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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제련소 부근 금강소나무의 집단 죽음

[영풍과 환경오염 ⑤] 끊이지 않는 금강소나무의 수난, 이제는 멈추어야

등록 2020.05.10 18:06수정 2020.05.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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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있는 금강소나무 군락지 ⓒ 봉화군청 홈페이지

   
영풍의 아연제련소가 있는 석포(石浦). '돌 석'과 '개 포' 두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은 석포가 돌과 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포'는 일반적으로 지류가 강이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의미한다. 고려 초기에는 해변과 강가에 위치해 수로교통의 요충지로 이용되었던 촌락을 '포'라고 불렀다 한다.

석포의 옛 이름은 석개(石開)였다. 석개가 언제부터 석포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석개천과 석포리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곳에 있어서 석포라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 석포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지, 있었다면 수로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석포를 포함한 봉화 일대에서 벌채된 금강소나무가 뗏목으로 엮여 낙동강을 따라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금강소나무는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부터 경북 봉화, 울진 등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를 말한다. 금강산(金剛山)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 또는 줄여서 금강송이나 강송으로 불린다. 속이 짙은 황색이어서 황장목(黃腸木), 껍질에 붉은빛이 돌아 적송(赤松), 금강소나무 집산지였던 봉화 춘양의 이름을 따서 춘양목(春陽木) 등으로도 불린다.

금강소나무는 보통 소나무와 달리 줄기가 굽지 않고 곧으며 마디가 길다. 결이 곱고 단단해서 켠 뒤에도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최고의 목재로 인정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일반인의 벌채가 금지되기도 했다.
 

봉화군 소천면 고선계곡(구마계곡)의 금강소나무 군락. ⓒ 정종훈(숲해설가)

 
현재 봉화군 소천면과 춘양면, 울진군 금강송면 등을 중심으로 금강소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춘양면 서벽리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은 궁궐이나 전통사찰과 같은 문화재의 보수복원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서벽 문화재용 목재생산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영풍 석포제련소 주변을 포함한 석포면 일대에도 금강소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특히 석포면 대현리와 소천면 고선리에 걸쳐 있는 청옥산 일대에는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 말엽의 울창했던 금강소나무 숲을 복원해 100년 뒤 후손들이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남의 소금길 낙동강 따라 금강소나무 뗏목으로 운반
 

안동댐(1971년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 완공되었다)이 들어서기 전인 1969년 2월의 낙동강. 지금의 안동댐 바로 아래에 있는 개목나루(견항진)까지 낙동강 소금배가 올라 왔다. ⓒ 국토지리정보원

 

2020년 4월 안동댐 안동루에서 바라본 낙동강. 맨 앞쪽에 보이는 영락교와 그 다음 월영교 사이 왼편에 개목나루가 있었다. ⓒ 손영호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 영남 내륙으로의 물자이동은 주로 낙동강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 전근대 교통사>(고동환, 2015)에 따르면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 대부분의 화물운송은 낙동강 수운이 담당했다. 경부선 개통 이후에도 낙동강은 철도교통에서 소외된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낙동강을 통해 영남 내륙으로 운반된 대표적인 물품은 소금이었다. 강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이 되면 남해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을 실은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안동의 개목나루(견항진 犬項津, 지금의 안동댐 야외민속촌 앞)까지 올라왔다.


소금배에 실려 온 소금이 동해안 영덕 지역에서 잡힌 고등어와 만나면서 안동 간고등어가 탄생했다. 생선은 상하기 직전에 나오는 효소가 맛을 좋게 한다고 한다. 태백산맥을 넘어 하루 넘게 이동한 고등어가 안동에 도착할 즈음이면 상하기 직전이 되는데, 그때 내장을 들어내고 소금을 넣음으로써 맛있는 간고등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개목나루까지 올라와 소금을 내려놓은 배는 다시 쌀, 콩, 목재 따위를 싣고 되돌아갔다. 봉화 일대에서 벌채된 금강소나무는 뗏목으로 낙동강을 따라 운반되어 안동 등지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금강소나무 무차별 약탈
 

봉화군 소천면 고선계곡에 있는 비석.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금강소나무의 눈물이 담긴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 주재소 터”라는 제목의 비석에는 일제 강점기 금강소나무의 약탈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 정종훈(숲해설가)

 
봉화의 금강소나무는 일제 강점기에 많이 벌채되었다. 특히 산악지대에 도로가 놓이면서 금강소나무의 수난은 심해졌다. 1935년 일본의 재벌기업 미쓰비시(三稜)가 소천면 대현리(지금의 석포면 대현리)에 있는 아연광산을 매수하여 '미쓰비시연화광산'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 때, 동아일보(1935.5.9.)는 소천이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봉울도로(봉화-울진 간 도로)가 소천 광비까지 개통되고, 무진장의 처녀림이 울창한 산속까지 임산도로가 준공되자, 유명한 태백산 목재가 여름의 물을 이용하여 낙동강 상류에서 떼(뗏목)를 만들어 운반하던 것도 옛일이 되고, 매일 수십여 대의 화물차로 운반을 하게 되어 ..."

도로가 놓이기 전 봉화 일대에서 벌채된 금강소나무는 석포면과 소천면의 낙동강변 여러 군데에서 뗏목으로 띄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청량산 인근에 있는 명호면 풍호리의 비나리(비진, 飛津) 나루에서도 뗏목으로 만들어진 금강소나무가 강을 따라 하류로 보내졌다고 한다.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지는 일제 강점기 말에는 일제에 의한 금강소나무 약탈이 극심했다. 1937년 일제는 임업개발을 목적으로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는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금강소나무 군락지였던 소천면 고선계곡에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 주재소가 있었고, 주재소의 감시하에 금강소나무가 벌채되었다.

현재 주재소 터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금강소나무의 눈물"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주재소의 급사로 일을 한 안세기 옹의 증언이 새겨져 있다. 증언에 따르면 일본은 일본인 주임의 감독 아래 조선인 약 300명을 동원해 고선계곡 일대의 금강소나무를 무차별로 약탈했다.

일제는 벌목한 금강소나무를 산 아래로 옮겨가 껍질을 벗기고 1년간 말린 뒤 영주역으로 운반했고 그곳에서 기차로 부산으로 실어가 일본으로 가져갔다. 약탈 당한 금강소나무는 군함과 같은 전쟁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당시 잘라낸 금강소나무 중 긴 것은 10.3m에 이르고 밑동이 큰 것은 직경이 2m나 되었다. 어른이 두 손으로 감싸도 잡히지 않을 정도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다 베어졌고, 지금 있는 소나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육송정삼거리 금강소나무 경복궁 중건 때 베어져
 

영풍제련소 시민탐방단이 육송정삼거리에 있는 정자에 모여 있다. 나그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는 정자 안쪽에는 육송정의 유래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 영풍제련소시민탐방단

 
석포의 관문이자 영남의 낙동강이 시작되는 육송정삼거리에 있던 여섯 그루의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도 조선 말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베어져 낙동강 뗏목으로 운반되었다고 전해진다.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육각형 정자가 들어서 있는데, 1985년에 지어진 정자 안에는 육송정의 유래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옛날 이곳 삼거리에 소나무 여섯 그루가 있어 육송정이라 하였는데 조선조 말엽 경복궁 중수 시 이 여섯 그루를 베어 낙동강 뗏목으로 운반, 기둥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조선 말기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임진왜란 후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사업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의 중건이었다.

1865년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듬해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하여 마련해 놓았던 재목들이 전부 불타 버렸고, 새로 목재를 마련하기 위해 양반들의 선산이나 마을 성황당의 나무까지도 베어냈다고 한다. 그때 육송정의 소나무도 베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포제련소 부근 금강소나무 집단고사
 

환경부가 조사한 석포제련소 1공장 부근의 식생훼손지와 식생분포. ⓒ 환경부

   
영풍의 아연제련소가 있는 석포에도 금강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1970년 석포제련소가 들어선 이후 대기오염물질, 중금속 분진 등으로 인해 금강소나무는 수난을 겪어 왔다. 지난 연재에서 밝혔듯이 특히 2006년 아연 잔재를 처리하는 TSL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서 제련소 주변의 산림훼손은 심해졌다.

환경부의 <석포제련소 주변지역 환경영향조사>(2016.12)에 따르면, 훼손이 심한 1공장 부근의 식생을 조사한 결과 식생훼손지가 21.4%로 나타났고, 그 외 굴참나무군락이 39.2%, 소나무군락이 38.4% 분포하고 있다.

식생훼손지에서는 소나무의 피해가 컸는데, 소나무 전량이 고사한 지역도 있었다. 소나무의 피해가 심한 것은 침엽수가 활엽수에 비해 대기오염 등의 스트레스에 내성이 약하기 때문으로 판단되었다. 훼손지에서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와 풀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산림훼손이 문제가 되자 영풍 측은 산불이나 병해충이 원인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불은 산림고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산불이 발생하고 4년이 지나도 초본이나 관목의 형성이 매우 미약하고 생태계가 거의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병해충도 산림고사의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 <봉화통계연보>의 산림 병해충 발생현황을 보면, 석포면의 경우 2008년에 81ha의 솔잎혹파리 피해가 발생해서 47.7ha에 방제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이후 2017년까지 솔잎혹파리, 솔껍질깍지벌레, 소나무재선충, 솔나방 등 침엽수의 병해충뿐만 아니라 활엽수의 병해충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환경부에 의해 식생훼손의 실태와 그 원인의 대강이 밝혀졌음에도 석포제련소 부근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환경부의 조사(2015.6~2016.12) 이후에도 식생훼손지역이 확대되었다는 것이 위성사진 등을 통해 확인된다.

금강소나무는 석포의 미래
 

2018년 6월의 석포제련소 1공장 부근. 금강소나무가 집단 고사하고 토양이 유실되고 있다. ⓒ 정수근

 
전체 면적에서 임야가 82.43%나 되는 봉화에는 산림자원이 풍부하며 그중 절반 이상이 침엽수이다. 봉화군의 임상별 산림면적(ha)을 보면(2017년 12월 말 기준) 침엽수가 53.2%이다(활엽수 19.8%, 혼효림 25.4%). 임목축적량(㎥)으로 따지면 침엽수 비중은 58.0%로 더 높아진다(활엽수 17.1%, 혼효림 24.9%). 봉화의 침엽수 비중은 경상북도 전체에 비해 10%가량 더 높고, 우리나라 전체와 비교해서는 15%가량 더 높다.

금강소나무(춘양목)는 봉화의 군목(郡木)이다. 뒤틀림이 없는 곧은 나무여서 군민의 힘찬 기상과 인내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금강소나무가 많은 봉화에는 송이버섯도 많다. 소나무 잔뿌리에서 자라는 송이(松栮)는 봉화의 특산물이다. 봉화군 산림의 절반 정도에서 생산되는 송이는 봉화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이기도 하다.

곧고 단단해서 최고의 목재로 쓰이는 금강소나무는 역사 속에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조선시대에는 권력자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일제 강점기에는 제국주의 수탈에 의해 무참히 베어졌다. 산업화 과정에서 오지 중의 오지였던 석포 산골짜기에 영풍의 아연제련소가 들어서면서 주변의 금강소나무가 집단 고사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가 기후위기와 생태계 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코로나19의 발생도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로 자연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오게 된 것이라고 생태학자들은 말한다. 생태계 보전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50년 전에 들어선 영풍의 아연제련소가 석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석포제련소가 들어선 이후 하천과 토양이 중금속에 오염되고 식생이 집단 고사하고 있다. 기업은 성장하고 경제는 발전했지만 주변 생태계는 희생되었다. 미래세대에게 이처럼 파괴된 자연환경을 물려줄 수는 없다.
  
영풍 석포제련소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해답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석포제련소가 문을 닫으면 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마을 주민이 당장 생계 곤란을 겪을 수 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문제해결의 기본방향은 석포의 자연환경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고 훼손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염 원인자인 영풍과 관리감독 소홀의 책임이 있는 정부가 공동으로 부담을 지고 노동자와 마을주민, 지역주민이 지혜를 모은다면 자연환경도 살리고 생계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석포는 대대로 금강소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다. 토착식물인 금강소나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과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드는 것이 석포를 석포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석포의 기후와 토양 조건에 적합한 금강소나무를 잘 가꾸고 활용한다면 석포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금강소나무의 수난,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다음 연재 글은 '⑥ 산채와 고랭지 채소의 고장 석포'입니다.

한국 전근대 교통사

고동환 (지은이),
들녘, 2015


#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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