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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큰 모자를 쓴 '허수아비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29)]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②

등록 2020.04.17 18:37수정 2020.04.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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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최규하 내각 각료들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선서하고 있다(1976). ⓒ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

 
원주 출신의 인물
 
원주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도시다. 국립공원 치악산을 비롯하여 백운산, 감악산, 구학산, 매화산 등 10여 개의 명산이 둘러싼 분지다. 또 이 도시 옆을 남한강과 섬강이 흐르고 있다. 내 전생에 이 도시와 연(緣)이 있는지 10여 년째 원주 시민으로 치악산 밑 자그마한 아파트에 글방을 차려놓고 날마다 글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 도시에 살아보니 자연재해가 없는 '건강 도시'라는 것을, 또한 교통이 발달해 쾌적한 도시라는 것도 알게 됐다. 산과 물이 좋으면 인물도 많기 마련이다. 근현대 원주의 인물로는 구한말 의병장 민긍호, 이은찬, 지학순 전 천주교 원주교구장(주교), <토지>의 작가 박경리, 재야 사상가 장일순, 최규하 대통령 등을 꼽을 수 있다. 
 
나는 틈틈이 앞의 다섯 분 자취를 두어 번 더듬은 바 있었다. 하지만 최규하 전 대통령의 족적은 미처 답사치 못했다. 그러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연재를 앞두고서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이즈음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로 최규하 생가도, 출신학교도 외부인 출입금지 팻말이 한 달이 넘도록 걸려 있었다. 

두 곳은 마침 내가 사는 행구동 마을과 이웃인 봉산동 마을에 있다. 여러 날 지나는 길에 엿보아도 '출입금지' 팻말은 치워지지 않았다. 엊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무거운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최 대통령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원주시 봉산동(현 원주시립박물관)에 있는 최규하 생가 ⓒ 박도

 
최규하 생가는 원주시 봉산동 원주시립역사박물관 옆에 있었다. 예상대로 박물관 문은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안채는 들어가지 못하고 생가 대문 밖에서 카메라 셔터를 서너 번 누른 뒤, 거기서 1km 쯤 떨어진 원주초등학교로 갔다.

"봄꽃보다 예쁜 너희들이 보고 싶다"라는 펼침막 아래 교문은 닫혀 있었다. 밖에서 카메라를 메고 서성이자 학교 선생님인 듯한 분이 고맙게도 문을 열어 줘 원주초등학교 본관 건물과 최규하 대통령 기념관인 '현석관' 외부만 얼른 촬영한 뒤 뒤돌아섰다.
 
최규하는 1919년 원주시 봉산동에서 아버지 최양오와 어머니 이응선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 <소학> < 동몽선습> 등을 배우다가 1928년 원주보통학교(현 원주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932년에 졸업했다. 그는 원주보통학교 재학 중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는데, 특히 글짓기가 매우 뛰어나 일본인 담임 선생님의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원주초등학교 후문 위의 펼침막 ⓒ 박도

    

최규하 대통령 모교 원주초등학교 ⓒ 박도

 
과장에서 국무총리가 되다
 
최규하는 1932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전국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서울의 경성제1고보(현 경기고)에 진학했다. 이 학교에서도 그의 학업성적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영어 성적이 출중해 일본인 영어교사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전해진다.

이 학교에서 전교 2등으로 졸업한 최규하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진학했다. 1941년 그 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의 한 중학교에서 잠시 교사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교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1942년 만주 대동학원에 입학했다.
 
대동학원은 1932년 만주국이 세운 곳으로 만주국의 관리를 양성하고, 현직 관리를 재교육하는 학교였다. 대동학원을 졸업한 최규하는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 약 2년간 만주국 관리를 지냈다고 한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사범대학)의 영문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1946년 4월부터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면서 공무원이 됐다. 미 군정기부터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이후 출세 가도에 발판이 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변영태 외무부장관의 눈에 띄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화려한 외교관 시대가 열렸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대의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국가기록원

 
이후 주일대표부 총영사, 참사관, 1959년에는 주일대표부 공사, 외무부 차관에 이르기까지 계속 고속 승진했다. 5.16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됐다가 1967년엔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됐다. 그의 성실함과 실력에 감탄한 박정희는 그를 계속 요직에 앉혔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박 대통령의 고굉지신(股肱之臣, 가장 신임하는 부하)으로 1975년 국무총리가 됐다.

그는 과장에서 시작하여, 국장, 차관, 장관, 국무총리에 이른 뒤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공무원 사회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 배경에는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과 업무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청렴결백한 생활 자세 등이 있었다.

나는 최규하 국무총리 임명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 사회면 머릿기사에서 연탄 집게를 들고 연탄불을 가는 그의 프로필 기사에 감명을 받았다. 그 영향으로 우리 가족은 1990년대 말까지 서울 구기동 산동네에서 연탄 난방으로 지냈다. 
    

외무부 장관 시절의 최규하(1967). ⓒ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

    
'허수아비 대통령'
 
이즈음 나는 최규하 대통령의 행적을 여러 문헌에서 들추면서 문득 계유정란 때 유응부 장군의 일화가 떠올랐다.
 
계유정란(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정변) 뒤 단종복위 때 일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과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이 서로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정창손과 그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수양대군이 이들을 친국할 때였다. 수양이 유응부 장군에게 말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삼아 사직(社稷)을 전복하려고 한 짓이지."
 
그런 뒤 금부도사에게 시뻘건 인두로 살가죽을 지지는 고문을 가하며 신문했으나 자복(自服, 자백)치 않았다. 유응부는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을 돌아보면서 크게 꾸짖었다.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하여 연회를 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이는 지식인들의 좌고우면 나약한 한계를 지적한 무장의 자탄이었다.

작가 강준식은 최규하 인물평에서 "그가 대동학원에서 정치를 보는 인목을 키웠다고 했는데, 그 정치적 안목의 실체는 어디 줄을 서야 오래갈 것이지를 저울질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꼬집었다.

최규하, 그는 모범 공직자로 평가될지 모르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민주발전과 절대 다수 국민들의 행복을 지키는 자리에는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체구는 컸지만 대통령이라는 큰 모자, 직책을 감당하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위기에 좌고우면했다.

그래서 그는 사후에도 '허수아비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다른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대전국립현충원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나 보다.
 

최규하 대통령이 '팀스피리트 80'을 참관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준식 <대한민국의 대통령>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 권영민 지음 <자네 출세했네>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최규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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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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