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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내세운 '태양'은 박정희였으니...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34)]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④

등록 2020.05.07 14:18수정 2020.05.0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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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 26. 사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 자료사진

 
나의 근현대사 답사여행

흔히들 여행 뒤에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명언이다. 답사여행은 더욱 그렇다. 답사지 일대의 사진을 잔뜩 찍어두면 나중에 답사기를 쓸 때 아주 요긴하다. 미처 답사지에서 메모하지 못한 것도 때로는 사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4월 25일 합천시외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전두환 생가에 부지런히 닿았다. 그러나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 조리개를 크게 연 뒤 생가 안팎을 부지런히 촬영했다.

나는 1999년부터 20여 년째 국내외 근현대사 역사 현장을 두루 답사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다섯 차례, 일본도 다섯 차례, 러시아 극동지방도 한 차례, 미국에도 한국전쟁 사진을 구하고자 네 차례나 다녀왔다. 그뿐 아니라 국내도 여러 곳, 특히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는 여섯 차례, 그리고 북한에도 금강산을 포함해 네 차례, 백두산도 세 차례나 답사했다.

요즘에는 카메라를 한 대만 가지고 다니지만, 젊은 날(60대까지)에는 두 대를 가지고 다녔다.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였다. 필름 카메라는 일반 필름과 슬라이드 필름 두 종류를 갖고 다니면서, 한 역사 현장 취재하면서 카메라를 바꿔 두세 번씩 찍기도 했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청산리 항일전적지 나무비(이제는 볼 수 없는 목비다). ⓒ 박도

 
내가 찍은 사진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청산리 항일전적지' 나무로 세운 목비(木碑)다. 이 목비를 청산리 전적지인 백운평으로 가는 길 옆 풀숲에서 아주 힘들게 발견했다. 널빤지로 된 것이다. 내가 그 장면을 촬영한 직후 바로 이 목비는 그 부근에 새로 세운 우람한 석비로 교체돼 사라져 버렸다. 그렇기에 아마도 이 목비 사진은 더 이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마지막 청산리 사진으로 값어치가 있다. 

또 한 장은 중국 요녕성 왕청문소학교 교정에 세워진 양세봉 장군 석상 사진이다. 답사단 일행이 어렵고 힘들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지는 어둑한 시간이었다. 나는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셔터를 여러 번 눌렸다. 그때는 필름카메라이기에 현장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귀국 후 현상해 보니 다행히 그 사진은 생각보다 선명하게 나왔다. 홀로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내천리 전두환 생가에서 바라본 앞산 ⓒ 박도

 
합천 황강

내가 전두환 생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집밖을 나오자 택시기사가 그새 차를 돌려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생가 앞산을 촬영한 다음, 눈으로 동네를 한 바퀴 훑은 다음 택시에 올랐다. 그날 대구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버스가 끊겨 시간에 쫓기지는 않았지만 다시 이곳을 찾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그 마을을 뒤돌아 보면서 셔터를 두어 번 더 눌렀다. 

택시는 조금 전 왔던 길을 되돌아 합천 읍내로 달렸다. 그러자 곧 다시 황강이 나타났다. 기사에게 부탁해 길가에 차를 세운 뒤 황강을 서너 컷 촬영한 뒤 다시 차에 올라탔다. 황강은 전두환 생가 마을을 또아리처럼 휘돌아 감싼 채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소년 전두환은 여름이면 벌거벗고 물놀이를 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내천리에서 보낸 나의 유년기는 늘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 <전두환 회고록> 제3권 '황야에 서다' 18쪽
 

경남 합천을 끼고 도는 황강 ⓒ 박도

 

나는 달리는 택시 안에서 줄곧 황강을 바라보며 전두환의 생애를 추적해 보았다.
 
육사생도 시절

나는 1952년 1월 1일, 육사에 가입교하여 본격 생도시절로 들어갔다. 나는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그 가운데 축구를 가장 좋아하여 육사에 입교한 뒤 축구부에 들어가 주장 생도가 됐다. 내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다른 포지션은 백 번 실수 하다가도 한 골을 넣으면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골키퍼는 백 번 잘 하다가도 한 번 실수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육사 2학년 때 비로소 외출이 허락됐다(그때 육사는 진해에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동기생 10여 명과 함께 외출한 뒤 육사 참모장 이규동 대령 집으로 갔다. 그때 참모장은 진해 변두리 조그마한 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었다. 집 앞에서 벨을 누르자 한 소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소녀가 이순자씨로 후일 집사람이 되었다.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1961. 5. 18). ⓒ 자료사진

 
육사생도 시가행진

1961년 5.16이 일어나던 해 나는 서울 문리대 ROTC 교관이었다. 이튿날인 5월 17일 아침, 나는 서울대로 출근치 않고 육군본부로 찾아가 거사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과 면담을 청하여 만났다.

"박 장군님! 제가 육사생도들이 5. 16.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하도록 주도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수고해 주시게."

그리하여 육사생도 800여 명이 동대문에서 시청 앞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은 혁명군에게 천군만마의 원군이었다. 그때까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부 시민들과 외국인들의 시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공로 때문인지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나는 민정이양 즈음에 초심을 잃지 않고 현역으로 복귀하려고 했다. 그러자 박 의장이 별도로 나를 불렀다.

"자네 예편해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시게."
"말씀 감사하지만 저는 정치를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군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박 의장의 전역 권유를 뿌리치고 군으로 원대복귀했다. 박 의장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나를 계속 각별하게 보살펴 주셨다. 그리하여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과장, 수경사 30대대장, 제1공수특전단장, 청와대경호실 작전차장보, 제1사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제1사단장 재임 중에는 제3땅굴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부대표창과 5.16민족상을 받는 등,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한껏 받았다.

-<전두환 회고록> 제3권 '황야에서다' 33-131쪽 축약정리
    

12. 12. 당시 중앙청 일대를 점거한 군인들. ⓒ 국가기록원

 
하나회와 12.12 사태

하나회는 1964년에 결성된 군 내부 사조직으로, 육사 동창회 북극성회와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은 북극성회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직된 단체가 하나회였다. 하나회는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을 가지겠다는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태양'은 바로 박정희다. 하나회 회원들은 지역적으로 경상도 출신 인맥이 주류를 이뤘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는 데다가 하나회 회장 및 북극성 회장에 선출되자 두 날개를 달게 됐다. 이후 군에서 그의 승진은 고속도로와 같았다. 1979년 3월에는 마침내 보안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리하여 10.26 사태 이후 그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유신 이후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10.26 사태 연루자를 밝힌다는 명분으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을 체포했다. 그런 뒤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도 수사관을 보내 조사를 시키는 등 수사망을 점차 좁혀갔다. 정승화로서는 그의 건방진 태도가 불쾌해 노재현 국방장관과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을 동해방위사령관으로 전출시킬 복안을 말했다. 이는 정승화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다. 중요 인사는 전격 단행해야 뒤탈이 없는 것이다.

지난날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쉬라'고 통보한 뒤 사무실로 돌아가자 그새 책상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승화의 복안을 전해들은 전두환은 즉시 보안사와 하나회 그리고 특전사 인맥을 동원해 10.26 사태 현장 가까이 있었던 정승화의 연루설을 퍼뜨렸다. 그러면서 정승화 계엄사령관 강제 연행 준비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다.

마침내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께,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비상계엄 하임에도 자신들의 부대를 벗어나 '생일집 잔치'라는 암호명에 따라 경복궁 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 ⓒ 자료사진

 
이들은 육군본부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수도권 지역의 무장병력 6000여 명을 동원해 육군본부·국방부·수경사·특전사 등을 점거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이 보낸 80여 명의 병력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덮쳤다.

이 시각 저녁식사 후 TV 뉴스를 보고 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갑자기 들이닥친 보안사 두 대령(허삼수·우경윤)에 의해 양팔을 붙들린 채 허망하게 연행당했다. 비상시 계엄사령관으로서 영민하지 못했다.

상관인 계엄사령관의 불법 강제 연행은 쿠데타로 그 순간부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전두환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김재규가 유신의 조종을 울렸지만 박정희의 유신 망령은 전두환에게 전이돼 쉽사리 민주화를 허락치 않았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두환 회고록> / 강준식 <대한민국의 대통령>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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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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