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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을 보라, 너무 늦게 개혁했기 때문에 망했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 사립학교와 조선시대 서원

등록 2020.05.10 21:08수정 2020.05.1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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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 내부에 있다. ⓒ 김종성

 
대한민국 역사에서 조선시대 역사와 비슷하게 전개되는 부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사립학교 문제다. 사학 비리로 불리는 이 문제는 조선시대에도 상당히 심각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한 장면이 음력으로는 고종 8년 3월 20일 자, 양력으로는 1871년 5월 9일 자로 <고종실록>에 기록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유명한 하교다.
 
"성묘(聖廟)의 동서쪽에 배향하는 현자들과 충절 및 대의를 탁월하게 빛낸 분을 모시는 서원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숭상할 만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제사를 그만두고 현판을 철거하도록 하라."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에 공자와 함께 배향된 유교 현인들과 더불어, 충절과 대의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추모하는 서원 중에서 앞으로도 계속 받들 필요가 있는 47개 서원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철폐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것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다.

오늘날의 학교에서는 교육이 우선이지만, 옛날 학교에서는 제사가 우선이었다.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서원을 방문해보면, 명륜당 같은 강의실보다 추모 공간인 사당이 더 중요하게 배치됐음을 느낄 수 있다.

서울 대학로 인근인 성균관의 경우에는, 대성전이 전면에 있고 명륜당이 후면에 있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를 띤 것이다. 묘(墓)는 무덤이고, 묘(廟)는 사당이다. 묘(廟)를 강의실보다 중시한 것은 조선시대 교육에서 제사가 차지한 위상을 짐작게 한다.

오늘날의 사립학교에 건학 이념이 있듯, 옛날 사립학교인 서원에도 동일한 게 있었다. 서원의 건학 이념은 그 서원이 누구를 제사 지내는가에서 드러났다. 일례로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 내에 있는 충현서원의 경우, 정몽주·오달제·민영환·김석진 4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화친을 반대하다가 홍익한·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의 일원이다.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로써 충심을 표시했다. 김석진은 1910년 국권침탈 때 동일한 방법으로 충성을 나타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에 대해 의리를 지킨 이 4인을 모셨다는 것은 충현서원의 건립자들이 무엇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서울 도봉산의 도봉서원에서는 조광조와 송시열을 제사 지냈다. 두 유학자를 모신 이유는 여럿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두 사람 다 강경파 유학자들이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유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도봉서원의 건학 이념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1871년 5월 9일의 서원철폐령 당시 흥선대원군은 누구를 제사 지내는가를 기준으로 서원의 존폐 여부를 결정했다. 요즘 말로 하면, 건학 이념을 기준으로 서원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 철폐령에서 살아남은 곳은 안향을 모시는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이황을 모시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같은 47곳이었다. 충현서원과 도봉서원은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사학재단들의 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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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6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사학법 강행처리 무효 대규모 장외집회에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의원들이 사학법 반대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종호

 
사립 어린이집, 사립 유치원, 사립 중고등학교, 사립 대학은 민간 재단의 소유하에 있지만, 그렇다고 재단 자금만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사립학교도 광범위한 국민적 지원을 받고 있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지 않으면, 교원 봉급도 제대로 지급되기 힘들 것이다.


이런데도 상당수 사학재단은 사립학교의 공공성보다는 자율성을 우선적으로 내세운다. 이것이 사립학교 개혁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국민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이사 선임이나 교사 선발, 회계 문제 등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2016년 12월 24일 자 <경향신문> 기사 "사립학교, 국정교과서 방파제로 나선 까닭은"에 인용된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보도자료에도 그런 현실이 언급됐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발의한 그는 보도자료에서 "대부분의 사립학교 교원 인건비가 국고에서 지원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본 법안은 사립학교에 대한 무리한 간섭이라고 보기 어려우며"라고 말했다.

게다가 상당수 사학 재단들은 역사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까지 보였다. 2016년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제1차 촛불집회가 열린 뒤에도 이들은 박 정권의 역점 사업이었던 국정교과서 문제에 여전히 집착했다. 재단 이사장들의 협의체인 한국사립초중고법인협의회(법인협의회)는 그해 11월 30일 "역사교과서 국정 발행을 조속히 이행해, 오는 3월 신학기부터 학교에서 쓸 수 있도록 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립학교 교장들의 모임이라서 위 협의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는 그로부터 7일 뒤의 성명에서 "국정 역사교과서가 과거의 검정 교과서에서 나타났던 좌편향적 시각의 기술들을 걷어내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며 국정교과서를 옹호했다.

상당수 사학재단은 사립학교의 공공성보다는 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국정교과서와 관련해서는 자율성을 포기하고 국가 개입을 받아들이려 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가 이승만·박정희에 편향된 교과서가 아니었다면, 또 상당수 사학재단이 이승만·박정희에 편향되지 않았다면, 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초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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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8일 사립학교개혁과비리추방을위한국민운동본부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사학비리 근절과 사학공공성 확보를 위한 원스트라이크아웃제 입법촉구' 기자회견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2016년 12월 6일 전교조·교육운동연대·사학국본이 공동 발표한 성명 "사학법인협의회는 국정화 찬성 성명서를 철회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이 성명이 말하는 사학법인협의회는 위의 법인협의회를 가리킨다.
 
"부패사학 지배세력은 국정농단세력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할 것이다. 해방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사학의 일부는 국가의 교육사업이 부실한 상황에서 재산을 축적하고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그들의 기득권 유지는 정치권력과의 유착관계 형성을 통해 가능했으며, 사학의 온갖 전횡과 치외법권적인 권리행사는 공교육을 병들게 했다. 이번 사학 지배세력의 '국정 역사교과서 구하기' 행태에는 권력에 기생해온 사학의 태생적 한계가 반영되고 있다."
 
위 성명은 뒷부분에서 일부 사학재단과 정치권력의 유착을 한 번 더 언급했다. 일본인들이 두고 갔다 하여 적산(敵産)이라 불린 재산을 차지하고자 사립학교를 설립한 일부 재단의 부조리가 대한민국 사학 비리의 토양이 됐다는 것이다.
 
"친일적산을 물려받은 자들은 재산보호 수단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했고, 국가 재정의 여력이 없는 정권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사학의 비대화를 이루었다. 태생적 한계를 가진 일부 사학에서는 재단 이사장과 친족들이 학교 운영을 억압적이고 독선적으로 행하면서 많은 비리를 저질러왔다. 자신의 과거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독재정권에 동조하기도 했다. 이와 동일선상에서 일부 사학 지배자들은 국정 역사교과서를 통해 자신의 어두운 친일 행적을 지우고 싶어 한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사립학교의 공공성이 확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친일 적산의 부조리한 소유 및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독재정권과의 유착과 무관치 않다는 설명이다. 송시열 같은 보수 정치인을 제사 지낸 서원들처럼, 이승만·박정희를 추앙하면서 현실적 이익을 챙겨온 일부 사립학교들이 이 사회의 부조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학재단이 받는 지원을, 조선시대 서원들은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면 받을 수 있었다. 임금이 현판을 하사한 곳이란 의미의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면 지금의 사립학교 지원을 연상케 하는 광범위한 지원을 받았다.

사액서원은 토지·서적뿐 아니라 면세 혜택까지 받았다. 거기다가 노비도 제공받았다. 노동자 대부분이 노비 신분을 갖고 있었던 시절에 노비를 보내줬다는 것은 국가가 서원 인건비까지 책임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액서원들은 받은 것에 상응하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 도리어 악용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서원을 조세 회피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상당수 서원들은 정치적 편향성까지 보여줬다. 서원을 당쟁의 거점으로 내준 것이다.

서원들은 국가재정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사액서원이 늘고 토지 제공과 면세 혜택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의 세수가 감소했다. 이런 경향이 조선 후기인 17세기부터 두드러졌다. 이로 인한 폐해가 200년 이상 누적된 상태에서 흥선대원군이 1871년에 초강수를 내놓았던 것이다.

절실한 사학 개혁
 

도봉서원. 도봉산에 있다. ⓒ 김종성

 
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설명하는 오늘날의 역사서나 논문들에서 거의 항상 빼놓지 않고 강조되는 사항이 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가 바로 그 서원 철폐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서원 철폐 때문에 유림(선비사회)의 지지를 잃은 일이 개혁의 동력을 떨어트렸다는 것이다.

유림의 지지 철회가 개혁정치에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개혁을 위해서는 서원 개혁을 유보해야 한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원의 폐해는 17세기부터 나타났다. 그래서 1657년에는 효종 임금이 서원 설립을 허가제로 바꾸고, 1714년에는 숙종이 불법 서원들을 철폐하고, 1741년에는 영조가 동일 조치를 시행했다.

이는 1871년의 서원 개혁이 너무 뒤늦은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효종 시절부터 시도된 서원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에, 200여 년 뒤에 대원군이 초강수를 꺼내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서원 개혁을 했기 때문에 대원군의 개혁정치가 망한 게 아니라, 너무 늦게 서원 개혁을 했기 때문에 대원군의 조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백 년간 비대해진 서원 세력을 상대하기에는 대원군 정권이 너무나 초라했던 것이다.

이 사례는 대한민국이 사학 개혁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사학 개혁을 시도하면, 사립유치원 사태에서 나타난 것처럼 상당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또다시 다음 세대로 떠넘기면, 다음 세대가 훨씬 더 힘들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 역시 사학 개혁 때문에 다른 분야의 개혁을 덩달아 망칠 수도 있다. 너무 뒤늦었던 대원군의 서원 철폐는, 지금도 많이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고삐를 당기지 않으면 안 되는 사학 개혁의 절실함을 우리 시대에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사립학교법 #사학 비리 #서원 #서원 철폐 #교육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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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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