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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부끄러워해야" 그날 광주에 있던 외국인들의 증언

[5.18 40주년 특집-이방인의 증언 ③] 평화봉사단원들이 말하는 '5.18 왜곡'

등록 2020.05.14 07:04수정 2020.05.1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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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했다.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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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당시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에 실리기도 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5.18민주화운동 혹은 5.18민중항쟁. 이 같은 표현은 1980년 이후 40년 세월 동안 견고히 자리잡아왔다. 전자엔 성과가, 후자엔 세력과 성격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폭동이란 오명을 썼던 역사는 그렇게 도도하게 바로잡혀왔다.

당시 항쟁의 복판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한 미국인이 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는 이 같이 말했다.

"찰스 디킨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으며, 믿음의 시대이자 믿기지 않는 시대였다.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영암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했던 데이비드 돌린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사진은 2005년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은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재단 직원과 함께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찍은 것이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길지도 짧지도 않은 40년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힘차게 흘러왔지만 여전히 절망을 열망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폭동"이란 말을 여전히 사용한다. "외부세력"을 이야기하고 "북한군 침투"를 이야기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마저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다. 절망의 시대가 그리운 이들은 '민주의 시대를 누리며 민주를 열망한 시대를 거부하는' 모순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1980년 5월 27일 항쟁이 '잠시' 멈췄을 때, 짓밟힌 금남로의 핏자국을 눈에 담은 미국인이 있다. "소총을 든 병사들과 고압 호스로 혈흔을 비롯해 난장판이 된 거리를 치우는 사람들을 봤다"는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는 "나는 (5.18을 왜곡하는)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1971~1974년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했다.

"대한민국은 1980년 광주에서 흘린 피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5.18을 왜곡하는) 그들 또한 광주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광주를 비방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5.18은 정부의 불법적인 군사 폭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지지자가 아닌 군사독재의 지지자처럼 보인다."
 

1971~1974년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도널드 베이커. 1980년 연구를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던 그는 1980년 5월 27일 광주에 가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의 끝자락을 목격했다. 그는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도널드 베이커 제공

 
폭력, 그리고 저항

<오마이뉴스>는 데이비드 돌린저와 도널드 베이커를 비롯해 총 4명의 외국인과 '5.18 왜곡'에 대해 이메일로 인터뷰했다(원래 4월에 그들을 직접 만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인터뷰 일정이 미뤄졌다). 그들은 모두 평화봉사단에 소속돼 있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등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한국엔 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들어와 있었는데, 인터뷰 한 4인은 5.18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이다.

데이비드 돌린저와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는 5.18의 상당 기간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인이 된 팀 원버그(Tim Warnberg)와 함께 광주 시내 곳곳을 다니며 현장을 목격했고, 외신기자 인터뷰를 주선·통역했다. 데이비드 돌린저는 당시 자신이 목격한 것과 찍은 사진을 다른 평화봉사단원에게 전했고, 이 내용은 외신을 통해 보도됐다. 폴 코트라이트는 최근 당시의 경험을 담아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영문판 < Witnessing Gwangju >)을 내놨다.


데이비드 돌린저 "5.18은 억압받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치된 노력이었다. 결코 폭동이 아니었고 시민들은 서로를 아꼈다. 그들은 5월 21일 밤 도청 건물에서 군대가 후퇴한 후 도시를 청소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평화적인 결말을 맺기 위해 협상에 대한 노력의 증표로 무기를 회수한 시민들이었다. 북한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폴 코트라이트 "5.18을 폭동이라고 주장하거나 북한이 연관돼 있다는 관점들은 완전히 쓰레기다. 내 회고록에도 이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 나는 당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었고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회고록에 썼다. 5.18의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내가 목격한 모든 것은 5.18이 전두환 군부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 대응한 민중들의 봉기였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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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코트라이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사진은 나주에서 근무하던 폴 코트라이트의 모습. ⓒ 폴 코트라이트 제공

 
40년 전 봄의 문을 두드린 이들 덕분에, 우린 따스함 속에 살고 있다. '민주(民主)'를 향한 열망은 절대다수에겐 희망이었고 특권소수에겐 절망이었다. 특권소수의 반민주를 향한 열망은 잔혹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절망의 세력이 희망의 세력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Tim Warnberg)는 1987년 쓴 논문 <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 >에서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인용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권력 누수를 느끼는 자들은 폭력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폭력으로 대신하면 승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크다. 패배자뿐만 아니라 승리자 또한 자신의 권력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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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왼쪽에 카메라를 든 인물이 위르겐 힌츠페터이고 오른편 4명(차례대로 쥬디 챔벌린, 팀 원버그, 폴 코트라이트, 데이비드 돌린저)이 평화봉사단 단원들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평범했지만 비범했던

도널드 베이커와 빌 에이머스(Bill Amos)는 5.18을 비교적 간접적으로 경험한 인물이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도널드 베이커는 자신이 평화봉사단원으로 근무했던 곳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단 소식을 듣고 곧장 광주로 이동했다. 삼엄한 경계 때문에 산을 넘어 겨우 광주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은 5월 27일 오후였다. 그는 항쟁의 끝자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아시아학과 교수이다.

안양에서 근무하고 있던 빌 에이머스는 다른 목격자의 증언과 과거 목포에서의 근무 경험을 떠올려 1999년 < The Seed of Joy >란 제목의 소설을 내놨다. 5.18을 다룬 최초의 외국 소설이었다.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당시 시신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에 실리기도 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도널드 베이커 "역사학자로서 나는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그들의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 광주시민들이 폭동 세력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먼저 폭력을 행사한 것이 광주시민이 아니라 군대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왜곡을 일삼는)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80년 6월 한국의 대령이 나에게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나에게 '전두환 장군은 동포를 대함에 있어서 북한처럼 행동했다'라고 말했다. 광주를 비방하는 이들은 북한에서 하는 것과 같은 역사 왜곡에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빌 에이머스 "(5.18을 왜곡하는 이들은) 항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실과 맞닥뜨려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광주항쟁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권위주의 군부정권에 항의했고, 정부는 그들에게 악랄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사람들은 이에 반격했다. 북한 사람들이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는 종종 그들의 정권에 대한 저항의 책임을 외국이나 다른 세력에게 돌린다." 
 

목포, 안양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한 빌 에이머스는 주변 동료들의 증언과 목포에서의 근무 경험을 토대로 1999년 소설 를 썼다. 이 소설은 외국에서 나온 첫 5.18민주화운동 관련 소설이다. ⓒ 빌 에이머스 제공

 
평화봉사단원들은 5.18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광주의 희생을 가슴 깊이 위로했고, 이를 왜곡하는 이들의 통렬한 반성도 요구했다. 아직도 곳곳에 구멍이 나 있는 5.18의 진실에 대한 규명도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돌린저 "평범했지만 비범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다. 그들을 왜 불명예스럽게 만드는가. 여러분 모두는 매일 광주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1980년 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진실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 우리가 본 것, 한 것, 느낀 것을 포착하기 위해 관련법이 제정돼야 한다.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희생된 그들을 기리자. 사회가 양심을 잃었을 때 정부는 더 이상 이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시스템은 소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고 대다수는 길을 잃고 버려진다.

1980년 5월 광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희생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5.18은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줬다. 광주는 하나의 도시로서, 그리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통합됐다. 한 집단이 전체의 개선을 위한 입장을 유지하며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폴 코트라이트 "5.18 왜곡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됐다. 군에 의해 자행된 서술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일부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다. 왜곡된 사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당시 정부를 지지하거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역사 왜곡은 사회를 치유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2019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매우 감명 받았다. 그는 슬픔과 사과, 그리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인식을 표현했다. 나는 한국 정치사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5.18은 한국을 변화시키고 민주화의 길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코트라이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 폴 코트라이트 제공

 
도널드 베이커 "사람들은 그들의 윗세대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노예제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리는 많은 백인들을 루이지애나에 있는 내 고향에서 봐왔다. 1980년 6월 서울의 한 버스에서 한 남성이 '전라도는 다 죽여야 할 놈들이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지금도 한국 남서부(전라도)를 향한 약간의 차별이 남아 있다는 걸 느낀다. 광주 사람들을 무식한 말썽꾸러기라고 치부하는 풍조가 일부 남아 있다. 이런 지역에 대한 반감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한국의 단결에 피해를 주고 있다.

나는 역사가로서 과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나누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평판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된다. 전두환같이 고 조비오 신부를 모욕하거나,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을 북한에서 온 특수요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멍청이(idiots)들은 고소당해야 마땅하다. 나는 5.18 피해자들에게 머리를 높이 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한 무리의 장군들에 의한 불법적인 권력 장악에 맞서 싸운 몇 안 되는 민주주의 옹호자였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세계적으로 민주정부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5.18은 희망의 신호탄이다. 5월 27일 군대가 광주 도심을 장악하고 모든 희망을 잃었지만, 결국 광주와 한국의 나머지 사람들은 민주화되었다. 광주의 5.18은 독재정권 아래에 사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빌 에이머스 "특정 정치집단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나는 5.18의 교훈이 만들어진 논쟁에 의해 묻힐까 봐 두렵다. 5.18은 대중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이었고, 결국 승리를 쟁취한 현대 역사의 드문 사건 중 하나다. 권력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면서도, 또한 그것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알려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5.18은 진통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피해자 분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 결국 당신들은 전두환과 그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당신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러한 기억을 널리 알려 달라. 역사의 기록이 소수의 왜곡을 압도하도록 만들자."

 

1971~1974년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도널드 베이커. 1980년 연구를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던 그는 1980년 5월 27일 광주에 가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의 끝자락을 목격했다. 그는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은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도널드 베이커. ⓒ 도널드 베이커 제공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1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①-2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http://omn.kr/1nj2u
② 광주 할머니와 약속 지킨 청년 http://omn.kr/1nk4l


■ 팀 원버그 논문 번역
: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조사1과장)
■ 이메일 인터뷰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덧붙이는 글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평화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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