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이름 되찾아준 조선 초기 광주의 대표 '뇌섹남'

필문 이선제의 '부조묘'와 '괘고정수'

등록 2020.05.06 09:22수정 2020.05.0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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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자료 제7호 필문 이선제 부조묘 ⓒ 임영열

   
지금으로부터 569 년 전. 1451년 조선 문종 1년, 광주에서 큰 축제가 있었다. '광주(光州)'라는 옛 이름을 잃어버리고 '무진군(武珍郡)'으로 강등된 지 실로 20여 년 만에 다시 광주목(牧)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군(郡)에서 다시 시(市)로 승격됐으니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이날 웅장하게 새로 지은 2층 누각이 객관의 북쪽, 지금의 충장로 광주 우체국 자리에 완공되었다. 기쁨과 경축의 누각이라는 '희경루(喜慶樓)'가 완공되고 고을의 명예까지 회복됐으니, 광주 사람들의 기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라 감사,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1415~1477)은 이날 광주 사람들이 기뻐하는 풍경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옛 이름 되찾은 오늘/ 새로 지은 누각이 유독 우뚝하네/ 멀리 산들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허리를 구부리면 잡힐 듯 물빛은 맑기만 하네/ 꽃들도 청초하고 어여쁘니/ 술 향기마저 잔 위에서 춤을 추네/ 아이들도 기쁨에 겨워 달음박질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의 옷소매가 하늘 높이 치솟네"
 

필문 이선제 선생의 부조묘와 괘고정수가 있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했다 ⓒ 임영열

 
광주목(牧)이 무진군(郡)으로 강등된 사연

조선 초기, 건국의 혼란기를 지나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던 세종 시절. 광주는 어찌하여 광주라는 고을 이름을 잃어버리고 무진군으로 강등되었을까. 1430년 광주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세종 12년 그해 광주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세 남녀의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새로 부임한 신임 목사 신보안이 광주의 토호세력이자 만호(萬戶) 벼슬을 역임한 노흥준의 애첩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이를 안 노흥준은 한밤중에 목사의 관아에 쳐들어가 신보안을 구타했고 급기야 목사가 사망하기에 이른다.
 

필문 이선제 부조묘는 정면 2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집이다 ⓒ 임영열

 

부조묘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곳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를 모셔놓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 임영열

 
현직 목사와 지방의 호족 세력이 연루된 치정 살인사건은 조정에 까지 보고 되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왕이 임명한 목사가 구타당하고 사망했으니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목사가 관아에서 간통한 것은 불의한 일이라 할지라도 일개 고을 백성이 목사를 죽게 했으니, 이는 강상죄(綱常罪)에 해당하는 큰 죄였다.

유교적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어긴 강상죄가 발생한 고을의 읍호 강등은 당시의 법이었다. 이에 세종은 광주목을 무진군으로 강등시킨다. 노흥준의 '한방'으로 '광주목(牧)'이 날아가버린 셈이었다. 노흥준은 변방 먼 곳으로 추방되어 일생을 군역에 종사토록 했으며 가산도 전부 몰수되었다.

필문 이선제, 광주 명예회복을 위해 출사표를 던지다


노흥준의 우악스러운 성격 탓으로 졸지에 읍호를 강등당한 광주 사람들의 애통함과 억울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크나큰 고통이었다. 고을의 명예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손실이 컸다. 지역의 인사들이 앞다퉈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재심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부조묘의 외삼문. 창학문 ⓒ 임영열

 
고을의 이름을 잃어버린 지 20여 년이 지나고 새로운 왕, 조선 제5대 문종이 등극했다. 고을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에 광주 대촌면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서 예문관제학, 호조, 공조 참판과 강원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지낸 필문 이선제(畢門 李先濟 1390∼1453) 선생이 광주의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조선 초기 광주를 대표하는 지식인, 필문이 앞장서서 고을의 원로들과 함께 새로운 임금에게 '신보안 목사 구타 사건'의 재심을 상소했다. "임금이 은혜를 내림에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터에 하물며 우리 고을의 오랜 억울함을 어찌 그대로 안고 있을 수 있겠소"라며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파악해 보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종 1년 광주는 다시 옛 이름, '광주목'을 되찾게 된다.

1451년, 실로 20여 년 만에 '광주'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명예회복을 하게 됐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겠는가. 아이들은 기뻐서 달음박질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의 옷소매는 하늘 높이 치솟았을 것이다. 필문 이선제 선생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북구 풍향동 서방사거리에서 산수오거리를 지나 남광주 교차로까지의 도로를 '필문대로(畢門大路)'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필문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1998년, 필문의 묘소에서 도굴되어 일본으로 불법 밀반출되었다가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의 노력으로 2017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 이 묘지는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됐으며,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 임영열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난 광산 이씨, 필문 이선제는 1411년(태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세종 원년에 임시로 치러지는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예문관 제학과 집현전 수찬, 형조참의, 병조참의, 강원도 관찰사, 예조참의, 호조참판, 세자 우부빈객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이조판서 정인지와 함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하고 태종실록을 편찬하는 등 조선 초기 세종과 문종 때 광주를 대표하는 문신이었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 광주 향약을 기초하고 실시했다. 그의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사후에 부조묘(不祧廟)를 하사 받았다.

부조묘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곳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를 모셔놓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필문의 묘소 아래에 세워졌으며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 ‘괘고정수(掛鼓亭樹)’ 광산 이 씨 집안에서 과거 급제자가 나올 때마다 나무에 이름을 걸어 놓고 북을 치며 축하연을 베풀었다 ⓒ 임영열

 
"이나무가 죽으면 우리 가문도 쇠락할 것이다"

필문 이선제가 나고 자라고,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있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광산 이 씨의 종가가 있는 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600여 년이 되는 왕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필문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괘고정수(掛鼓亭樹)'라 불리는 이 나무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필문은 이나무를 심으면서 후손들에게 "이 나무가 죽으면 우리 가문도 쇠락할 테니 각별히 관리하라" 는 말을 남겼다. '괘고(掛鼓)'는 북을 매달아 놓는다는 뜻으로 후손들은 집안에 과거 급제자가 나올 때마다 나무에 이름을 걸어 놓고 북을 치며 축하연을 베풀었다. 명문의 가문답게 과거 합격자가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지며 마을에는 북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동안 이어지던 북소리는 필문의 5대째에 접어들면서 뚝 그치고 말았다. 1589년 선조 22년에 동인과 서인의 세력 다툼으로 발생된 '기축옥사'에 필문의 5대손 이발(1544~1589)과 이길(1547~1589) 형제가 연루된 것이다. 본인들은 물론이며 노모와 어린 자식들까지 죽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기축옥사로 필문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이 나무도 말라죽었다가 300여 년이 지난 후 이발 형제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다시 새 잎이 돋아나고 생기를 되찾았다 ⓒ 임영열

 

필문 후손들의 유적비. 필문의 두 아들인 이시원과 이형원이 과거에 합격했고, 이형원의 아들 이달손, 이달손의 아들 이공인, 이공인의 아들 이중호, 이중호의 아들 이발과 이길이 대를 이어 과거에 합격했다 ⓒ 임영열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은 송강 정철의 주도하에 발생된 '조선 최대의 미스터리 용공조작 사건'으로 동인 계열의 영·호남 엘리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다. 이 역모 조작 사건은 아직까지도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필문의 가문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겨진 가족들도 죽임을 당하자 이 나무도 서서히 말라죽기 시작했다. 300여 년이 지난 후, 이발 형제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다시 새 잎이 돋아나고 생기를 되찾았으며 필문의 가문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호남 선비들과 필문 이선제 가문의 씨를 말렸던 옥사가 끝난 지 43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전해지고 있는 여담이 하나 있다. 기축옥사 이후, 광산 이씨 가문은 송강 정철의 가문인 연일 정씨 하고는 혼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광산 이씨 아낙들은 깍두기 무를 썰때 '송강 송강' 하면서 썰고, 생채를 썰때는 '철철철' 하며 썰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광주의 대표 지식인, 필문 이선제는 나고 자란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뒷산에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있다 ⓒ 임영열

#필문 이선제 #부조묘 #괘고정수 #필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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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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