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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꽝 언 고등어조림의 힘

'집밥' 폴더 사진을 열어보다가 쓰는 엄마의 집밥 이야기

등록 2020.05.03 19:46수정 2020.05.0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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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난 아직 요리에 영 서툴다. 흥미가 없어서인지 혹은 센스가 부족해서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도통 실력이 늘지 않는다. 게다가 식재료의 양을 일 인분에 딱 맞추어 준비하고 조리한 이후, 남김없이 해치우기에 나는 지나치게 손이 크다. 남은 재료들이 고스란히 냉장고 어딘가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다가 종국에는 쓰레기통행으로 직행하게 된 경험도 여러 번이라 최근 들어선 아예 시도할 엄두도 내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수십 종의 김치를 직접 담그거나 보기만 해도 구수한 냄새를 솔솔 풍기며 빵을 굽고, 매 끼니마다 다른 반찬을 만들어 뚝딱뚝딱 그럴싸한 한 상을 차려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또 신기하다. 그러나 부럽고 신기한 것으로 끝이다. 나는 사실 끼니를 챙긴다는 것에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니고 입맛 역시 까다롭지 않다. 사 먹는 밥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편의점이다.

요즘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음식의 퀄리티는 놀랍다. 종류도 다양할 뿐더러 맛도 좋다. 가장 큰 장점은 간편하다는 데 있다. 전자레인지 이분이면,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찌거나 굽거나 졸이거나 하는 불필요한 과정을 모두 생략할 수 있다. 내가 직접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다.

간혹 이런 나를 외계인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 혼자 살면서 다 사 먹는다고? 그럼 식비도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시집가긴 글렀네. 남의 걱정을 그렇게 해주시니 감사할 노릇이지만, 혼자 밥 사 먹을 정도는 벌고 있는 데다가 딱히 시집 못 가 안달난 것도 아니니 그런 걱정이랑 접어두시라.

편의점 마니아도 그리운 집밥

그런데 사 먹는 밥에 만족하고 편의점을 신세계로 여기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약해지게 만드는 마법의 메뉴가 있다. 바로 '집밥'.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혹은 혼자 아파서 끙끙댈 때,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폭발 직전의 불편한 심기일 때, 나는 집밥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순전히 엄마 때문이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쯤 본가에 내려간다. 내려가기 직전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에게 먹고 싶은 목록을 적어 문자를 보낸다. 내가 보내는 문자는 매번 비슷하다. 김치찌개, 콩나물무침, 고등어구이. 편의점에서 팔지 않는, 엄마만의 간으로 완성되는 그 시시한 반찬들을 나는 제일 좋아한다. 엄마가 단골로 다니는 채소 가게 아주머니는 엄마가 콩나물을 사러 갈 때면 이렇게 물으신단다. "콩나물 사는 거 보니 그 집 딸 왔나 봐?"

사실 엄마는 오성급 호텔 주방장이 와도 한 수 접고 배워야 할 만큼, 음식 솜씨가 어마어마하신 분이다(물론 순전히 딸의 주관적인 시각이다). 엄마 손맛의 비결은 단 하나, 식구들 먹일 것을 만들 때는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엄마는 콩국수 하나를 해도 직접 콩을 갈아 콩물을 내고 밀가루 반죽을 치대서 면을 만든다.

시골집 마당 한편에는 노상 반찬거리가 되어줄 가지와 고추, 깻잎이 자라고 마당의 빨랫줄에는 늘 떡에 들어갈 호박고지들이 줄 맞추어 널려 있다. 또 식구들 모두 (특히 내가) 생선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물 좋은 생선을 구하기 위해 양양이며 강릉 시장까지 장을 보러 가기도 망설이지 않으신다. 그러니 엄마가 마음먹고 차린 밥상 앞에서 밥 한 공기만으로 족하다고 일어나는 사람을 여태 본 적이 없다.
 

최근 집밥 불고기는 엄마의 전매특허, 콩나물무침은 나의 힐링푸드. ⓒ 조하나

  

집밥 비지찌개는 콩을 직접 갈아서 만드신다.. ⓒ 조하나

 
나는 본가에 내려가면 보통 하룻밤을 자고 올라온다. 당일 저녁과 다음날 아침, 나는 그렇게 딱 두 번 '집밥'을 먹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식탁을 나는 사진으로 남겨두고 있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시작한 것인데 어느새 그렇게 찍은 사진이 어림잡아 백 장은 되다 보니 폴더를 따로 만들어 관리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처음엔 밥상머리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타박하던 엄마가 이제는 내가 사진 찍는 것을 깜박하고 먼저 숟가락을 들려고 하면 놀라서 묻는다. "얘, 너 사진 안 찍니?"

엄마는 때때로 식탁 위 그릇의 색깔이나 음식 플레이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사진을 찍기 전에 다급히 '잠깐만!'을 외치기도 하신다. 나중에 사진에 대고, 이 나물에는 저 그릇이 더 잘 어울리는데, 냄비를 다른 걸 쓸 걸 그랬네, 하면서 아쉬워하는 엄마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사실 엄마는 삼십 년이 넘게 식당을 하셨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한 번도 음식 하는 법을 안 가르쳐 주셨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본인처럼 하루종일 주방에서 종종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거기서 보람을 느끼는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진 않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신랑감을 언제 데려올 거냐 닦달하실 때마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사는 거지"라는 말로 받아치시는 것도 엄마다.

'잘 먹는 것'으로 대신하는 효도

내가 하룻밤을 자고, 서울로 올라갈 때 엄마는 그동안 국과 찌개를 할 때마다 내 몫을 덜어서 얼려놓았던 것을 담아 주신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먹어라, 가 아니라 "뎁혀 먹어라"라고 끝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엄마가 한 보따리 싸준 것들을 들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열흘은 남부러울 것이 없다. 꽝꽝 언 고등어조림을, 김치찌개와 해물탕을 나는 엄마 말대로 잘 '뎁혀' 먹으면서 '집밥'의 여운을 즐긴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밥 사 먹을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제 엄마도 머지않아 일흔이 되신다. 아직 정정하시지만, 음식을 할 때 이전보다 간이 조금 짜거나 싱거워질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엄마는 지나치게 속상해 하면서 내게 물으신다. "얘, 이거 좀 짜지 않니?" 그럴 때 난 씩씩하게 말한다. "이 정도는 짭짤해야 밥반찬이지."

오늘도 엄마는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쑥을 뜯느라 신이 나셨다. 쑥 반대기를 하신다는데 뭔지 몰라 검색해 보니 반죽에 쑥을 뜯어 놓고 납작납작 빚은 떡인가 보다. 잔뜩 해서 얼려 줄 테니, 출근하기 전에 하나씩 꺼내 먹으라신다.

남들에게는 철없는 딸로 보일지 몰라도, 난 아직은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것들을 남들보다 더 맛있게 먹어 치우는 것으로 효도하고 싶다. 엄마도 아마 이런 내 마음을 분명 알고 계실 것이다. 우리는 누가 보아도 꽤 많이 닮았으니까.
#집밥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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