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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 준비 용품들이 전부 창고에... 많이 힘드네요"

추억 느끼러 학교 앞 문방구에 갔다가 고된 삶의 현장을 느끼다

등록 2020.05.01 17:21수정 2020.05.0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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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제일 바람이 따스한 날, 초등학교 앞 문방구의 옛 추억을 되살리려 취재를 나갔다.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학원을 가기 전에 늘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시간을 때웠다. 친구들과 둘러 앉아 설탕을 녹여 달고나를 만들기도 하고 갖가지 인공색소들로 범벅된 불량식품을 사서 나눠 먹기도 했다.
 

A문방구로 내려가는 계단 평소라면 아이들 소리로 울려퍼졌을 곳.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적막만 가득했다. ⓒ 송주영

 
서울의 한 초등학교 근처 문방구 두 곳 중 A 문방구를 먼저 방문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내내 적막감만 맴돌았다. 아이들의 북적거림은 없고 그 넓은 공간을 사장님과 손님 그리고 내가 채웠다. 손님마저 나가자 사장님은 나에게 찾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지나간 추억을 더듬으려 문방구를 취재하러 왔다고 하니,


"왜 왔어요? 다 똑같지 뭐."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장사가 좀 되세요? 원래 이맘때쯤엔 학생들이 가득했을 것 같아요."
"코로나 때문이 아녜요. 다OO가 골목 상권을 다 잡아먹었고 시장도 대형마트 때문에 마찬가지고. 경기가 안 좋아 휘청거리던 것이 코로나19 때문에 한방에 무너진 거예요. 모닝글로리나 알파 같은 대형 문구사들은 사무용품 위주라 수요가 꾸준히 있어요. 힘든 건 우리 같은 골목 상인들이지. 그래도 시작할 때는 장사가 잘 됐는데... 친구들끼리 모이면 늘 '그때가 좋았지' 그래요."


'그때가 좋았지.' 살풋 미소 지을 법도 한 말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짙게 그늘이 드리웠다. 지금의 불황에 빛을 잃은 사장님의 눈빛이 매서웠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을 나중에 대한 불안 때문이리라. 

"그래도 불량식품이나 슬라임 같은 문구는 다시 붐이 일어서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예전이죠. 지금은 KC 인증이다 뭐다, 안전 검증받은 상품들만 들여놓습니다. 내가 장사 시작할 때쯤이나 불량식품 먹고 놀곤 했지. 지금 애들은 스마트폰 한다고 바빠요. 또 예전에는 등교할 때 아이들이 문방구에서 준비물 사서 갔잖아요. 몇 년 전부터 제도가 바뀌어서 그런 것들은 학교 측에서 대량으로 구입해 나눠줘요. 그때부터 우리 동네 가게들도 힘들어 하더니 지금은 나랑 옆 가게 빼고는 다 없어졌어요."


전에는 몰랐다. 아니, 마냥 편함에 외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계를 걱정하는 한 사람을 마주한 순간, 'KC 안전 인증', '학습준비물지원정책' 등의 편함은 더 이상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사이, 수입이 줄어든 가게가 하나씩, 가정이 하나씩 무너졌을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불편했다.
 

B문방구 입구 취재를 마치고 나와 찍은 B문방구 내부 모습. 저멀리 사장님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 송주영

 
바로 옆 상가에 위치한 B 문방구에 방문했다. 지상 1층에 위치한 그 곳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무리가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안녕하세요. 문방구 취재 차 방문했습니다. 방금 바로 옆에 있는 문방구 방문했는데 그 곳보다는 손님이 많네요."
"그런가요? 근데 오늘만 이렇지 다른 날은 그 곳이랑 마찬가지예요. 신학기 준비하려고 잔뜩 준비해놓은 문구들이 전부 창고에 쌓여만 있어요. 보통 1월 말에서 2월초까지 물건을 다 구비해 놓는데 자꾸만 개학이 늦춰지더니 이제는 온라인으로 수업한다고... 상하지 않는 것들은 내년에 팔 수 있는데 아닌 것들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네요."


"장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14, 15년 됐나? 예전에는 아이들끼리 학원에서 모이거나 생일파티 한다고 뭔가 잔뜩 사갔는데 요즘은 그런 모임 자체가 힘드니까. 나도 학부모라 개학도 늦추고 모임도 자제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사하는 입장에서 많이 힘든 것이 사실이에요."


처음 기사를 기획할 때만 해도 카니발의 '그땐 그랬지'를 흥얼거리며 아름다운 추억을 곱씹게 될 줄 알았다. 지금은 살기 바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생계를 걱정하는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사장님들 앞에서 차마 추억을 운운할 수도 없었다. 나의 호기는, 객기였다.

인터뷰 내내 연신 "열어놓기야 하는데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는 사장님들의 말에 얼마 전 대리운전을 하는 아빠와 했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거리에 사람이 없다. 그래도 어쩌겠노. 그냥 나가는 거지." 통화 말미에 아빠는 "모두가 힘들지만 너라도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애써 나를 격려하며 내쉬던 아빠의 깊은 한숨이 문방구 사장님들의 그것과 꼭 닮은 듯했다.

올해 들어 바람이 가장 텁텁한 날, 두 곳의 문방구를 다시 찾았다. 불량식품 위에 뽀얗게 먼지가 쌓였다. 아이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만들어낸 흙먼지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 차분하게 가라앉은 먼지라 더 안타깝다. 이번에는 질문 대신 손님이 되어 지갑을 열었다. 불량식품 까먹으며 사장님을 뒤로 한 채 문방구를 나선다. 넓은 추억의 공간, 사장님 외엔 아무도 없다.
#골목상권 #문방구 #소상공인 #경제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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