이다. 불교 신자 761만 명(15.5%)과 천주교 신자 389만 명(7.9%)에 비해 개신교 신자 수(967만 명)는 압도적으로 많다.

2014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교회와 선교단체, 기도원 같은 개신교 단체 수가 편의점이나 카페, 숙박업소보다 더 많았다. 흥미로운 지점은 개신교가 신자 수 967만 명(19.7%)으로 1위였지만 종교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낮았다는 점이다.

2017년 사단법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실시한 종교 신뢰도 조사에서 개신교는 5점 만점에 2.55점으로 꼴찌를 했다. 개신교의 신뢰도는 천주교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한때 '선망'했던 종교, 개신교는 이제 '혐오'하는 종교가 되었다. '신앙'과 '믿음'의 전당이어야 할 교회는 어쩌다 '불신'의 공간이 되었을까. 

개신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부분도 늘 도마에 오른다. 개신교가 전통문화 유산이 된 불교 사찰을 훼손하거나 타 종교에 대해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개신교가 즐겨 쓰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표현 중 '천당'과 '지옥'은 불교 용어다. 개신교가 장로, 전도, 기도, 천당, 지옥, 말세 같은 불교 용어를 즐겨 쓰면서 불교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어불성설 아닐까.

2000년대 들어 늘어난다는 '가나안 교인'은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는 교인을 일컫는 은어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교회에) '안 나가'가 된다. 가나안 성도는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 '교회 밖 그리스도인'(unchurched Christian)이라 불리는 가나안 신도는 왜 늘어날까?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l, nulla salu)."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의 이 말은 오랫동안 기독교인에게 금언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신앙인의 최종 목표인 '구원' 문제가 걸려 있음에도 교회 바깥을 떠도는 신도가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불륜과 재산 형성, 광림교회의 세습,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재정 비리 같은 사건을 떠올리면, '교회 난민' 증가는 교회 스스로 자초한 게 아닐까. 

한 연구에 따르면 '가나안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자유로운 신앙생활(30.3%), 목회자에 대한 불만(24.3%), 교인에 대한 불만(19.1%), 신앙에 대한 회의(13.7%)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로 목회자와 신도에 대한 불만이 43.4%나 된다. 신도를 불러 모아야 할 목회자, 신앙 공동체인 교인이 신도를 내쫓고 있는 것이다. 

어디를 봐도 교회는 넘쳐나는데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왜 늘어나는 걸까?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표현처럼 교회는 범람하지만 마음을 둘 교회는 줄었기 때문 아닐까. '신앙은 상식을 초월한다'지만 '몰상식한' 교회 때문에 많은 신앙인은 좌절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ubi Christus, ibi ecclesia)."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말과 달리, 오히려 '예수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leaving church to follow Jesus)는 말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적극적인 가나안 신도는 "건물이나 모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교회 아닌가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의 의미는 '예수처럼 사는 사람', '예수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람은 계속 늘고 있다.

법정(法頂) 스님은 기독교인 가운데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과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개신교 신도의 감소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 아닐까?

개신교 지도자가 '군림'과 '착복'이 아닌 '섬김'과 '나눔'의 행태를 보일 때 신자도 비로소 하나님을 느낄 것이다. 사제가 도덕적으로 '추락'한 종교는 세속적으로도 '몰락'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대응 과정에서 예배를 '강행'한 일부 교회의 행태는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야기했다. '교회 이기주의'로 보이는 이런 행태는 왜 나타날까? '사회 공동체'보다 '교회 공동체'를 앞세우기 때문이 아닐까.

기업뿐 아니라 교회에도 '사회적 책임'(Church Social Responsibility)이 있다. 전염병이라는 전 세계적 재난 앞에서 하나님이 보호해주실 거라는 그릇된 믿음을 앞세우는 개신교회가 신천지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많은 시민에게 의문을 남겼다. 

수많은 사이비 종교가 개신교를 기반으로 탄생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멀리는 나운몽(기도원), 박태선(부흥회와 전도관), 통일교 문선명으로부터 가까이는 대구에서 코로나19 감염을 광범위하게 일으킨 신천지, 세월호 참사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유병언, 박근혜 시대 국정 농단의 주역인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 JMS 정명석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이비 종교의 상당수가 개신교를 '모태'로 출현했다. 오제홍은 한국 사회에서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가장 큰 원인을 한국 교회로부터 찾았다. 

"정통이 정통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기 위해 또 다른 리더와 단체가 등장하는 과정이 되풀이된 것이다. 교회의 부정과 부패, 담임목사직 세습 등 한국 교회는 사이비 종교 단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예배와 경건의 공동체라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우리를 구원할 때가 아니라
 

높은뜻광성교회 2001년 동대문구 이문동 동안교회에 있던 김동호 목사는 높은뜻숭의교회를 새롭게 개척했다. 숭의여대 강당에서 예배를 보던 높은뜻숭의교회는 2009년 높은뜻정의교회, 높은뜻광성교회, 높은뜻푸른교회, 높은뜻하늘교회 4개로 나뉘었다. 예배당을 따로 두지 않는 높은뜻광성교회는 이 건물에 사무국을 두고 있다. ⓒ 백창민

 
구한말 종교가 폭발적으로 퍼진 것은 그만큼 삶이 고단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뿐 아니라 동학(천도교)·원불교·증산교·대종교 같은 종교가 크게 퍼진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가 널리 퍼진 건 개신교의 메시지가 큰 위로가 되었음을 뜻한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개신교는 왜 가장 신뢰도가 부족한 종교, '개독교'(皆毒敎)가 되었을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제'라는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을 통해 개인의 신앙을 존중하며 출범한 '개신교'(改新敎)는 그래서 '개신교'(個信敎)로 이해되기도 한다. 양희송의 지적처럼 '신앙을 개혁한 종교'(改新敎)인 동시에, '개인의 신앙을 존중하는 종교'(個信敎)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개신교'는 어쩌다가 '개독교'가 된 걸까. 개독교, 아니 개신교가 권력화하고 세속화(secularization)한 이유 때문은 아닐까. 

명성교회와 그 도서관의 거대함은 감탄스럽지만 교회 신도가 아니면 그 지역에서 사업도 정치도 하기 힘들다는 소리는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권력'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 사회에 발 딛고 있는 교회가 그 사회를 닮고 드러내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교회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닌 세속 그 자체일 것이다. '종교'와 '세속'의 차이가 없고 종교에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이 없다면, 성(聖)의 탈을 쓴 종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큰 건물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보다 작은 교회일지라도 지역사회에 '밀알'이 되는 교회가 더 아름답지 않을까. 최근 들어 대형교회 해체를 선언한 분당우리교회나 '건물 없는 교회'를 표방하며 학교를 빌려 예배를 한 '높은뜻숭의교회', 공유 주택을 통해 종교 공동체를 넘어 생활 공동체로 발전한 은혜공동체, 등록·헌금·직분 3가지가 없는 '3무(無) 교회' 벙커원교회 사례가 사회의 주목을 받는 건 그 때문 아닐까.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신도를 천국으로 이끈다는 교회가 부를 축적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란 '부자교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부자교회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는 말이 있다. 대형교회가 달려가는 길은 생명으로 가는 '좁은 문'인가,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인가.

명성교회 도서관은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도서관 중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다. 공공도서관을 뛰어넘는 장서와 시설, 그리고 지역사회 개방으로 명성교회 도서관은 놀라움을 자아내지만, 전근대적인 세습 시도와 불투명한 교회 재정으로 실망스러움을 동시에 안기는 곳이다. 미국 상원에서 의회목사(chaplain to the U.S. Senate)를 지낸 리처드 헬버슨(Richard C. Halverson)은 교회의 변천사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처음에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교제 모임(fellowship)이었다. 그러나 그 후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philosophy)이 되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institution)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넘어가서 문화(culture)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enterprise)이 되었다." 

미국을 거쳐 한국에 온 교회는 '무엇'이 된 걸까? 어쩌면 우리 시대는 교회가 우리를 '구원'(redeem)하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혁을 통해 교회를 '구출'(save)할 때가 아닐까.

[명성교회 도서관]

- 주소 : 서울시 강동구 상암로51길 8(명일동)
- 이용시간 : 전관(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10:00 - 18:00 / 수요일 10:00 - 17:30 / 일요일 09:00 - 17:30), 본관 지하 1층 자유열람실(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10:00 - 24:00 / 수요일 10:00 - 17:30 / 토요일 10:00 - 22:00 / 일요일 10:00 - 17: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법정공휴일(법정공휴일과 겹치는 일요일은 개관)
- 이용자격 : 관외대출, 자유열람실(평생회원권 소지자, 평생회원비 1만원) / 관내열람(교인, 지역주민) / 디지털자료실(중학생 이상 일반인)
- 홈페이지 : http://www.mslib.or.kr
- 전화 : 02-440-9140
- 운영기관 : 명성교회
덧붙이는 글 '명성교회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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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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