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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생가 복원이라더니 귀한 잔디에 관상수라니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33)]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③

등록 2020.05.04 11:56수정 2020.05.0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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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생가 ⓒ 박도

  
합천 생가로 돌아가라

전두환 생가 방문 날(4월 25일), 택시가 생가 대문 앞에 섰다. 늦은 시각 탓인지 대문은 닫혀 있었다. 다행히 자물쇠로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대로 돌아설 순 없지 않은가. 관리인을 찾고 부르기에 시간도 없었고, 게다가 언저리에 아무도 없기에 수소문하기 번거로워 그대로 대문을 슬며시 밀었다. 다행히 열렸다.

안내판을 보니 전두환 생가는 1983년 합천군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초가 지붕도 뜨락의 섬돌도 옛 모습 그대로 쌓은 게 아니고, 현대식으로 개축한 듯 보였다. 언젠가 강원도 봉평 이효석 옛집에 가보니 지붕 기와가 전통 재래 기왓장이 아니라고 개량 모조품이라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전두환 생가 지붕 이엉도 옛 방식으로 이어 덮은 게 아니었다.

생가 마당에는, 옛 주인의 이즈음 취향에 맞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골프장처럼 잔디가 깔려 있었다. 옛 우리네 초가집 마당에 잔디를 깔아놓은 집은 거의 없었다. 그 아까운 땅에 잔디를 깔다니…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밖에도 집안 구석구석에 값비싼 관상수가 심겨졌고, 제 철을 만난 영산홍 철쭉들이 흐드러지게 핀 채 옛 주인을 기다린 듯 보였다.

모든 생명체는 귀소본능을 갖고 있다. 귀소본능을 따라 전 대통령도 귀향한다면 노후도 훨씬 편치 않을까. 이곳에서 검소한 촌부로 지낸다면 여론의 따가운 질책도 한결 무뎌질 것이다. 

인생이란 어차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지난날 퇴임 후 백담사에 가서 오랫동안 수행생활을 했다면 그만한 철리는 깨우쳤을 듯하다. 그런데 왜 아직도 서울 도심 미세먼지 속에서 그 욕을 먹어가면서 법원에 들락거리나. 그게 전직 대통령으로서 무슨 영화로운 삶인가.
 

버마사태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전두환 대통령(1983. 10. 20.) ⓒ 국가기록원

  
지나가는 한 서생이 조언을 드린다.

"진정한 한 필부필부(匹夫匹婦)로 생가에 돌아가서 마당의 잔디를 걷어낸 뒤 텃밭을 만든 다음 한 편에 고추, 파, 배추, 들깨, 상추, 쑥갖 등 여러 남새들을 기르면서 여생을 보내시라. 그게 당신들도 편안할 것이고, 귀거래한 전직 대통령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전두환 생가 내 흐드러지게 핀 영산홍과 철쭉은 옛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박도

   
살고 싶은 조용한 시골 동네

그렇게 여생을 보낸다면 우리 백성들은 당신의 전비를 덮어줄 뿐더러 합천군민들은 성경 속의 '돌아온 탕자'처럼 반겨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얘기가 귀에 들리겠는가. 이즈음 행동거지를 보니까 아직도 가슴 속에는 참회보다 분노의 마음이 더 커 보였다. 아무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많은 생명들이 살상된 건 대단히 잘못된, 우리 역사에 불행한 일이 아닌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얼른 보기에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생가마을은 공기도 아주 맑고 조용한, 쾌적한 시골 동네였다. 때때로 당신이 아련히 그린다는 그 황강에 산책 나가 강 언덕에서 흐르는 강물을, 때로는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지나온 삶을 관조하시라.

그 얼마나 멋진 전직 대통령의 모습인가. 사실 고향에 이런 옛 집이 없어서 도시 변두리나 닭장 같은 좁은 곳에서 노후를 따분하게 보내는 이도 많다.
   
"뭐, 억울하다고?"

지난 세월 미처 피지도 못한 채 총탄에, 최루탄에, 곤봉에, 무서운 고문에 자지러진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의 원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나는 생가 마당에서 카메라 앵글을 이리저리 잡으면서 옛 주인이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그의 유소년 청년기를 더듬어 보았다.
  

전두환 생가 대문 ⓒ 박도

 
만주에서 귀국한 뒤, 대구에서 정착

나의 아버지는 일본 순사부장을 강둑 아래로 내던져버린 사건 직후 만주로 도피했다. 일본 순사부장은 가족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패악질이 심했다. 그래서 남은 가족들도 모두 만주로 갔다.

그 이듬해 나는 열 살 나이에 만주 길림성의 호란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해 가을 대화재로 수확한 곡식과 세간이 깡그리 잿더미로 변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영양실조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배가 고파 칭얼대는 막내 동생에게 젖을 물린 채 "죽더라도 내 땅에 가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말에 귀국을 서둘렀다.

1941년 봄, 귀국했으나 고향 합천에는 돌아가지 못하고 우선 대구에 짐을 푼 뒤 내당동 산비탈에 움막집을 지어 살았다. 귀국 이듬해 나는 정규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다행히 금강학원이라는 공민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44년 희도초등학교에 편입하여 1947년에야 졸업한 뒤 그해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초 6년제였던 대구공업중학교가 3년제 대구공업중학교와 3년제 대구공업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나는 대구공업중학교 3년을 수료하고, 곧장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로 진학했다. 대구공고 재학 중 운동에 열중하여 축구부에 들어가 골키퍼 포지션을 맡았다.
  

전두환 내외의 투표장면(1981) ⓒ 박도

대구공고 시절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정부는 한반도 최남단인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해 피란살이 중으로 최전선에서 쏴대는 포탄소리는 내가 살고 있는 대구까지도 들려왔다. 낙동강에서 밀리면 부산 앞바다밖에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국가운명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다.

그즈음 나는 육군종합학교 보병간부후보생 모집광고를 보고 친구들과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곧 합격통지서와 입영통지서가 날라 왔다. 그제야 부모님에게 말씀 드리자 어머니는 공부나 마치고 가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입영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입영할 때 가져가야할 합격증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은 먼저 떠났다.

다음 날 어머니 말씀이 내 합격증을 몰래 빼내 태워버렸다고 털어놓으셨다. 그때 기환 형도 군에 복무 중이고, 두 아들을 여읜 상태에서 어머니는 장남과 차남이 동시에 입대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워 며칠간 밥도 먹지 않았다.

나를 남겨두고 입대한 친구들은 곧장 전선으로 투입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낙동강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마 나도 십중팔구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낙동강전투는 그토록 치열했다.

전두환 생가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합천의 황강 ⓒ 박도

 
육사에 합격하다
  
그로부터 한 달 쯤 지났을 때다. 대구 중앙로의 병사사령부 앞을 지나가다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 모집'이라는 공고문을 보자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나는 그 길로 몰래 육사 입학절차를 밟았다. 본격 시험 준비를 시작한 나는 수험표를 어머니 눈에 띄지 않게 책갈피 속 깊이 감췄다.

제1기 생도모집 정원은 200명이라고 했는데 전국의 지원자는 1400명으로 경쟁률이 7대 1이었다. 필기시험 합격자는 228명이었는데 후일 확인해 본 결과, 내 성적은 끝에서 두 번째였다. 가입교 기간 중 탈락자를 대비하여 28명의 예비학생을 뽑은 것이다. 그 예비학생을 뽑지 않았다면 나는 탈락했을 것이다.

육사합격은 정말로 내 인생 운명의 전환점이요, 크나큰 행운이었다.
<전두환 회고록> 제3권 '황야에 서다' 19-37쪽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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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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