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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어머니의 '농담',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한열이 기억해 준 한빛②] 아들 한빛의 의미와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등록 2020.04.21 11:17수정 2020.04.2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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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기자말]
한빛이 4살 때 동료교사들과 연세대에 갔었다.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콘서트가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집회나 콘서트가 대학교에서 많이 열렸다. 토요일 오후나 휴일에 한빛을 맡길 곳이 없어 거의 한빛과 함께 갔다. 자주 다니다 보니 어린 한빛도 대학 캠퍼스에 익숙해했고 나들이 가듯 따라 나섰다. 운동장과 잔디밭이 넓고 좋아서 혼자서도 잘 놀았다.

6월의 연세대 중앙도서관에는 이한열열사가 최루탄에 맞은 후 부축받는 모습의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판화체 문구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나 캠퍼스는 여름 햇살로 눈부시게 화려했고 백양로도 온통 신록이었다. 우리도 젊음의 분위기에 휩싸여 들뜬 채 콘서트를 기다렸다.

남색 여름 생활한복을 입은 한빛이는 학생회관 앞 돌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놀고 있었다. 마침 사진공부를 하던 후배교사가 좋은 카메라로 한빛을 찍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한빛이 너무 예뻐 코팅해서 내내 거실에 붙여놓았다.

가끔 소파에 앉아 있다가 "한빛아 너가 저렇게 어릴 때도 있었네. 저기가 연대 학생회관 앞인데 기억도 안 나지? 콘서트 보러 갔는데 너가 저 돌계단에서 계속 놀겠다고 고집부려 아빠가 너랑 놀다가 콘서트 끝날 때에야 오셨지"하면 별걸 다 기억한다며 뜬금없어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네 살 한빛과 스물일곱의 힘겨웠을 한빛이 같은 한빛이었나? 전혀 다른 한빛으로 다가 왔다. 멍하니 사진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면 네 살 한빛이 스물일곱의 한빛이 되어 있었다. 지켜주지 못하고 이제는 어찌할 수 없음에 가슴을 움켜쥐고 우는 나를 한빛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투사가 아니라서 한빛에게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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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32주기 추모식 참석한 배은심 여사 이한열 열사 32주기 추모식이 열린 2019년 6월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한열동산에서 고인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권우성

 
2019년 6월.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모처럼 맘 편히 아들 모교를 찾았다는 신문기사를 봤다. 이한열 열사 추모식이 32년 만에 학교 공식 행사로 거듭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비가 오면 (행사가) 우중충해진다. 아침에는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그쳐서) 감사하다"며 "1987년 이후 한해도 빠짐없이 총학생회가 도서관 앞에서 추모제를 지낼 때마다 (학교 눈치를 보느라) 가슴이 두근두근했다"면서 "오늘 총장이 추모사하고 학교에서 추모제를 정식으로 지내니 앞으로는 학교 눈치 안 봐도 되겠다"고 농담조로 얘기해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는 내용이었다.

배은심 어머님의 농담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피를 토하며 외치는 어머니의 절규도 자식 잃은 엄마의 일방적인 분노라고 폄하했겠지. 세월호 부모님께 막말을 해도 국회의원이 되는 세상인데 그동안 얼마나 기막히고 처절했을까? 강하게만 생각했던 어머님도 가슴이 두근두근 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한빛 죽음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CJ ENM 앞에서 1인 시위와 집회를 할 때 경비한테 쫓기고 힘내라고 시민들이 쓴 포스트잇과 한빛 사진들이 철거당해 지나는 사람들에게 밟혔다.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떨렸다. 철저하게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려고 알아서 기었고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무산될까 봐 덜덜 떨었다. 나는 그랬다.

이한열 엄마나 전태일 엄마처럼 투사가 아니라서 한빛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용기없는 엄마니까 너를 잃었구나. 한빛아 미안하다 하며 엉엉 울었다. 그랬기에 32년간 학교 눈치를 보느라 힘드셨다는 기사를 보고 칼로 가슴을 후비는 것 같았다. 당당하게 아들 추모제를 하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신고 안 한 집회라고 학교에서 패대기치고 밀어내지는 않을까? 엄청 불안하셨을 것이다. 어머님은 매년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이한열기념관은 국내 유일의 민간 설립기념관이라고 한다. 유족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신촌에 주택을 구입하였고 거기에 2004년 시민들의 성금을 더해 지금 이 기념관을 세웠다.

비록 기념관은 겉보기에는 작고 소박했지만 의미있게 출발한 만큼 그 역할은 컸다. 단순히 민주주의를 위해 몸 바친 열사 이한열만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머물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열사들을 기억하게 했다. 어느 누구도 단체도 감히 시작하지 못한 잊혀가는 열사들을 모두 함께 기억하는 공간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이한열장학회를 통해 이한열의 정신을 이어가는 대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었다. 대단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멀리 전태일 엄마 이소선 여사, 이한열 엄마 배은심 여사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지금 나는 용균엄마, 반올림 유미 아버지와 동시대 시간을 살고 있다. 모두 자식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경험을 통해 세상의 잘못된 구조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자기 자식은 죽었지만 남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더 이상 내 자식과 같은 희생이 없게 하기 위해 그들은 세상과 맞섰다. 다른 아이들이 죽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열이 어머님이 바로 거리로 나오셨듯이.

한빛 2주기 추모제 때 오셔서 "한빛 엄마 손이라도 잡아주어야 하는데..."하셨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데 손을 잡아 주려고 일부러 오신 한열어머님. 따듯하게 마음을 포개주시고 기억해주심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암울한 독재정권에도 굴하지 않고 강한 투사로 살아오신 배은심 여사도 영화 <1987>은 볼 수 없다고 했다. 30여 년이 흘렀는데도 한열이는 엄마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에게 한열이는 결코 죽지 않은 것이다. 세월호 416합창단 엄마 아빠들이 오늘도 별이 된 아이들에게 이야기 하듯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빛을 부활시켜 지금 같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억지라고 해도 나 역시 붙잡고 있다. 한빛의 부활만이 내가 살아갈 이유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어도 그 의미는,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남은 자에게 특히 엄마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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