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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회장이 거북화석 찾으면 1억 준다는 소문에"

해외 건설 노동자로 사셨던 아버지의 젊은 날을 듣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

등록 2020.05.07 19:03수정 2020.05.0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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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일 년 중 몇 번 만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이날은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기 위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핵가족화가 되어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평소에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 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부모님 생각을 하라고 만들었나 싶기도 합니다. 시민기자 활동을 하며 인터뷰 기사를 쓰고 있는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월 5일 어린이날, 75세의 아버지를 만나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1946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1950년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1980년에 처음 중동에 가서 일했고, 1986년에 한국에 돌아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시대를 맨주먹으로 사막에 나가 달러를 벌어와서 나라를 일으킨 세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몇 장 남지 않은 사진을 보며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 오래된 앨범에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은 몇 장 없는데, 어떤 이유인가요?
"어릴 적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후에는 배고픔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지.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어. 그나마 군대 시절의 사진이 몇 장 있네. 겨울엔 추워서 자동차 배기통에 손을 녹였고, 하루라도 기합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지. 어느 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어. 그래서 의병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세상에 혼자 던져진 느낌이었어. 모든 것이 막막했지."
 

군대에서 동료병사를 이발해주는 모습 ⓒ 유병천


-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엄마에게 누나와 저를 맡기고 중동지방으로 떠나셨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1970년대에 엄마를 만나 결혼해서 너희를 낳았지. 당시엔 일하고 돈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 가구공장에서 목공 기술을 배우며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매우 어려웠는데, 더 어려운 건 월급을 못 받는 일이었어.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곳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건설현장으로 찾아갔어. 그땐 공사장에 사람이 많이 필요했으니까. 그곳에서도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현장에서도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지. 살아가기 위해 빚을 져야 했고 점점 더해가는 빚을 갚기 위해 사막으로 떠나길 결심했지."
 

출국 전 가족사진 ⓒ 유병천

 
- 사막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요?
"건설회사에 신청해서 시험을 보고 합격한 후 처음으로 나가게 된 곳은 아랍 토후국이었어. 1980년에 현대건설에 신청해서 다녀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안 보이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일을 잘한다고 미국 감독관에게 이민을 제안받은 거야. 미국에서 좋은 조건에 일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제안이 좌절되었지. 정말 공부를 못해서 울어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어. 어찌나 서럽고 아깝던지 평생 잊히지 않아."
 

중동 지역에서 작업하는 모습 ⓒ 유병천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버지, 다음에 간 곳이 어디였죠?
"두 번째로 나간 곳은 1981년에 극동건설에서 가게 된 사우디아라비아였어. 약 2년 정도 다녀왔지. 그땐 한 번 다녀온 경험도 있었고, 사막 생활도 익숙해졌지. 그래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한국에 가고 싶었지.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겨우 먹고 살아갈 정도였어. 돈을 모아서 한국으로 들어올 정도가 아니었지. 그래서 다시 리비아로 떠났지. 당시 리비아는 치안이 좋지 못했어. 그래서 생명수당을 더 받을 수가 있었거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 유병천

 
- 리비아에 가장 오래 계셨던 걸로 알아요. 그곳에서 기억에 남는 일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사막에서는 힘든 일도 일이지만, 더위와 싸워야 해. 일할 땐 각소금을 먹어가며 일했어. 안 그러면 탈진해서 쓰러지거든. 하루는 일하다가 정말로 쓰러진 거야.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다행히 응급 처치를 받았고, 영양제를 주사로 맞고 일어났어. 자주 태우던 담배를 끊을 결심도 그때 했어. 정말 죽겠다 싶었어.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지. 죽는다고 생각하니 한국에 두고 온 가족 생각이 가장 많이 나더라고."
 

리비아 건축현장 ⓒ 유병천

 
- 각소금을 드시며 버티셨군요. 가끔 사하라 사막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나요.
"리비아는 대우건설에서 갔었는데, 당시의 회장이 김우중이었어. 그때 김우중이 거북 화석을 찾으면 1억을 준다는 소문이 돌았지. 신년 초 연휴 때 반장들 몇 명이 모여서 사하라로 떠났지. 결론을 이야기하면 거북이 화석은 찾지 못했어. 다만 사막의 무서움은 경험하고 올 수 있었지. 낮과 밤이 다른 사막에서 인간은 아주 미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야."
 

거북이 화석을 찾아서 사하라 사막으로 ⓒ 유병천

 
- 한국에 돌아와서도 정말 일을 많이 하셨죠.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을 꼽으라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건설현장에서 자재를 올리는 구멍으로 떨어져서 몇 달간 입원한 때, 과로로 쓰러졌던 때, 사업에 실패해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집까지 팔았을 때, 돌아보면 순간순간 어려웠던 일이 많았던 것 같아.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리비아에서 현장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야. 살아 있어야 일도 할 수 있고, 가족도 볼 수 있으니까."

- 올해 75세가 되셨는데요. 평생 많은 경험을 하셨죠. 혹시 군입대를 앞둔 손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정말 배고픈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정말 풍요로운 것 같아.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우리나라를 해외에서 배우려고 할 정도이니까. 내가 젊을 땐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었어. 정말 잘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살아보니 우리나라가 정말 좋은 나라야. 소중하고. 난 공부가 부족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요즘 애들은 인터넷이다 뭐다 배울 기회가 많잖아. 그러니 많이 배워서 좋은 나라를 오래오래 지켜줬으면 좋겠어."
 

젊은 날 증명사진 ⓒ 유병천

   

75세의 아버지 ⓒ 유병천

 
오랜만에 아버지와 대화를 하니, 중학교 때 붓글씨로 써주신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 생각납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작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내용이죠.

젊은 날 증명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빛도 어느덧 세월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 같습니다. 얼굴의 주름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을 느낍니다. 어버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유영근 #어버이날 #중동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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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 회사에 다니고 주말에 글을 쓰는 주말작가입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좋은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https://brunch.co.kr/@yoodluf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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